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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Sep 02. 2020

하늘에서 비가 오신다.

엄 여사의 좋은 말 철학

엄마는 유달리 말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독한 말이나 강한 억양의 단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똥이나 오줌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나는 주의를 받았다. ‘싼다’고 표현해도 안되고 ‘눈다’, 더 좋게는 ‘화장실 간다’라고 표현해야 했다. 엄마는 교양 없는 말도 나쁜 말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불교신자라서 말로 업을 지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쁜 말은 다 스스로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누군가를 욕하며 ‘걔는 정말 멍청이야’라고 하면 엄마는 그건 내가 멍청이라는 말과 같다고 말했다.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은 늘 주의를 준 그다음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욕을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냐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주변 사람에게 잘 물드는 성격이라서 중학교 1학년 때 욕 잘하는 친구와 몇 주 붙어 다니며 온갖 욕을 다 배웠다. 그 친구랑 붙어 다니던 학기 초에 수련회에 가서 1박 2일 내내 욕으로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 친구랑 서로 욕하는 것이 너무 웃겼다. 친구와 서로 욕하며 대화하면 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 친구와는 오래 사귀지 않았다. 그 친구의 입이 걸었던 것만큼 성격도 원만하지 않아서 친구들이 싫어했고 나도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 뒤로도 나는 평범한 청소년의 수준으로 욕을 썼다.

중2 때였다. 나는 거실에서 친구랑 통화를 하고 있었고 식탁에는 엄마와 아빠가 저녁식사 중이었다. 친구는 중요한 할 얘기가 있다고 나를 계속 붙들었고 엄마는 나에게 빨리 와서 밥을 먹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전화기에 대고 큰소리로 “아 엄마가 빨리 밥 먹으라고 지랄하잖아”라고 말했다.


당연히 엄마도 아빠도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셋 다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셋 다 조용히 밥을 먹었다. 나는 엄마에게 혼나지 않아서 더 불안했다. 혼나지 않아서 나는 변명도 사과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밥을 먹는 내내 엄마 눈치를 봤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엄마한테 욕을 쓰지 않았다.

엄마가 생각하는 말의 영향력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에게도 미친다. 엄마는 세탁기에게도 자주 고맙다고 말을 건다. 네가 있어서 빨래가 쉽다고. 새 세탁기를 구입할 때도 엄마는 오래된 세탁기가 들을까 봐 그 얘기도 안방에서만 했다. 그게 무슨 샤머니즘이냐고 엄마를 답답해했지만 나도 결국 엄마를 닮는다.


며칠 전에 빗길을 달리다가 내 차 타이어가 찢어졌다. 새 차를 구매하는 것에 대해 친구와 대화한 지 3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가 오는 어두운 길에 정차해서 나는 생각했다. ‘요즘 계속 똥차라고 부르고 오래됐다고 구박해서 그런가?’ 내 차는 한밤에 렉카에 매달려서 10킬로를 실려왔다. 타이어를 고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너 때문에 한참을 먹고살았어. 고마워’라고 내 차를 달래줬다. 참 엄마 같은 생각이었다.


엄마는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의 엄마 얘기를 한다. 외할머니는 비가 ‘온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비가 ‘오신다’라고 표현하셨다고 했다. 외할머니를 살아생전 뵌 적이 없지만 그 짧은 표현만으로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닮았다.

엄마를 답답하게 여길 때가 많았지만 좋은 말로 덕을 짓지는 못하더라도 나쁜 말로 업은 짓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정말 백 프로 공감이다.


나쁜 말을 할 때 그 말을 가장 명확하게 듣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입에서 뱉는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안 좋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역시 엄마 말은 틀린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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