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로 Nov 11. 2023

집 앞이에요, 천천히 오세요.

기다리는데, 천천히가 되니?

그와 나의 데이트는 평일 밤에도 계속되었다.

연애 초창기에 누구나 그렇듯

호르몬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온다.

없던 힘이 어디서 그렇게 솟아나는 건지

일할 때는 찾아보려야 볼 수 없었던 힘이

숨어있다 퇴근 후 그를 볼 때만 나오는 것 같다.


그는 몇 달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나의 집은 금남의 구역이었기에 밖에서 났다.


한날은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연락을 했다.



"저, 오늘은 야근을 해야 해요. 저녁에 못 볼 것 같아요, "

"피곤하시겠다. 그런데 괜찮아요, "

"네? 어떤 게 괜찮은 거죠?"

"일 끝나면 연락 주세요. 그때 보면 되죠."

"많이 늦을 수도 있는데, 그냥 오늘은 쉬고 내일 봐요."

"잠깐이라도 보고 갈게요. 아주 잠깐만요."

"그럼 제 마음이 불편한데요."

"끝나고 연락 주세요."




아, 그의 호르몬은 나보다 강한가 보다.

사실 야근을 하는 날에는  많이 피곤하다.

게다가 초췌해진 모습을 만난 지도 얼마 안 된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뭐 어쩌겠는가. 나도 보고 싶은데, 본인이 직접 오신다는데,

그렇다면 뭐 이런 모습이라도 사랑해 주겠지.




"이제 마치고 집으로 가요."

"집 앞이에요, 천천히 오세요."

"네? 언제부터 집 앞에 오셨어요?"

"음 2시간 전부터?"

"아니, 끝나면 연락 달라면서요. 그때 출발하는 것 아니었어요?"

"빨리 보고 싶기도 하고, 근처에 후임이 살아서 밖에서 대화도 했어요."

"세상에, 미안하게 왜 그래요."

"뭐가 미안해요? 난 내 시간을 보냈는데."



그가 만나자고 한 순간부터 초 집중을 하여 일을 쳐냈다.

나름 빠르게 끝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우리 집 앞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리고 기다린다고 빨리 봐지는 것도 아닌데, 본인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퍽 난감해졌다.

지금이야 날씨가 선선하고 좋아서 밖에서 두 시간이든 몇 시간이든 기다릴 수 있지

겨울이 되면 어떻게 밖에서 기다리려고 하는 건지.

게다가 이렇게 밖에서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여간 불편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도 일을 하는 사람인데, 정 그렇게 보고 싶다면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오면 밖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덜 피곤하고 좋지 않은가.

시간과 체력이 소진되는 것을 호르몬이라는 마취제로 못 느끼는 것인가.


그는 퍽 즐거워졌다.

밖도  날씨도 좋은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가는 길은 신이 난다.

게다가 거리도 좀 있으니 운동하는 겸 사이클을 타고 가야겠다.

사이클을 타니 40분 좀 넘게 걸린다. 도착하니 생각보다 일찍 와버렸다.

그녀의 동네에 군대 후임이 살고 있다. 이참에 후임과 수다를 떨어야겠다.

마침 후임이 나온다고 하니 같이 커피 한잔을 했다. 더 즐거웠다.

나는 나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그녀가 마쳤다고 연락이 왔다.


아...

이렇게 다른 세계의 사람이  

짧은 조우를 위하여

대형 빅뱅을 일으키며

만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사귀자 말을 안 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