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책 편식

다람쥐의 짐 정리

by 철샌달

해가 지나갈수록 알게 모르게 쌓인 짐들을 한번 날을 잡고 정리하고 싶었다.

긴 명절 연휴에 집을 확 뒤집기로 했다.


즉흥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아주 간단한 것도 생각이 필요한 나이기에 생필품은 늘 갖춰 놓고 산다.

가을 다람쥐처럼.

혹시 모르는 갑작스러운 상황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약간의 대비는 내 마음에 안정을 준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쌓아놓는 것은 아니다.

작은 공간에 차곡차곡 물건들을 정리하고, 용도에 맞춰 모두 사용하려 한다.

내가 자주 쓸 물건인지, 자주 안 쓰면 내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인지 따져본다.

(물론 '없다고 해서 내 생활에 지장을 줄까?'하는 물건도 당연히 가지고 있다.)


매일 집안을 둘러보며 좀 더 효율적인 공간을 구상한다.

더 효율적이고 깔끔한 방법이 없을까 하고.


오랜 고민 끝에 큰 틀을 잡아 내 나름의 공간 분리와 물건들의 배치를 적은 다음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하루에 한두 곳만 정해서 정리를 시작했다.

오늘은 책상, 다음날은 주방, 다른 날은 책장과 침대. 이런 식으로.


모든 물건을 다 꺼내서 분류하고 잔뜩 버린 후, 여유가 생긴 공간을 바라보면

화장실과 주방 싱크대 수전이 반짝반짝 빛날 때처럼 기분이 좋다!


내 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건 역시 책과 문서들이다.

석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며 모았던 자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겨놨었는데, 이번에 모두 버렸다.

중요한 자료는 노트북과 USB에 저장해두었다.

노트북 화면으로 읽는 것보다는 종이로 보는 것이 훨씬 집중이 잘 되긴 하지만, 읽어야 하는 수많은 논문과 자료를 다 출력해서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적응해야지.


논문을 위해 이론서만 봐야 하는 것에 대한 보상 심리로 한 권씩 알음알음 사둔 다른 책들도 이제 꽤 많아졌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거나 복잡해질 때

맘에 드는 책 한 권을 꺼내 손에 들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머릿속을 시끄럽게 했던 수많은 생각들이 잠잠해진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책 속의 이야기가 채운다.


내 머릿속 끊임없는 생각들은 늘 생산적인 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꺼내어 보고 싶은 생각들은 일기장에 적어내고,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생각은 하늘을 바라보며, 꽃과 나무 곁에 서서 털어놓는다.


책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언제나 내게 소소한 행복감을 준다.

나는 책 편식을 한다.

세계 고전문학 소설을 특히 좋아한다.

작가가 창작한 인물과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상상하면서 같이 흐름 타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지경사에서 나온 어린이를 위한 세계 명작소설 시리즈를 좋아했다.

어느 날, 영화 <마틸다>(1996)에서 마틸다가 『모비딕』이라는 소설을 읽는 걸 보고 읽고 싶어졌다.

영화에서 마틸다가 모비딕을 읽는 장면

용돈을 한참 모아 동네 서점으로 가서 아주머니에게 '모비딕'을 사고 싶다고 했다.

나와 동갑인 딸이 있던 서점 주인은 초등학생이 읽기엔 너무 어렵다며 안 된다고 하셨다.

꼭 사고 싶다고 하니까 책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아주 두껍고 글씨가 빽빽한 하서출판사의 『백경』을 꺼내주셨다.

'백경? 모비딕이 아니라?'

그대로 드러나는 내 표정에 백경이 모비딕이라고 알려주시며 정말 읽을 수 있겠냐고 재차 확인하셨다.


책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며칠 동안 열심히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 나도 함께 그 흰 고래를 잡으러 모험을 떠난 것 같이 몰입해서 재밌게 읽었다.


그날 이후로 용돈을 열심히 모아 세계 고전문학 소설을 사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다.

자주 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매우 신중하게.

너무 심오하거나 이상한 내용인 소설도 있을 수 있으니까 서점에 가기 전에 엄마 찬스! (내가 읽어도 괜찮은 책인지 먼저 확인받기)


작가들이 써 내려간 이야기를 읽고 상상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나도 크면 언젠가 이렇게 다채로운 상상이 가능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

다른 장르의 책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의 책 편식이 의도치 않게 날 힘들게 만들었다.

묘사와 비유가 가득한, 감성과 감정으로 가득 찬 문학 소설만 편식하던 나.

가장 딱딱한 글을 읽고 써야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초반에는 내 글이 논문 같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감정과 생각은 전혀 쓰지 않고, 딱딱하게 이론과 사실을 기반으로 썼는데도 내 논문은 '너무 감성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너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데? 도대체 왜?

이론서와 관련 논문들을 계속 읽고 또 읽었다.

결과적으로는 나만의 논문을 써냈고, 칭찬에 매우 인색한 지도교수님의 칭찬도 받았다.


박사학위논문을 써야 한다고 하니 모든 게 다 재미있어 보이는 지금.

평소 같으면 눈길을 전혀 주지 않았을 것들에 관심이 생겼다.


당장 해보기는 어려우니까 관련 도서를 찾아 읽어보며 나만의 일탈을 즐기는 중이다.

내가 연구해야 하는 분야와 다른 것을 보는 재미,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분야를 내가 좋아하는 독서로 접해보려는 시도,

대체 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까 하는 궁금증으로 시작했다가 쿨하게 금방 덮어버리게 되는 경험...

모두 책이 주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전히 내게는 세계 고전문학 소설 최고.


예전보다 동네 서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동네 서점만의 느낌도 그리워지네.



(*표지이미지: AI 생성이미지)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