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차, 수비리 - 빰플로나 20.4km
8월 4일
새벽 네시에 눈을 떴다. 여기는 수비리의 알베르게. 가슴이 답답했다. 많은 사람이 자는 도미토리의 특성상 공기가 좋지 않다. 호주로 처음 워킹 홀리데이를 갔을 때 닭장같이 생활하던 생각이 났다. 얼른 밖으로 나가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물도 한잔 마셨다. 하늘을 보니 출발할 때쯤 또 비가 올듯싶었다.
6:30에 우산을 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수비리 안녕, 레이레도 안녕.
오전 내내 비가 내렸다. 형광색 우의를 뒤집어쓴 순례자들이 조심스레 길을 따라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 속에 비가 슬며시 젖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불편함이었다. 도시에서는 이렇게 비를 맞으며 오래 걸을 일이 없다. 실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거나 바깥에 나갈 때도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화살표가 희미해진 곳이 있었다. 화살표가 희미한 곳에선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다. 선답자 누군가가 뒤따르는 이를 위해 돌로 표시를 해두었다.
작은 마을들을 거쳐 도시의 번듯한 도로로 들어섰다. 이제 빰쁠로나가 멀지 않았다. 길가 상점에선 놀랄만치 저렴하게 과일들을 팔고 있었다. 한 봉지 사서 입에 연신 넣으며 걸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도시 초입에서 다비드를 만났다. 사진을 몇 장 부탁했는데 역시나 영혼 없는 사진이 나왔다. (물론 모델이 변변치 않은 건 사실이다.) 사진을 부탁할 땐 한국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게 국룰이다. 한국인만큼 정성스레 사진을 찍어주는 분들이 드물다. 가뜩이나 안 좋은 모델을 두 번 죽이는 다비드이다.
11시 15분쯤 알베르게 Jesus Y Maria 앞에 도착했다. 12시에 문을 연다고 하여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옆에 앉은 이태리 아저씨가 자기는 열 번째 까미노라며 젠체를 한다. 한번 올 때마다 색깔별로 가리비 문신을 하나씩 새겼다며 웃장을 까고 문신을 보여준다. 간달프처럼 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아저씨였다.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워대니 공짜 흡연에 코가 아팠다. 눈치를 주니 1.5m 옆으로 가서 계속 꿋꿋하게 피워댄다.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던 파리 출신의 파스칼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알베르게의 커다란 문은 정시에 열렸다. 체크인하고 들어가니 간달프 아저씨가 직원인양 여기저기서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안내를 했다. 세탁기는 어떻고 건조기는 어쩌고 저쩌고. 자기는 전에 와봐서 다 안다 이거지. 참 고마운 일을 하는데 고맙지 않은 사람이랄까. 까미노 여러 번 오는 게 겸손한 사람을 만드는 건 아니다 싶었다.
빰쁠로나의 성벽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 성벽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별 모양의 시타델이 인상적이다.
시타델은 아성이라고도 하는데, 요즘에는 중심이 되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저 가운데에 지휘관이 위치하며 최후의 방어 거점으로 삼는 것이다. 실제로 보면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웅장하며 다른 도시의 성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매력이 있다. 다른 도시의 성들은 이젠 문화재처럼 보인다면, 팜플로나의 것은 실전용으로 보인다는 것. 저기에서 포를 막 쏴댄다고 생각하면 공성 측 입장에선 악몽이 아닐 수가 없겠다.
지금은 커다란 규모 덕에 아성 안이 통째로 공원이 되어있다. 가족, 연인, 혹은 애완동물과 함께 오시는 분이 많다.
산 페르민 축제로도 유명한 빰쁠로나는 프리메라리가 오사수나 FC의 연고지이며 옛 나바라 왕국(빰쁠로나 왕국)의 수도답게 고풍스러움이 넘쳐난다. 성당이라든지 시청이라든지 옛 건물이 남아 있고, 올드 타운 골목골목마다 위치한 카페와 바엔 관광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헤밍웨이가 글을 썼었다는 카페 이루냐는 까스띠요 광장에 있는데 맛은 글쎄요. 비 온 후 쌀쌀해서 인지 맥주보다 커피가 좋은 날이었다.
Jesus y Maria는 교회 건물을 개조한 공립 알베르게다. 백 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하며 가격은 현재 11유로.
교회건물답게 천장이 높고 층이 다 트여 있어 누군가 기침을 하면 전 층에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철제 침대가 삐그덕 대는 소리와 기침 소리의 끝없는 에코가 웅장하다.
순례의 필수품인 귀마개를 끼면 자는데 별 지장이 없다. 아마도 길을 걷느라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다. 체크인할 때 순서대로 침대가 배정되므로 코 골게 생긴 사람과 최대한 거리를 두라 하고 싶지만 겉모습으로는 누가 코를 고는지 알 길이 없다.
세탁기 사용이 무료라 좋은데 작동되는 게 한 대뿐이라 좀 복잡하다. 건조기는 1유로를 넣으면 40분 정도 돌아간다. 다음에는 그냥 손빨래를 해야겠다.
여기는 화장실, 샤워실이 남녀 공용이다. 문화충격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변기 커버가 없어서 다들 당황스러워했다. 그 외 시설관리는 잘 되는 편이다. 통금은 11시이니 야경과 바 크롤링을 살짝 즐겨보자.
6:30 ~ 11:15
주비리 ~ 팜플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