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축제

5일 차, 뿌엔떼 라 레이나 - 에스떼야 21.6km

by 한번만 더

8월 6일



아침 일찍 알베르게를 빠져나와 거리의 끝에 다다랐다. 길 끝엔 다리로 이어지는 소박한 문이 도시의 마지막 가로등을 가슴에 달고 수줍게 서 있었다. 이 돌다리를 건너며 어두운 들판으로 나아가 순례자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뒤 돌아보니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아련하게 새벽 거리에 가득 차 있었다.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굳이 나트륨 전구를 쓰는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목적이나 효용과 별개로 포근한 느낌을 주는 이 색이 마음에 들었다. 몇 번이고 뒤돌아 사진을 찍었다.


여왕이 지어줬다는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 뿌엔떼 라 레이나를 총총 떠났다. 오늘은 좀 천천히 걸을 작정이다. 어제 아멜리아와 이야기하던 중 물집이 터져서 발 뒤꿈치가 엉망인 까닭이었다.


모자이크 처리 합니다



며칠새 부쩍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늘이 며칠 째지?’ 같은 일과를 반복하다 보니 날짜 감각이 사라졌다. 심지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아 오늘이 일요일이었지. 이따 어머니께 전화드려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올리브
호두 나무

완만한 언덕배기를 따라 과수원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풋풋한 호두며 올리브와 포도가 8월의 태양아래 묵묵히 익어갔다. 벌써부터 주렁주렁 가지가 휘도록 달려있는 걸 보니 올해도 풍년인 모양이다.


길 가다 굴다리 앞 사과나무에서 약간 덜 익은 사과 두 개를 땄는데 맛이 꽤 괜찮았다. 이맘때 길을 가신 분들은 사과나무가 어딘지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다. 간혹 순례자를 위한 간식이 놓여 있는 곳도 있다. 주민들이 준비해 놓는 것이다.



언덕 위에 자리한 사랑스럽고 작은 마을, Cirauqui를 지나 발길을 재촉했다. 예쁜 마을임에도 사진이 많이 없는 이유는 이제 사진 찍을 여유가 적어진 탓이다. 언덕이 나오면 끙끙대며 지나가기 바쁘다. 이제 피곤이 쌓이고 발에 피로가 누적되어 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첫날 둘째 날보다 길 자체는 쉬우나 더욱 힘들게 걷고 있었다. 근육이 아픈 건 회복이 되겠지만 무릎 관절에 무리가 오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걷기에 너무 좋은 날씨였다는 것이다. 구름이 살짝 해를 가려 땀도 많이 흘리지 않았다. 날씨가 이대로만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로


노크용 문장식



12:15분 에스떼야에 도착했다. 여기는 때마침 축제 기간이다. 바욘과 팜플로나에선 간발의 차이로 축제를 놓쳐 조금 아쉬웠었다. 축제 구경은 좀 있다 하기로 하고 일단 알베르게를 선택할 차례였다. 8유로짜리 공립과 10유로짜리 ANFAS 알베르게를 놓고 저울질하다 ANFAS로 향했다. 공립 알베르게로 가면 친구들이 많아 심심하진 않을 테지만, 오늘은 좀 조용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제이크라는 친구가 현금이 모자라 곤란해하길래 10유로를 빌려주었다. 그는 한 번에 여섯 자리를 예약했는데 뒤로 일행이 따라오고 있다 했다.



여기 안파스의 봉사자들은 약간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다. (지체 장애를 가진 분들). 들어가면 물을 한잔 먼저 따라주고 환하게 반겨준다. 시설은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마룻바닥을 어찌나 뽀득뽀득 닦아놨는지 걸을 때마다 신발에서 삑삑 소리가 났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베개가 두툼하다는 것이다. 여태 다른 숙소의 베개들은 힘이 없어 두 번씩 접어서 베곤 했었다. 침대 이층은 레일이 없어서 구르기라도 하면 좀 위험해 보이는데 이건 어제 푸엔테의 알베르게도 그랬다. 그래서 몇 여성분들은 매트리스를 아예 바닥에 내려서 깔고 자기도 했다. 굳이 불만이 있다면 빨래 널 공간이 좀 적다. 뒷마당으로는 나가지 말라 하기 때문이다.

터진 물집 때문에 신발 안에서 대홍수가 났다. 양말과 신발 뒤꿈치가 다 젖었다. 깔창을 빨아 대강 수습했다.


샤워한 뒤 가게를 찾아 요깃거리를 사 왔다. 리오하 와인도 한 병 사고 간만에 돼지고기를 구웠다. 샐러드를 곁들여 푸짐하게 먹었다. 공립엔 사람이 많아 이렇다 할 요리를 하기가 어려워 주로 파스타와 샌드위치로 때우곤 했었다.




라 바하디까 델 뿌이 La Bajadica del Puy 축제 기간이었다. 곳곳에서 축포가 발사되고, 음악을 연주하는 행렬이 시끌벅적 거리를 지나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드레스 코드는 하양과 빨강이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의 하얗고 빨간 물결이 끝없이 원을 그리며 딜콤하고 뜨겁게 번져 나갔다. 마치 바닐라 쉐이크에 딸기 시럽을 티스푼으로 저어 섞는 듯 보였다.



적당히 구경하다 어느새 시에스타 시간이 찾아왔다. 발이 쑤셔서 일단 알베로 돌아와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하기로 했다. 역시 스트레칭을 하던 소녀와 눈이 마주쳐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위스에서 온 마들렌은 아까 제이크의 일행이고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한다 했다. 원래 사용하는 언어를 물어보니 집에서는 독일어를 쓴다고 한다. 같이 스트레칭을 하다 물집을 보여주니 소독약과 컴피드를 꺼내어 처치해 주었다. 천사는 어디에나 있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난 한국분과 간단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분은 오늘 기부제 숙소인 산 미겔 알베르게에서 머무신다고 했다. 그곳으로 찾아가 마당 벤치에서 빵과 고기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산 미겔 알베르게의 오스피탈레라, 마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친근하며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분이었다. 스페인 여러 지역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 축제를 좀 더 구경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제이크와 그 일행은 펍에 들러 한잔 하는 모양인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글을 쓰다 나도 모르게 곯아떨어져 버렸다.


6:10 ~ 12:15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