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 올리버
저는 올리버를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만났습니다. 자기 영어가 텍사스 억양이라고 하지만 눈감고 들어도 알 수 있는 프랑스인이었죠.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나 저나 신나게 서로 다른 사람들하고 떠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술에 취한 다른 남자가 제 손을 잡고 껴안으려고 했고- 그러니까 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그날 처음으로 말을 트다시피했는데 사랑은 아니었으니 추행이죠- 힘에서 밀리고 있던 저를 올리버가 와서 구해줬어요. 뭐 퍽소리나고 이런건 아니고 저에게 거머리처럼 붙어있던 그 놈을 웃으면서 뒤에서 껴안아서 간지럼을 태워서 떼내더군요. 그때 생각했어요. 웃기는 놈이구나. 잠시후에 그 놈을 정리하고 저에게 와서 그러더군요. 상의 좀 정리해, 조금 내려와 있어. 라고요.
그는 전형적인 프랑스인이면서도 본인은 아니라고 항상 우기는 스타일이었어요 (그게 또 프랑스인 스타일이기도 한듯..). 저는 그와 만나면서 치즈와 소시송, 오리다리, 파테, 와인등을 원없이 보았습니다. 그 감자요리...우유랑 감자요리..그라탕 도피누아 뭐시기 -흠... 프랑스요리이름은 어려워요 - 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무슨 프랑스어를 쓰는 섬나라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잠깐 함께 감상하실까요 배경음악으로... 지금은 꽤 좋아하게 된 Tu es mon soleil (너는 나의 태양)
저는 사실 올리버의 활달한 성격때문에 올리버를 믿지 않았었습니다. 서로를 만나는 것도, 호기심때문일꺼라고 생각했죠. 그래도 여러번 만나다 보니 성격이 좋고 낙천적인 그와 계속 만나보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그는 항상 미리 약속을 잡는 것이 아니라, '나 지금 어디서 뭘 할건데, 너도 나와서 같이 놀래?'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기 스케쥴에 맞추려고 다른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거나 요가 학원을 안가거나 그런 것도 절대 싫어했어요. 그가 자기 놀 것 다 놀고 언뜻 생각난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 '나올래?' 하기를 기다리는 빙구같은짓을 몇 번 반복하다보니 열통이 터져서 '야, 만나는 거 좀 미리 좀 계획해, 네가 메세지 할 때 내가 일있는데 취소하고 나오는 거 싫다며, 그럼 예약해 3일전에.'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올리버는 민주적인 사람이었기에 처음 몇일간은 그렇게 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와 즉석만남을 자꾸 주선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어느 휴일, 갸의 전화를 기다리다 지쳐 빨래도 방청소도 책도 한권 읽고나도 널럴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 와인한잔 하자는 다른남자의 전화를 받고 나가서 와인을 한 잔 했습니다. 그 다른 남자는 올리버의 친구였는데 여자친구도 있는 사람이었고, 저는 올리버 연락기다리느니 말 잘통하는 그하고 이야기나 하고 있어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예의 '어디야? 내가 거기로 같이 갈께 놀자' 라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와인바로 오라고 하니 왔는데, 올리버가 저와 그 남자가 있는 것을 보고 돌처럼 굳더군요. 화를 내고 돌아가서 카카오톡에 글 그렇게 길게 쓰는 놈 처음봤네... 장문의 편지로 저에게 니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왜 딴놈도 아니고 하필 여자친구도 있는 그놈이냐는 그에게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거면 왜 너를 거기로 와서 같이 마시자고 부르냐고 반문했죠. 그리고 이야기 했어요, 네가 네 볼일 다 보고 남는시간에 전화하니까 내가 너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몰라서 그와 만나고 있었는데, 그런식으로 하는 것이 계속 되면 내 생활이 예측불허가 되는 상황, 난 그런것이 싫고, 네가 나에게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그렇게 할까 싶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영화표를 예매하고, 정식으로 약속시간을 미리 잡아 제가 생각하는 '그럴듯한' 데이트를 했습니다.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그는 '내가 너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해야만 알아줄꺼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질투'와 '오해' 그리고 '화해'의 아름다운 약발이 먹히더군요.
그렇지만 결국엔 그는, 약속시간을 잡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싶어하는 제게, 자기는 어리고 세상을 더 보고 싶고, 언제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처지에 자신은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혼이니 정착이니 하는 것들을 지금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고, 지금 이대로 그냥 쭉 연인으로 만나면 안되겠냐고 그랬습니다. 전 싫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네 시계를 보며 오고가는 이상한 라이프 스타일이 싫다고요, 그렇다면 그만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약도 없이 너같이 훌륭한 여자를 잡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라며 (네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줄은 처음 알았...) 저를 장렬하게 포기했습니다.
전 그것이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을 서두르는 나의 문화와, 결혼에서 자유로운 그네들의 문화. 살아온 족적.
그리고 몇 달뒤 저는 새로 다니기 시작한 요가 학원에서 그를 마주치게 됩니다. 그의 새 여자친구는 저와 같은 요가 학원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헉소리가 났습니다. 왠 아줌마냐며, 이렇게 촌스럽게 생긴애가 좋냐고, 나도 저 여자랑 닮았나 그래서 올리버 취향이었나? 라고 말입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났습니다. 저는 요가 학원에서 그녀만 보면 부아가 나면서도, 어차피 결혼 생각없는 올리버니 너도 쫌 안됐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녀는 올리버와 저와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저에게 매우 친절했습니다. 요가 동작을 도와주기도 하고, 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휴가때는 뭐하냐고 말을 건네기도 했죠. 이상하게, 저는 그녀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인도로 요가를 배우러 떠났죠. 저는 올리버와는 당연히 깨졌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몇 달뒤 올리버는 저에게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인도에 있다고. 저는 그와 끊었던 페이스북을 다시 이어 인도사진을 보러갔습니다. 거기에는 그녀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도에서 요가를 배우고, 그는 인도를 그녀와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참 이상하죠. 사진속의 그 둘은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한여름밤 보름달처럼 빛났습니다. 머리를 일주일동안 안감은 사진이라는 것을 둘이 찍어서 올리고,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차이를 마시고, 해변에서 요가를 하는 사진속의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내가 알던 그녀가 맞나 싶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알았습니다. 왜 내가 아니라 그녀였는지를.
올리버는 그녀와 정착하고 싶다고 제게 말하더군요. 이제는 제가 너무나 좋아하며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는 아름다운 그녀. 알고보니 그녀는 훨씬 전부터 저에 대해 알고 있었대요. 마음까지 넉넉한 여자임에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