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가 같은 날 같은 시에 절멸하는 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다. 멸종되었던 무슨무슨 새가 몇 백 년 만에 다시 발견되었다는 소식 같은 것조차 없이 싸그리, 단 한 개체도 남겨두지 않고 절멸하길 바라며 소원 성취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 지구상의 문제들은 호모 사피엔스로 인해 발생하고 있음에 반론을 제기하는 건 쉽지 않고, 다들 알다시피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은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
아쉽게도 신의 존재에 대해 21세기까지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보니, 호모 사피엔스의 절멸을 멍하니 기다릴 수만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세상을 바꾸려 했다. 뭘 모르는지 알아야 하기에 이런저런 수업도 들어보고 글도 써보고 후원도 하다가 정 급하면 시위에 나가 나눠주는 피켓을 들고 목청껏 소리 질렀고, 그러다 취업을 했다. 취업을 하면서 다짐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 의지를 절대 잃지 말아야지.
그리고 일도 존나 잘해야지~~~
누군가에겐 코웃음 나는 다짐 - 아마 직장인이시겠죠? - 일 것이다. 사회초년생에게 숨가쁘게 돌아가는 스타트업은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첫 취업 후 3개월 동안은 학업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출근 버스에서 과제 자료를 읽고 퇴근 버스에서 졸업 논문을 썼다. (제자의 성장을 누구보다 기도하던 교수님들은 취업 대체 학점 같은 건 주지 않으셨고, 덕분에 각종 과제와 중간/기말고사를 다 치러야 했다.) 아, 이제 좀 회사 돌아가는 걸 알 것 같다며 되도 않는 다짐을 두 번째 했을 때 야근의 파도가 휘모리장단으로 휘몰아쳤다. 처음엔 22시 05분, 그 다음엔 23시 58분, 어어 했더니 25시 13분, 에이 설마 했더니 29시 32분. 사흘을 못 했을 때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건 수분 섭취인 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 수면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일분일초의 수면이 간절했다.
금요일에 야근했는데 이번 시위는 토요일 점심 때네. 요 며칠 계속 잠이 부족했는데 이번 주말은 조금만 자면 안 될까. 후원 계좌 마감이 오늘 정오였구나. 급한 이슈 처리하느라 까맣게 있고 있었네. 이 글 정말 공유하고 싶다. 그런데 sns에 회사 분들도 친구로 등록되어 있는데 뒤에서 말 나오면 어쩌지? 직장에서의 자기앞가림을 핑계로 현실과 타협하며 스스로를 검열하는 지금의 나는, 학생 때의 내가 그렇게도 이해 못하던 그런 인간이 되어 있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글 쓰고 시위 나가던 내 모습은 도대체 어디 갔지? 30분 뒤에 출근하라며 울릴 알람을 맞춰두고선 예전에 썼던 글들을 읽느라 그마저 한숨도 못 잘 때도 있었다. 아, 고작 이만큼에 버거워 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단 거였나.
야근 택시를 기다리고 있으면 가로등마저 나를 욕한다. (너도 북어지) X 3
내가 위인이 될 그릇이었다면 회사를 때려쳤겠지만 나는 하버드 입학을 껌으로 생각하다 건국우유를 감사하며 마시게 된 평범한 대한사람이었다. 이번 달 월급이 들어오지 않으면 당장의 보험료와 관리비를 낼 수 없고 집에 있는 강아지 겨울 옷 한 벌 장만할 수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하다 보면 25시 13분이고 자고 싶다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내 간절함이 부족했었나 보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끝없이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길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길 때마다 귓전에 들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세상을 바꾸고 싶단 욕심을 포기할 수 없다. 세상은 아직 _______ 같고 (각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설을 넣으면 된다) 호모 사피엔스에겐 희망이 없다. 이대로 있으면 호모 사피엔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절멸할 것이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이 있는 호모 사피엔스로서 방관할 경우, 신은 (있다면) 분명히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나태 지옥
그래서 나는 타협했다. 세상을 바꾸는데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세상을 바꾸기로, 타협하지 못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 타협을 해서라도 뭐라도 하자고. 자기 기만이고 변명일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내가 고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다른 방법으로는 퇴사가 있었지만 매달 25일 우편함에 꽂혀 있는 관리비 납부 고지서와 올해로 13살에 접어든 내 개가 눈에 밟혔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상대적 약자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어쩌면 당연히 돌아갔어야 하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예전보다 더 다양한 목적으로 크라우드펀딩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시장 경제에서 자본이 마케팅 지식이 유통망이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부족한 사람들이 와디즈를 찾는 경우가 많다. 나는 크라우드펀딩으론 제일 유명하다는 이곳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메이커들이 보다 많은 펀딩금을 모아갈 수 있도록 콘텐츠 퀄리티를 높이는 피드백을 주거나 한시라도 빨리 세상에 제품을 소개할 수 있도록, 그래서 시간 자원의 손실만큼은 발생하지 않게 오픈을 돕는 것이다. 회사에서의 나와 내 ‘부캐’를 분리하라는 열풍이 몰아치는 이 때,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내 ‘부캐’를 회사에서의 내 모습에 합쳤다. 회사에서 피켓 들고 소리지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왕 크라우드펀딩 회사에 몸담고 있으니 여기서 뭐라도 해보겠단 거다.
그러다 보면 금방 4시 8분 됨
누군가에겐 또 코웃음 나는 다짐이다. (해보겠다는 게 고작 야근이었어? 혹은 돈 버는데 별 시덥잖은 개논리 펼치네 등) 하지만 모래와 먼지만큼도 못한 평범한 대한사람은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햇수로 3년이 걸렸다. 평범한 대한사람이다 보니 맨날 불안하다. 내가 생각한대로 콘텐츠가 나오지 않을 때, 이 콘텐츠라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될 때, 열정 넘치는 메이커의 프로젝트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되지 않을 때, 나혼자 마음이 급해 보일 때, 기타등등 기타등등.
그리고 이 방법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이다. 내가 하루에 만날 수 있는 메이커의 수는 한정이 되어 있고 이 분들 모두가 ‘내 시간 자원의 손실을 이 사람이 아껴줬어! 힘내서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수십 개의 프로젝트를 열어보고 피드백을 드린 게 아무 짝에도 소용없어지는 거다.
아무 짝에 소용 없어짐
그래도 해야 한다. 당장 보이는 거라곤 쓸모없어진 피드백 파일일 뿐이라도 돌아보면 하나 둘 달라진 게 생긴다. 예를 들면 2020 메이커 어워드에 나와 함께 했던 메이커들이 이름을 올렸을 때. 내가 처음 만났을 때와 2020년이 끝무렵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 것을 보면 비효율적일지라도 아주 틀린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방법이 틀렸다고 할 수도 있겠다. 기회의 공정성을 제공하는 방법이 크라우드펀딩 뿐만은 아닐 거라고, 그 방법을 고집한다고 해서 당장 소상공인이나 자본 사회의 약자들에게 돌아가는 게 무에 있냐고. 내가 들었는데 너희 _________ 하지 않냐고. (각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설을, 여기에도 넣으면 된다) 거기에 대한 내 답 :
어떤 지도자들은 당장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시작을 합니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첫 번째 독일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가 그랬어요. 그는 유럽연합이 태동할 수 있도록 첫 단계를 쌓았습니다. 유럽연합은 아데나워가 사망한 이후에야 실현됐습니다. 그가 첫 발을 내디딘 후 50년이 지나서죠.
- 『문명, 그 길을 묻다』 중 2장│재레드 다이아몬드, 41P
2021년에는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싶다. 지금까지는 한 팀 한 팀과 개별적으로 만나가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면 한번에 더 많은 메이커들을 만나고 싶다. 내가 줄 수 있는 피드백뿐만 아니라 그 분들이 듣고 싶은 피드백이 무엇인지 현장에서 직접 듣고 싶은 마음도 크다. 강의도 더 많이 하고 싶고 기회가 된다면 외부 특강도 나가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면 내가 끼칠 수 있는 영향의 범위도 더 넓어질 거고 그럼 조금 더 빨리 세상을 바꿀 수 있겠지. 어쩌면 내가 한 게 타협이 아니라 선택이었다고 스스로가 말해줄 수도 있겠지. (나태 지옥에 밀려 떨어질 확률도 약간은 줄어들겠지.)
나보다 앞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모든 분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갔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했다며 날 선 모습을 보이던 과거의 제 모습에 이 자리를 빌어 모든 직장인 분들께 사과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던 커다란 꿈을 접은 게 아닌,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서 묵묵히 하고 있는 직장인 분들 죄송합니다. 만약 아니라면 그래도 한때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품었을 직장인 분들 죄송합니다.
압도적 죄송...!
새해엔 다들 쓸데없는 목표를 세우곤 한다는데 (예_ 다이어트) 올해는 세상을 바꾸겠단 거창한 목표가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세상을 바꿉시다. 그래야 호모 사피엔스가 절멸하는 날이 왔을 때 조금이라도 당당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절멸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 우리가 세상을 제법 잘 바꿔서 그런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