블랙 글레이즈드 라떼
오늘은 기필코 밖으로 나가리라 다짐했다. 어제부터 생리가 터져 방콕 했던지라 온몸이 근질거렸다. 저녁쯤 정신을 차리고, 올리브영을 가는 핑계로 거리를 나섰다. 근데 무슨 일이람. 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이런.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나가기 싫은데 큰일 났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꽤나 비를 맞을 것 같았다. 결심을 하고 돌아가 기로 한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마음먹고 나온 산책을 이리 방해하시다니.
집에 도착해서 보니 비가 제법 내린다. '나갔다 오는 것을 목표로 했으니 난 임무를 완수했다.'라고 자기 합리화를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한다. 신발을 벗고 중문으로 들어서는데, 도서관에서 빌려놓은 책들이 눈에 보인다.
'그래,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우산과 책을 집어 들고 다시 집을 나왔다. 장하다, 나 자신. 기특하다, 나 자신. 우산을 쓰고 스타벅스로 향한다. 스타벅스로 간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그나마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가 스타벅스라서 간다. 스타벅스에 서서 메뉴를 한참 보고 있었는데, 신메뉴가 나온 것을 보았다. 나는 언제나 카페에 가면 신메뉴를 먹어보는 모험을 한다. 특히나 스타벅스의 신메뉴는 늘 복불복이라 항상 가슴이 콩닥콩닥하다.
"아, 블랙 글레이즈드 라떼 톨사이즈 주세요."
"차가운 것으로 드릴까요? 따듯한 것으로 드릴까요?
"아.... 네?... 아.... 그.. 건 손님의 취향이긴 한데요. 음... 아!! 차가운 것이 아무래도 얼음이 있다 보니 위에 폼이 그대로 유지돼서 폼을 더 즐길 수 있으세요!"
"그럼 차가운 것으로 주세요!"
"아 네! 그렇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나에게는 재밌는 일이었다. 스타벅스의 신메뉴는 블랙그레이즈드 라떼이고, 이 메뉴는 차갑거나 뜨겁거나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한 음료였다. 이런 선택지가 있는 메뉴라면 직원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가장 이 음료를 많이 만들어보고, 접해봤을 것이 분명하니까. 직원은 꽤나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3시간가량 스타벅스에 있었는데 메뉴를 주문할 때 나같이 되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직원의 대답은 역시나 음료를 만들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얼음 위에 폼이 얹어져 있으니 오래 즐길 수 있다는 꿀팁을 내게 알려주지 않았나. 게다가 자연스럽게 이 음료는 폼이 맛있는 음료라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사실 블랙글레이즈드 라떼는 남편이 저번주에 출장을 갔을 당시 스타벅스에서 먹어본 메뉴였다. 이 음료를 마셔 본 남편은 나에게 이름은 잘 모르겠으나 맛있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나는 오늘 스타벅스 메뉴판에서 남편이 보내준 사진의 그림과 같은 것을 찾았다. 그리고 같은 메뉴를 시켰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마셔보았던 블랙글레이즈드 라떼의 이야기를 했다. 놀랍게도 자기도 스타벅스 직원에게 차가운 것과 따듯한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어울리냐고 직원에게 물어봤다고 했다. 그리고서는 남편이 보내준 사진을 확인했는데, 그도 아이스였다.
출장을 간 남편과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각 다른 지역에 있던 스타벅스 직원의 대답은 "아이스요."로 같았다. 난 가장 많이 만들어본 자들의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지역의 스타벅스 직원은 손님의 취향을 언급했지만 그래도 차가운 것을 권유한 것은 무수히 많은 음료를 만들어본 직원의 손이 기억해 낸 무의식이다.
음료를 정리하러 픽업대에 가져다주면서 직원에게 "차가운 것이 맛있었어요"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