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잠시 머물다 간다.

나는 오래 일하고 싶다.

by 미쓰한

고3 경준이가 또 수업을 미뤘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오늘 수업이 저녁 8시에 있다고 리마인드 문자를 보냈더니 '오늘 수업 못하는데요'하고 답장이 왔을 뿐이다. 이만하면 수업을 관두는 게 더 도리에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된다.

'못하는데요'

경준이와의 대화창을 닫아버리고 나는 '경준맘'을 검색해서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경준맘 역시 죄송하다는 말을 앞뒤로 붙인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이번 주 경준이 수업은 통으로 쉬기로 했다. 비교적 유동적인 수업시간이 1:1 개인과외의 장점이라는 걸 경준이가 파악하자마자, 그것은 경준이 영어공부에(결과적으로 내 직업에) 치명적인 단점으로만 작용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경준맘은 경준이를 잘 알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공부를 아주 싫어하지만 그래도 서울 장안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나와 경준이는 매주 세 번을 만났다. 숙제는 매번 답을 베껴오거나 베끼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숙제는 아예 해오지 않았다. 내가 경준맘에게 수업의 무의미함에 대해 얘기할 때도, '수업 중에 숙제를 시켜서라도' 수업 횟수는 줄이지 말아달라고 했다.


햇수로 4년을 소몰이하듯 끌고 오는 동안, 경준이는 자기 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며 고개 숙여 인사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어느 날은 내가 수업시간을 잘못 알고 30분 일찍 수업에 간 적이 있었다. 자다 깬 경준이는 책상에 있던 책을 짜증스럽게 집어던지고는 쿵쾅거리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방문 앞에 서서 경준이의 모든 행동을 본 경준맘은 '선생님이 헷갈리실 수도 있지~'라며 애교스러운 말투로 경준이를 달랬다.


그것도 그나마 엄마가 어르고 달래서 수업할 수 있던 때의 이야기였다. 입시미술을 시작하자 경준이는 더 이상 어르고 달래지지 않았다. 공부로는 대책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경준맘은 뒤늦게 경준이를 미술학원에 보냈다. 고2에서 고3 사이의 겨울방학부터. 비교적 한참 늦은 시작이었다. 그만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경준이가 받아들일까? 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입시미술과 개학이 겹치는 올해 3월부터 경준이의 영어수업은 공식적으로 주 2회가 되었다. 목금토일은 미술학원에 묶여있고, 화요일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그 뒤로 국어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수업이 가능한 날은 단 이틀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틀 중 어느 날도 경준이가 수업이 가능한 상태라고 느꼈던 날은 없었다. 경준이의 책상에는 늘 타이레놀과 정신과 약들이 펼쳐져있었다. 경준이는 그것들을 에너지 드링크와 함께 삼켰다.


간혹 내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이들이 착하고 귀여운지, 말을 안 들어서 얼마나 힘든지 묻곤 한다. 나는 가끔 짜증이 나기는 하지만 경준이 수업을 때려치울 만큼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혹은 정신과 상담을 받아서 너무 안쓰럽거나 애가 타게 측은한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경준이와 달리 모범생이면서도 예의 바른 아이들이 특별히 더 예쁘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감정은 그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십수 년간 번아웃 없이 이 일을 해온 원동력은 어쩌면 친밀감보다는 감정적 거리두기일 것이다.


한 번도 학생을 골라가며 수업한 적이 없다. 나에게 주어진 학생들을 만났다가 때가 되면 보내주었다. 아이들은 영글지 않은 시기에 나에게 잠시 머물다 떠나갔다. 인성을 채워가는 시기에 인성이 덜 되었다고 깊이 화가 나지 않았고 실제로 화내지도 않았다. 시험 점수 이상의 것이 변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키워보지 않은 아이에 대한 학부모의 교육방식을 운운하지 않았다. 수업을 관둬서 헤어질 땐 통쾌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의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경준이의 버르장머리가 아니라, 수업을 효율이다. 경준이의 도덕성이 아니라 나의 도덕성이다. 명분 없는 수업을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것이 바로 '이만하면 그만두는 게 도리가 아닌가' 생각했던 이유였다. 물론 고3 학생을 학기 중에 내팽개치는 일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라서 엄두가 안 나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또 꾸역꾸역 경준이를 끌고 수능 앞까지 데려다 놓아야 한다. 그리고는 경준이도 떠나가겠지.


오래 일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번 주도 경준이와 약간 거리를 둔다. 남부끄럽지 않게 일하고 싶다. 그러므로 다음 주에 풀어볼 경준이의 모의고사를 준비한다. 경준이는 아주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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