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이 스토리3’ 중 'So Long'을 들으며
‘본문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앤디는 들고 온 상자를 내려놓고서 잔디 위에 아무렇게 앉았다. 그리고는 기대에 찬 미소로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서부 제일의 카우걸 ‘제시’였다. 곧이어 제시를 영원한 파트너, 명마 ‘불스 아이’에 태운 뒤 내밀었다. 낯선 앤디에게 겁을 먹고 엄마 뒤에 숨었던 보니는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제야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제시와 불스 아이를 조심스레 건네받았다. 보니는 제시의 삐뚤어진 모자를 고쳐주고, 윤기 나는 볼을 한 번 쓰다듬었다.
이후로 앤디는 차례차례 자신의 장난감들을 보니에게 소개했다. 사나운 공룡 ‘렉스’, 사이좋은 ‘감자 부부’, 충직한 강아지 ‘슬링키’와 저금통 돼지 ‘햄’, 피자 혹성 외계인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용감한 우주 영웅 ‘버즈 라이트’까지. 보니 앞에 놓인 장난감들을 보며 앤디는 물었다.
“이 녀석들 모두 잘 돌봐 줄래? 나에겐 정말 소중한 친구들이거든”
보니는 대답 대신 상자 안을 살폈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 내 카우보이야!”
놀란 앤디가 상자 속을 들여다보자 정말 카우보이 인형 ‘우디’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앤디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앤디는 우디만큼은 새로 진학하는 대학교에 데려가려했다. 그래서 따로 빼두었는데 어느새 박스 안에 다른 장난감들과 섞여 있었던 것이다. 앤디는 우디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우디는 내게 둘도 없는 친구야. 내가 아기 때부터 우린 늘 함께 했었지. 그는 용감하고 지혜로우면서 무엇보다 친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 절대로. 언제나 곁에 있어 주지.” 그리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결심한 듯 물었다.
“... 날 대신해서 우디를 잘 보살펴 줄 수 있겠니?”
보니는 고개를 끄덕였고, 앤디는 결국 우디마저 내밀었다. 보니는 우디를 꼭 껴안고서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앤디가 ‘햄’을 들고서 외쳤다.
“꿀꿀이 박사가 쳐들어왔다!” 그러자 보니도 따라 외쳤다. “우디야! 유령을 잡아”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장난감들과 어우러져 햇살 가득한 잔디 위에서 즐겁게 뛰어 놀았다. 모두가 행복하고 따뜻한 봄날의 아침이었다.
시간이 흘러 앤디가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를 때 보니는 품에 있던 우디의 팔을 잡고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앤디는 괜스레 울컥하고 말았다. 이내 차에 올라 자신의 유년시절을 함께 해준 오랜 친구들에게 말했다.
“고마웠어. 얘들아”
보니가 점심을 먹으러 엄마와 집 안으로 들어간 뒤, 현관에 남아있던 장난감들은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들의 오랜 친구 앤디가 멀리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우디가 말했다.
So long. Partner (잘 가. 파트너)
‘토이 스토리’는 영화사(史)에 길이 남을 작품이다. 영화 역사상 최초로 모든 장면을 3D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쥬라기 공원>과 함께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을 앞당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치를 기술의 관점에서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토이 스토리’는 시리즈 전체(총 4편)가 빼어난 스토리텔링과 훌륭한 연출 및 연기를 갖춘 최고의 명작 애니메이션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토이스토리 3’은 (4편이 나오기 전까지) 15년간 이어온 시리즈를 아름답게 마무리한 희대의 걸작으로 꼽힌다.
1995년 ‘토이스토리 1’이 처음 개봉하고서 4년이 지난 뒤에 2편이,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0년에 3편이 개봉했다. 1편에서 장난감들을 지극히 사랑하던 5살 꼬마 ‘앤디’는 9살을 거쳐, 3편에서는 스무살 청년으로 등장한다. 관객과 함께 나이를 먹은 것이다. 우리가 그러했듯 청년 앤디 역시 더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는다. 그러다 대학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장난감들을 착한 꼬마 ‘보니’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앞서 언급한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So long'은 그 때 흘러나오는 곡이다. 이 아름다운 음악과 뭉클한 이야기가 만나 탄생한 토이스토리 엔딩 시퀀스는 시리즈를 사랑했던 수많은 관객들이 탄성과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유년시절 장난감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것은 기억이 지워져서가 아니라 장난감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내내 가난했고 두 살 터울에 남자아이만 셋이었다. 장난감 사줄 돈으로 밥상 위에 반찬 하나 더 올리는 것이 울 엄마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런 집에 막내였던 나는 장난감은커녕 ‘내 꺼’라 부를만한 것도 드물었다. 독립하기 전까지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옷은 대부분 형들 것을 물려 입었다. 빵이나 바나나 같은 귀한 간식을 혼자서 다 먹는 것이 가장 혼이 날 행동이었고, 아코디언이나 벼루 같은 준비물들이 형제들과 겹치는 날이면 누군가는 맞을 각오로 등교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 꺼’라 부를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붙이고 이야기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 오직 내 가방, 내 신발, 내 책, 내 연필… 그래서 나는 수십 년이 흘러도 엄마가 사준 첫 책가방을 또렷이 기억하고, 윗집 친구에게 묶는 법을 배웠던 내 첫 끈 운동화와 삼촌께서 처음으로 백화점에 데려가 사주신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책들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 버릇은 세월이 흐르며 이상하게 변해, 언제부턴가 무가치한 것들을 ‘추억’이란 이유만으로 곁에 두곤 했다. 목 부분이 누렇게 변색된 셔츠는 큰 형 결혼식 기념 선물이라서, 밑창이 찢어진 구두는 첫 취직 후에 샀던 거라서, 책장 가득 쌓인 공책과 이면지들은 당시에 내 낙서와 고민들이 적혀 있어서. 그런 식으로 보관하던 것들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것들까지 더해져 내 방 곳곳을 가득 채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타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동생이 걱정돼 찾아온 큰 형은 내 지저분한 방을 쓰윽 둘러보며 말했다.
니가 버리질 못하는 구나
사려 깊은 형은 별 다른 잔소리 없이 오직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갔지만, 그 말에 마음이 동한 나는 그가 떠난 직후 100ℓ 쓰레기봉투를 사서 물건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더는 ‘추억’이 아니라 ‘미련’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버리고나니 이른바 ‘후련함’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버려야 채워진다’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도 생각났다. 그 이후로도 물건의 효용가치가 없다 싶으면 가차 없이 버렸다.
그러다 가을이 왔을 때였다. 옷장을 열어 아버지가 주셨던 ‘봄잠바’를 찾았는데 … 아뿔싸. 그 때 고민 없이 쓰레기봉투에 넣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얇아서 쌀쌀한 봄가을 한철 밖에 입을 수 없는 옷. 메이커 바람막이도 아니고 하얀색 바탕에 줄무늬가 그려진 촌스러운 점퍼. 그런데 그게 딱 필요했다. 그거 하나쯤은 아버지가 남겨주신 물건으로, 슈퍼에 갈 때 입을 만한 옷으로 둬도 좋았을 텐데. 결국 나는 ‘버리는 법’은 배웠으나 ‘이별하는 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봄잠바 사건 이후, 나는 의미나 추억이 충분한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버리기 전 사진을 찍어두기 시작했다.
왼쪽에 색연필은 내가 이런저런 시험들에 몰두했을 때 요점들을 체크하며 썼던 것이다. 나는 녀석의 또렷한 형광색과 쉽게 부러지지 않는 단단함이 마음에 들었다. 함께 사는 고양이가 나 몰래 굴려서 책상 아래에서 찾았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결국 길이가 다할 때까지 나와 인고의 시간을 함께 보낸 전우 같은 녀석이었다.
립밤은 내게 겨울철 필수품이다. 입술이 쉽게 건조해지고 찢어지는 탓에 찬바람이 불 때부터 늘 지니고 다닌다. 그러나 덜렁대는 성격 탓에 잃어버리거나, 세탁할 때 깜빡하고 빼두지 못해 끝까지 사용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하나를 끝까지 사용했을 때, 나는 그 때까지 내 곁에 무사히 남아준 녀석을 보며 뭉클함을 느꼈다.
낡은 냄비들을 새것으로 교체할 때,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산 청바지가 찢어졌을 때, 오랜 자취생활을 함께 해준 이불과 수건들을 유기견 센터에 기증할 때 등등 나는 그것들을 떠나보내기 전 다시 한 번 냄새를 맡아보고, 잠시나마 어루만져 주었다. 그것은 나만의 ‘환송회’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이 음악 ‘So long’을 들었다. 영화 속 ‘앤디’처럼 나도 ‘버리기’보다 ‘이별하고’싶었다.
요즘은 아무렇게 노래를 틀다가 ‘So long'이 흘러나올 때면, 잠시 내 방에 놓인 물건들을 천천히 살펴본다. 그러면 내 남루한 삶을 함께 해주는 것들에게 왠지 모를 동지애와 끈끈한 우정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나는 이제 물건을 갖는 것이 보다 조심스럽다. 사는 것뿐만 아니라 얻는 것도 그러하다.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던 예전과 달리 그것을 둬야 하는 자리를 떠올리고,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없는지를 생각한다. 고쳐 쓸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애써보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마지막으로 겉을 한 번 닦아준다. 그것이 내 곁에 머물던 사소한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많이 가진 사람보다 가진 것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문보영 시인도 물건을 버리기 전 사진을 촬영하고 일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을 '애도'이자 '두 번째 헤어짐' 혹은 '제대로 헤어지기'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어쩌면 무언가와 두 번째로 헤어질 때야말로 제대로 만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이 음악을 작곡한 ‘랜디 뉴먼’(본명 ‘랜달 스튜어트 뉴먼 Randall Stuart Newman’)은 1943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1968년에 데뷔한 미국의 명작곡자이다. 그는 1990년대부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픽사에서 제작하는 애니메이션 음악 작곡에 참여해왔다. 그리고 2002년 픽사의 또 다른 명작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의 주제가 ‘If I Didn't Have You’를 통해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토이스토리 모든 시리즈의 음악에 참여했으며, ‘You've Got a Friend in Me'라는 토이스토리 주제가도 그의 작품이다. 꼭 한 번 들어보시기를 권한다. 당신의 소중한 무언가가 불러준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