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하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 이터널 선샤인

by CHEMICAL


이터널 선샤인이 국내에서 무려 4번째 극장 개봉을 하게 되었다. 겨울 하면 떠올리는 영화를 뽑자면 이터널 선샤인을 제외할 수 있을까, 모두가 사랑하는 유명한 명작인 만큼 나에게도 꽤 큰 감명을 준 영화였다. 음악, 내용, 연출, 명배우들의 명연기, 그리고 역시 좋은 Message를 전부 포함한.


워낙 좋아하는 영화인지라 여러 번 재 관람을 하였던 영화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이번에 극장 개봉을 하게 되어 스크린을 통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를 다회차 하게 되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독특한 플롯 구조 덕일까, 이터널 선샤인은 특히 그런 느낌이 든다. 이번이 4번째 관람임에도 불구하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조엘의 기억 속 클레멘타인의 신체 부분이 몇 개 보이지 않다거나, 조엘이 클레멘타인과 다시 만났을 때 하는 모순적이고 어색한 행동들. 다회차를 할 때마다 여러모로 색다른 경험으로 보는 듯하였다.


어쩌면 내가 초회차 때 많이 놓쳤던 걸 수도 있고.. 역시 영화는 스크린으로 봐야 하나 싶다.



이터널 선샤인은 초반부터 적잖이 큰 충격을 준 영화다. 사실 흔한 로맨스 물은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SF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로맨스는 취향이 아니지만 이터널선샤인이 표현하는 로맨스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띵 똥 거리는 THEME와 함께 시작하는 조엘의 독백이 매우 맘에 들어서 그랬는지 초반부터 미소를 지으면서 봤고 조엘과는 대비되는 밝고 경쾌한 클레멘타인을 만나 빙판에서 데이트를 하는 둘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빙판 깨질 까봐 두려웠던 건 나뿐인가)


그러다 갑자기 잔잔하던 분위기에서 갑자기 절절한 BGM과 함께 어두운 분위기로 확 전환돼서 당황하였다. 예측할 수 없었던 전개 덕에 영화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처음 볼 때는 잘 이해가 안 갔던 클레멘타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충동적이고 즉흥적일 수 있을까

나완 너무 다르기도 하고, 또 난 조엘과 성격이 비슷한지라 클렘의 행동이 많이 낯설었던 게 사실이었다.


내 말은, 니 뇌가 어떻게 망가질 줄 알고 그딴 시술을 막 받아. 오랜 연인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그런 결정을 홧김에 해버렸단 것이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엘이 열받아서 자신도 시술을 받으러 간 게 이해가 갔다.



그런 클렘이 다회차를 하면서 보니 좀 다르게 보였다. 막 크게 다르게 본 건 아니고..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바꾸게 됐다. 아마 엔딩의 'OK'를 너무 많이 봐서 내 표용력이 올라간 건가? 정이 든 걸지도.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마 초회차 땐 클레멘타인의 입장에서 보지 않아서 그랬던 거 같다. 영화의 진행은 조엘의 시점에서 진행되는지라 우리는 조엘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고, 또한 영화의 대부분에서 등장하는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기억 속에서 나온 클렘이기 때문이다.


영화 대부분에 등장하는 붉은 머리의 클레멘타인은 클레멘타인이 아니라는 점.



무슨 소리냐면,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조엘의 기억 속에서 진행된다. 조엘의 기억 속 클레멘타인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과거의 기억과 평소 조엘이 클렘에게 느꼈던 감정, 주관적인 정보들로 조합된 조엘이 형상화한 클렘이란 소리다.


물론 조엘과 클렘은 오랫동안 연인관계였으며 클렘은 본인을 숨기는 성격은 아니었던지라. 기억하는 대부분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대부분 자신을 중점으로 이해하니까, 온전한 클렘 그 전부가 보였을까?


뭣보다 시술을 받는 마지막까지도 클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조엘이고 그렇게 감정의 골이 그리 깊어진 상태에서.. 만들어진 클렘은 부정적인 모습이 더 많이 섞여있었을 테다.



조엘이 클렘에게 느끼는 유대, 감정 등이 점점 변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그러니까 기억이 초반으로 갈수록, 처음 클레멘타인에게 보였던 그런 불화들이 점점 소멸되고

클렘과의 기억들이 점점 좋았던 것들만 남아 가는 것이 많이 애틋하기도 하였고


한편으론 그 행복한 기억의 종착지가 모든 것의 소멸이라는 점이 슬프기도 하였다.



무턱대고 기억을 지워버린 클렘을 원망하며 마찬가지로 시술을 선택한 조엘. 하나 그 선택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한다. 돌이켜보니 정말 행복한 추억들이 많았고, 그중에서는 절대 잃어버리기 싫은 기억도 있다. 하늘을 향해 기억을 지우지 말아 달라고 비는 조엘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장면도 그렇고 영화 곳곳에 짐 캐리 특유의 과장된 몸짓과 표정 연기가 나온다. 사실 짐 캐리를 이런 영화에서 보는 게 많이 낯설기도 하였다. 짐 캐리는 훈훈한 가족 영화, 코미디 영화에 주로 출연하지 않았는가. 짐 캐리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고 왜 고평가를 받는 배우인지 똑똑히 알 수 있는 영화였다. 짐 캐리의 쓴웃음과 사연 있는 눈빛은 전작들에서 봤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기억이 안 날 정도였으니까



이터널 선샤인은 상당히 우울한 영화였다. 사실 시술을 선택한 시점부터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조엘과 기억 속 클렘은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발버둥 친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숨기고 싶었던 기억 속으로 가 클렘을 숨기는 것. 그 기억이 자신의 가장 어두웠던 부분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조엘이 새를 죽이는 장면은 영화 내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다가온 장면이다. 조엘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기억까지 들춰낼 정도로 클렘을 잃고 싶지 않은 모습이 안타까웠던 건지, 조엘 역시 아픈 과거가 있으며 아직 그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적인 모습이 슬펐던 건지 모르겠다.



또한 회광반조를 보듯,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유쾌한 모먼트가 줄줄이 나오기도 한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 듯 행복한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쓴웃음이 나왔다. 아무 근심도 없는 어린아이마냥 웃고 있는 클레멘타인을 보고 있자니 조엘도 마음을 다 잡게 된다. 이젠 방법이 없겠구나 하고.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이 부분에서 나온다. 영화 내내 조엘과 함께 감정의 소용돌이를 달려왔던 우리에게도 크게 와닿는 부분.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기억을 멈추는 작업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결국 조엘은 클렘을 처음 만난 그 순간까지 오게 되었으며 이제 아무 방법도 없단 걸 깨닫게 된다. 그런 조엘이 클렘의 미소를 바라보며 내뱉은 말은,


'Just Enjoy it.'

'그냥 이 순간을 즐기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 결코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저항하는 것을 그만두고 현실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조엘, 그러자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클렘도 이젠 그저 사랑스러워 보일 뿐이다.


여담으로 한 번역에서 저 대사를 '그냥 음미하자'라고 번역이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참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슬펐던 건, 조엘이 과거엔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클렘을 따라간 빈 저택에서 조엘은 두려웠고, 말괄량이 같던 클렘이 하는 행동은 조엘에게 많이 낯선 풍경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클렘과 함께 해온 모든 추억을 간직해 온 조엘이 문득 그 순간을 다시 바라보니, 클렘과의 마지막 기억에서 바라보는 클렘과의 첫 만남은 후회되는 것 투성이었다.


조엘이 클렘에게 온갖 추억과 후회를 가지고 전하는 진심과 고백들은 상당히 아련하게 들려온다. 이 대화가 클렘과 조엘의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공드리 감독은 친절하게도 여지를 남겨줬다. 원래 기억대로라면 쫓기듯 문 밖으로 도망쳐 나왔을 터이지만, 조엘은 기억에도 없었던 부분으로 들어가 클렘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클렘이 속삭이는 한 마디.


MEET ME IN MONTAUK.


이 마지막 말이 도화선이 되어, 둘은 결국 몬톡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된다.


...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 니체


어찌 보면 매리와 박사의 관계도 그렇고, 이터널 선샤인은 운명론을 아름답게 얘기해 주는 듯하다. 이 모든 과정을 겪었음에도 몬톡에서 사랑의 케미스트리로 다시 만나게 되는 조엘과 클렘. 서로가 저질렀던 잘못과 실수를 잊고 두 사람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망각은 좋은 것인가? 우리의 잘못들이나 후회되는 모든 순간들을 잊는 것 말이다. 많은 조언들, 좋은 영상에서 후회는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이다라고 얘기하지만 후회는 우리 삶에서 적절하게 필요한 감정이라 생각한다. 후회와 실패 속에서 성장한다는 말도 있고, 후회를 통해 그러한 좌절과 상실을 바라보게 되고, 그 속에서 소중했던 것이 뭐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처럼 우리 현실에는 라쿠나라는 회사도 없고,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뿐, 시간 앞에서 덧없는 존재인 우리는 언젠가 자연스레 망각을 겪게 될 테이니 매 순간을 음미하고 현재를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이터널 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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