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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로 Oct 07. 2023

퇴사를 하니 신고 싶은 로퍼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 

새신이 왔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새신이 왔다.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폴짝. 


포멀 한 옷차림에 어울리는 로퍼를 산지가 언 4년 전이다. 회사를 다닐 때도 처음에나 로퍼를 신고 갔지 한 달 적응기를 지나서는 운동화로 출근했다. 그리고 찢어진 청바지도 입고, 짧은 티셔츠도 입고 갔다. (공무원조직에서 센세이션 했다.) 대민 하는 직군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 같다. 꽉 막힌 곳에 있으니까 옷차림이라도 자유롭고 싶었다. 물론 노출이 심하거나 혐오스러운 스타일은 아니었고, 그냥 좀 MZ세대를 따라가고 싶었달까. 


사회생활 중 로퍼는 위원들에게 중요한 브리핑이 있거나 시상식을 가거나 발표를 할 때 신는 신이었다. 일 년에 10번 이내로 나오는 신발이었다. 그 로퍼라는 것이 발볼을 죄어오고, 앞꿈치 뒤꿈치 전부 아프게 하는 악마의 신발이다. 하필 저렇게 중요한 날에는 왜 그렇게 뛰어다니는지. 정말 편하다는 로퍼를 아무리 신어봐도 오래 신고 일하면 발이 부어서 내가 로퍼인지 로퍼가 나인지 모르는 지경이다. 


그렇게도 찾지 않던 로퍼가 퇴사하고 나니 보이더라. 가을에 패션피플들이 꼭 소장한다는 로퍼. 구찌 셀린 디올 에르메스 명품 디자인의 로퍼가 클래식이라던데. 저 로퍼만 신으면 꼭 내가 파리지앵이 될 것 같고 뉴요커가 여깄어요 할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걸 살 돈과 배짱이 없다. 통장에서 5만 원 이상 지출할 때 얼마나 고민을 하는데 가당 키나하나.


유튜버 쭈언니 채널을 구독한 지 한참 되었는데, 그녀가 콜라보해서 나오는 제작 물품들은 어찌나 그렇게 좋아 보이는지. 하나하나 다 사보고 싶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말 빈털터리가 될 것 같아서 꾹꾹 참아왔다. 그런데 이번 제작 로퍼는 참지 못했다. 쭈언니의 화려한 언변도 한몫한다. 장점과 더불어 신지 말아야 될 사람까지 정리해서 올린 영상이 신뢰도가 급상승한다. 지금은 신고 나갈 일도 없는데, 게다가 중요한 일정이 당장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근데 왜 이렇게 멋져 보이니. 왜 이렇게 신어보고 싶니. 네가 딱딱하고 발을 조여올 것이란 것도 알면서.

크 역시 뭐든지 새것에서 오는 감동이란.

 하... 결국 나는 소비를 합리화하면서 결제를 눌렀다. 정말 빠른 배송. 이틀뒤에 집에 도착했다. 포장부터 선물 받는 느낌. 기분이 설렌다. 즐겁다. 너를 신고 회사에 갈 일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신어보고 싶다. 유후~ 요리 저리 뜯어보고 맛보고 즐긴다. 



'단단한 가죽을 썼군. 

아 새건대 본드자국이 좀 있군. 물티슈로 지워볼까.

양말 신고 신어봐야겠다.

와 너무 힘든데, 손가락 골절되겠다.

오우 생각보다 이쁜걸? 이 정도면 편하지

내일 신고 나가봐야겠다'



밤 중에 혼자 쇼를 한다. 그 짧은 쇼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택배 오면 물건을 꺼내보고 다들 나같이 생각하지 않나? 내일 신고 나가봐야지 하는 결의에 찬 다짐을 하고 잔다.

양말도 신고 현관을 나서본다

다음날 로퍼는 나를 움직이게 했다. 비장한 각오로 너를 신고 5 천보를 걸어보겠다! 결과는 다소 슬펐다. 운동화 러버인 나는 역시 편한 게 최고다. 그 로퍼는 전반적으로 형태가 단단하고 만듦새가 좋아 오래 신을 것 같았고, 오래 걸어도 발볼을 조여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걸을수록 발이 부어올라 전체적으로 빡빡해지는 느낌과 함께, 뒤꿈치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집에 와서 뒤꿈치를 보니 뻘겋게 올라왔다. 양말을 신고 신었는데, 이럴 수가. 




게다가 반짝했던 로퍼 앞코에 주름이 졌다. 내 발걸음에 맞춰서 어쩔 수 없이 주름이 지는 것인데 어제 받은 따근따근한 로퍼에 큰 주름이 떡하니 가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아 역시, 퇴사 전 로퍼의 기억이 절로 떠오른다. 그래 너는 원래 태생이 형식과 격식의 자리를 위해 태어난 아이지. 그런 곳에 신고 가라고 만든 신발이지. 알면서도 산 나 자신을 탓해야지 뭐. 이럴 거면 운동화를 샀어야지. 이제 와서 투정인가. 


너의 주름을 사랑하겠어


회사 다닐 때는 쳐다도 안 보던 로퍼를 사더니, 급 현타를 맞이했다. 오늘 무슨 일인지 로퍼를 신고 착화감 테스트를 하겠다면서 나가 한 시간 반을 열심히 걸었다. 나를 산책시켜 준 로퍼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로퍼에게 말을 걸고 있다. 아직 내 발에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런 거지? 너의 큰 주름 하나 위아래로 잔주름들이 생기고, 뒤꿈치형태도 맞는 날이 오면 편안함을 주겠지? 나를 배신하지 않겠지?


너의 주름을 사랑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겠어. 



아참, 퇴사를 하고 나니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로퍼를 신고 싶어졌다거나 그립다거나 절대 그런게 아니올시다. 단지, 로퍼를 사기위한 변명이 필요했을 뿐. 다들 그런 합리화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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