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카메라를 샀다.

by 철샌달

당장 눈앞에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뺀 모든 게 다 재미있고 흥미가 생기는 건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할 것이다.

단지 현실을 직시하고, 할 일을 미루고자 하는 자신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거지.


한참 해리포터 책이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 우리 학교 시험기간에는

평소에 아끼느라 빌려주지 않던 해리포터 책을 서로 적극적으로 빌려주기에 바빴다.

("너 OO권 없지? 아직 못 봤지? 빌려줄까?")

자신이 더 공부해서 시험 잘 보려는 속셈을 알면서도 해리포터의 다음 내용이 뭘까 궁금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교과서 대신 해리포터 책을 읽곤 했다.


논문이라는 커다란 산이 내 눈앞에 있다.

하지만, 내 어깨엔 또 다른 할 일들이 가득.

그것들을 짊어진 채 한 걸음도 못 떼고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답답함이 극에 달하는 어느 날,

한동안 당근마켓 관심 목록에 담아놨던 필름 카메라를 구매하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나 자신과 싸우며 꾸역꾸역 할 일을 했겠지만,

이번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맘대로 하기로!

오늘만큼은 해리포터를 거부하지 않고 책을 펴서 스토리에 빠져드는 어린애가 되어보기로 했다.

현실을 잠시 외면하면서 어깨에 놓인 짐을 내려놓고 내 기분을 환기한다는 명분으로.


어릴 때 말고는 필름 카메라를 써본 적은 없다.

그것도 자동 필름 카메라나 토이 카메라를 사용해 본 게 전부다.

지금 스마트폰으로 충분히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그것도 수동 필름 카메라를 '굳이 왜 사려고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수백 번 질문하며 담아두기만 했었는데...


[당근마켓 판매글]
야시카 일렉트로 35 레트로 필름 카메라
"장롱에 고이 모셔두기만 하다가 엄마 부탁으로 올립니다. 어릴 적 추억을 담아줬던 아이예요."


인스타를 사진 계정으로 바꾸고, (물론 스트레스 해소가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맞팔하는 다른 사람들의 사진들을 보다 보니 더 관심이 생겼다.

당장 사진의 기초를 공부해 보고 싶지만, 괜히 논문 눈치가 보여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리만족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야시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물건을 구매할 때마다 긴 시간을 고민하고 따져본다.

정말 내게 필요한 건지, 그 값어치를 뛰어넘게 활용(사용)이 가능한지, 장단점은 뭔지 등등...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구매하기로 했다.

(이미 고민을 오래 했었던 물건이라 충동구매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 나름의 충동구매!


정겨워 보이는 작은 아파트 앞으로 할머니 한 분이 카메라를 들고나오셨다.

꽤 오래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구매자가 당연히 남자일 거로 생각하셔서 창밖으로 남자가 오나 보다가 나오셨다고 했다.

젊은 여자가 살 거라고 생각 못 했다며 야시카는 그쪽(=나)태어나기도 전에 없어졌을 텐데 어떻게 쓰는지나 아냐는 걱정과 함께 카메라를 건네주셨다.


단종된 지 오래 지났음에도 관리가 매우 잘 되어 있는 (+케이스. 플래시, 렌즈 필터) 카메라.

가격도 저렴하게 올라와 있었고(5만원), 무게는 750g이라고 하더니 정말 무거웠다.

에코백에 넣어 소중히 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테무에서 필름을 주문한 후, 카메라를 구경했다.


'얼른 사진 찍어보고 싶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났다.

직장과 학교, 학회에서 쏟아지는 일들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정작 내 할 일은 손도 못 대고 있는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러 나갈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직장에서 워크숍으로 화담숲에 간다고 했다.

가을에 예쁘다고 유명한 화담숲을 한여름에 가보네?

그래도 좋아.

나 혼자 조용히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봐야겠다.


호기롭게 야시카 수동 필름 카메라와 옛날 디카를 챙겼다.

비록 더위를 많이 타지만, 가방이 매우 무겁지만, 그래도 괜찮아.

사진을 찍어볼 생각에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혼자 조용히'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36방 필름 한 통을 다 쓰고 왔다.

테무에서 최저가일 때 산 필름이라 결과물이 어떨지 약간은 불안했지만,

너무 덥고 무거운 데다가, 굳이 계속 나랑 같이 화담숲을 돌아보는 분으로 인해 급하게 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아쉽지만,

드디어 카메라를 개시했다는 것과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작은 뷰파인더에 눈을 댄 채 초점을 맞추고,

딸깍! 필름을 감은 후,

찰칵! 셔터를 누르는 느낌과 소리.

사진을 찍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좋았다.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내 눈에 예쁘고 좋아 보이면 되는 거니까.

필름만 가지고 있는 자글자글함.

수동으로 맞춘 초점이, 조리개가 빛의 양과 살짝 어긋나서 흔들린 사진조차도 감성으로 느껴졌다.


필름 가격이 비싸서 '부자 취미'라고 불리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찍기.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 또 혼자 조용히.

내겐 취미가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 방법의 하나.

잊을만할 때 한두 장 찍는 걸로 죽어가는 감성 살리기 용도.


글 쓴 김에 카메라 한번 꺼내봐야겠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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