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 빰쁠로나 - 뿌엔떼 라 레이나 23.9km
8월 5일
빰쁠로나에 하루 더 머물까 하다가 바로 떠나기로 했다. 조금 아쉬울 때 떠나야 다음에 또 오게 되는 법이다.
누군가 부르는 듯하여 뒤를 돌아보니, 거리의 끝에서 대성당 종탑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많은 이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아왔지, 넌 여기 다시 오게 될 거야.” 언덕 위 성당은 수백 년간이나 이 자리에서 이름만 남은 옛 왕국의 영화를 증언하며 순례자들에게 속삭여 왔다. 빰쁠로나를 굳건히 지켜온 건 성벽뿐 아니라 대성당의 종탑이기도 하였다.
대서양 바다 같이 검푸른 새벽 아래 빰쁠로나는 아직 깊게 잠들어 가라앉아 있었다. 인적 없는 아틀란티스의 거리를 숨죽여 걸어 벗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시타델 위로 여명이 밝아왔다.
시타델을 막 지나치고 나니 다비드가 골목 모퉁이에 서있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시스터가 베를린에서 오기로 했다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나타나는 그녀, 역시 독일인인가? 프랑스 같았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후렌치 타임 30분은 기다려야 했지 않을까. 다비드의 누나(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짐작건대)는 주말 동안만 함께 걷는다 했다. 유럽에 사니까 며칠만 걸으러 이렇게 오는 게 가능하다.
이렇게 새로 합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빰쁠로나부터는 안 보이는 사람도 꽤 있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첫 대도시이며 꽤 볼거리가 있다 보니, 아니면 탈이 나서 하루 더 묵어가는 사람도 있고, 원래 여기까지만 오기로 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교통수단을 이용해 다른 도시로 점프하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찍 포기하고 집에 가는 이들도 있었다.
추수가 끝난 밀밭과, 해바라기 밭이 멋지게 펼쳐졌다. 절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풍경이었다. 언덕 위에 늘어선 풍력 발전기들이 어서 올라오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 안드레아를 만났다. 로시난떼로 명명한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까지 간다고 했다. 뭔가 어설퍼 보이긴 하는데, 하긴 다른 분들이 봤을 땐 초보 순례자인 나도 그러하리라. 1회 차에서 그 누가 능숙할 수 있으랴.
플라스틱 상자를 자전거 뒤에 케이블 타이로 매달고 백팩을 거기 그대로 담아 이동 중이다. 짐 싼 모습 보니 고생 많이 할듯하다. 양쪽에 나눠서 달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커브를 돌 때마다 뭔가를 자꾸 흘려서 뒤에서 주워주었다. 안드레아는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도로로 가는 게 아니라 정상까지 자전거를 끌고 갔다.
안드레아도 사진 찍어 달라 하면 참 영혼 없이 찍어주었다. 사진이 취미고 사진 인스타그램 한다면서 역광을 왜 자꾸 찍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그의 작품을 살펴보자. 물론 인스타에 올려진 그의 사진들은 기가 막히게 좋다.
인스타그램 @andrea_grill0_ph
https://www.instagram.com/andrea_grill0_ph?igsh=MTBpNDhwZjJoYWVxdg==
안드레아의 솜씨. 굳이 나를 여기 앉히더니 포즈+구도+역광까지 완벽한 저세상 작품이 나왔다.
https://www.instagram.com/reel/C4gdsOHBC7z/?igsh=b211eDBlaWNsajVz
저 순례자 조형물에는 “바람의 길이 별의 길을 가로지르는 곳”이라 적혀 있다.
꼼포스텔라가 별의 들판이라는 뜻이니 별의 길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을 뜻할 것이다. 하지만 순례자들에겐 면죄를 받고 구원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거니와, 별은 본시 저 하늘에 속한 존재이니 별이 일주운동하는 길은 천상의 길이라고도 하겠다. 어쩌면 서시와 이렇게 딱 들어맞는지 생각이 들어 한 줄 적어보았다.
바람의 길이 별의 길을 가로지르는 곳, 용서의 언덕.
산티아고 순례자길 4일 차에는 용서의 언덕 Alto de perdon에 오르게 됩니다. 정상에 서있는 순례자 상엔 바람의 길이 별의 길을 가로지르는 곳이라 쓰여 있습니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천상의 별들과 지상 세계의 바람은 마침내 여기에서 만났습니다. 자유로이 다니는 듯한 별과 바람에게도 사실은 정해진 길이 있었고 여기에서 마주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고 노래한 윤동주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고 내가 바람이고 당신은 별입니다.
You will climb the Hill of Forgiveness on the fourth day of the pilgrimage. The statue of pilgrims at the top says that this is where the path of the wind crosses the path of the stars. The stars of heaven and the winds of the earthly world finally met here. Even the stars and winds that seemed to move freely actually had a set path and were supposed to meet here. Poet Yun Dong-ju, who sang, “Tonight, too, the stars are brushing in the wind,” seems to have already known this. We were supposed to meet here, I am the wind and you are the stars.
충분히 쉬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 공포의 돌밭 다운힐을 내려올 때마다 무릎 수명이 자꾸 줄어드는 중이었다.
스페인 집을 왜 돌로 짓느냐면, 그건 돌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길도 전부 돌밭이고, 흡사 성황당 같은 커다란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있다. 순례자들을 이용해서 돌을 한쪽으로 치우려는 술책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산을 내려와 도로에 합류하였다. 큰 사이클 경주가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선수들 한 무리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그 뒤로 팀 서포트 차량이 따라갔다. 차량 위엔 교체용 자전거, 휠, 타이어 등이 실려있었다. 서포트 차량이 따라붙는 것은 처음 알았다.
여러 마을을 지나 12시 조금 넘기고 뿌엔떼 라 레이나에 도착하였다.
Padres Reparadores 알베르게에 들어왔다. 숙박 9유로이며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큰 뒷마당이 있어 나무 그늘에 앉아 노닥거리기 좋은 곳이다. 화장실 및 샤워실이 남녀공용이니 빰쁠로나 공립 알베르게에 이어 2차 문화충격 준비하셔야 한다. 남녀칠세부동석이 기본인 동방예의지국에선 감히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다.
밤에는 관리 인원이 없어서 늦게까지 식당에서 파티가 벌어진다. 약간 시끄러움을 감안하고 투숙할 것을 당부드린다.
발을 확인해 보니 물집이 커지고 있었다. 오스카와 뛰다가 생긴 작은 물집인데 이렇게 커져버렸다. 검은색인 것을 보니 안에는 피가 차 있을 것이다. 내일 좀 천천히 걸어야 할 듯하다.
수영장이 있다는 다른 알베르게는 어떨지 궁금했었는데 거기에 대해선 아멜리아도 좀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기 뒷마당도 괜찮다며 내내 수다를 떤다. 아멜리아는 네바다에서 왔고 어제 팜플로나 알베르게에서 같은 벙크 베드를 썼다.
그녀는 저녁으로 통조림을 잔뜩 사 왔다. 정어리에 아티초크와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나에게도 한 조각 나누어 줬는데 센세이셔널한 맛이 난다고 주장했다. ”이건 뉴 콤보야!“라며 완전 신나 했다. 내일 에스떼야 까지 갈 거라던데 물집도 생겼고 무릎이 슬슬 아프다고 걱정을 했다. 내 발을 보여주니 기겁을 했다.
여기에선 발에 잡힌 물집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세상 밖 수많은 고민거리는 이미 다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러니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오길 잘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무더위가 다가오고 있었다. 순례길은 점점 서쪽 내륙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빰쁠로나 ~ 뿌엔떼 라 레이나
6:30 ~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