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 문화와 취향의 차이
어느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 영상은 채널 주인장이 자신이 살면서 보아왔던 애니메이션 등급을 자신의 취향대로 티어를 순위를 정하는 영상이었다. 당연히 영상을 만든 자신의 취향이 반영되므로, 철저히 주관적인 영상이었는데, 재밌는 점은 영상 내용보다 사람들의 댓글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이 높게 평가한 작품을 낮게 평가할 수 있냐면서 화를 내는 모습이 보였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슬램덩크가 어떻게 C랭크일 수 있지? 구독취소합니다"와 같은 댓글이 그것이다. 나는 해당 영상의 댓글들을 보면서 그들이 화가 난 이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처음 든 생각은 그들은 작품을 자신의 자아 정체성과 동일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슬램덩크를 예로 들면 어떤 사람들에게 슬램덩크는 단순히 만화가 아니다. 슬램덩크는 학창시절의 추억이며, 자기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한 만화이거나 농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 혹은 인생의 힘든 시기를 버티게 도와준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C랭크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감정을 C랭크라고 평가 받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에게는 주관적인 작품 평가 등급이 자신을 평가한 등급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또한가지 가설은 취향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그렇다. 덕질을 오래한 사람들이 이런 경우가 있는데, 작품내 설정을 파고들면서 시작한 덕질이 감독, 작가, 제작사까지 파고 들게 되면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지식이 깊고 넓어지게 되는데, 이러다보면 자신은 많이 알기 때문에 자신의 평가는 객관적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정보량이 많다고해서 객관적인 것은 아니며, 취향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다.
혹은 자존감이 외부 취향에 묶여 있거나, 자신의 정체성이 삶의 성취 대신 덕질일수도 있다. 이런 경우 서로 다른 취향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느낄 수도 있다. 자아가 약할수록 취향이 자아를 대신하기 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순수하게 내부에서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등이 모두 자신의 정체성의 기반이 되 재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슬램덩크를 통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면 그에게 슬램덩크는 그저 단순한 컨텐츠가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세계관의 일부가 된다.
자아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은 자신의 취향과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다. 본인은 어떤 작품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은 별로라고 느낄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설령 C랭크로 평가하더라도 자신의 느낀 감동은 변하지 않으니 정신적으로도 타격이 없다. 하지만 자아가 외부 평가에 의존적이면 취향이 일종의 방어기제가 될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 공격당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공격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할 때는 취향이 이분법적이다. 어떤 작품을 대할때 명작 아니면 쓰레기, 이 작품 모르면 애니메이션 알못과 같이 극단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반면 자아가 안정적이면 취향도 더 선명해진다. 단순히 명작/망작과 같이 한 단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좋았던 부분과 아쉬웠던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작품을 깊게 파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깊게 파는 방법이 자아 정체성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깊게 파는건 꽤 힘들다. 그러려면 자신의 결핍이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에서 성취도 만들어야하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면, 작품을 깊게 파는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덕질에 실패해도 타격이 없고, 분석을 많이 할수록 스마트해보이고 커뮤니티에서 인정받기도 쉽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아성찰은 고통을 동반하고 덕질은 보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작품 자체를 좋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원래 어떤 스토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문제는 단순히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반대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 취향을 설명할 수 있으며 타인의 취향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의 취향이 바뀌어도 정체성이 붕괴되지 않는다.
결국 타인의 취향이 나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작품은 작품으로, 나는 나로 분리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취향을 밝히는 것이 전쟁터를 만드는 것이 아닌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