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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5. 2024

35. 까미노가 예비하는 대로

29일 차, 멜리데 - 아르수아 14.1km

8월 30일


8시에 출발하면 충분하다 싶어 7시까지 푹 자고 일어났다. 어제 숙소에 들어온 건 9명뿐이고 다들 매너가 좋아 아주 조용한 밤을 보냈다. 짐 싸는 건 5분이면 충분하였다. 시간이 남아돌아 괜스레 샤워를 한번 하고 복숭아를 씻어 아침 삼아 베어 물었다.


출발 전 까예의 발을 살폈다. 뒤꿈치에 꽤 크게 물집이 잡혀 있어 수술을 감행하기로 했다. 소독하고 물집의 물을 빼고 다시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후 컴피드를 붙였다. 갈 길이 그리 멀지 않으니 이 정도면 오늘은 충분하리라.


뿔뻬리아 아 가르나챠 앞을 지나는데 세르히오가 혼자 불을 켜놓고 일하고 있었다. 까예와 난 그를 문어맨이라 부른다. 아디오를 외치니 그가 부엔까미노 인사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14km쯤은 눈 껌벅하면 닿아 있을 거리, 그래도 까예 모녀를 위해 중간에 한 번은 쉬어야 한다. 탈장과 허리 수술을 했었다는 테레사에겐 큰 도전이다.



이제는 정말 가을이 다가오는 듯 밤나무에 밤송이가 제법 굵어져 가지가 처억 휘어졌다.



원래도 푸른 하늘인데 비가 개고 가을이 다가오니 세배로 푸르러진 듯하다. 여기 풍경의 8할은 하늘이 담당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맑은 날에 좋은 길을 걷게 되어 감사하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전 중에 아르수아에 닿았다.



아직 오픈이 30분이나 남은 공립 알베르게 앞에 배낭 줄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맞은편 바르에 앉아 기다렸다. 줄의 거의 맨 앞이었으므로 문을 열자마자 바로 입장하였고, 오스피탈레로가 매우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갈리시아 공립 알베르게의 시설 리뷰는 더 이상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똑같은 조명에 똑같은 침대, 집기 없는 주방.

​​


한 가지 특기 사항이 있다면 1층 남녀 화장실 위쪽이 트여 있다는 것. 옆은 막혀 있으되 위가 뚫려 있어 소리가 아주 잘 들린다. 앉아 있는데 누가 옆에 입장하면 참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옆 칸에 계신 여성분도 곧 나의 인기척을 느끼고 서로 수습을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 애꿎은 세면대 물만 계속 틀게 된다. 어느 한쪽이 결단을 내리고 나가야 해결이 된다. 가급적 지상층 샤워실에 딸린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하자.

창문이 커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오늘 멜리데에서 고작 14km를 걸어 아르수아에 멈추었고 아직 산티아고까지의 남은 거리는 38.6km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마음만 먹었으면 어제 하루 만에도 50km를 달려 골인할 수 있었을 터다. 내일도 마찬가지, 38이라면 반으로 끊어갈 필요 없는 거리지만 오 페드로우소에서 멈출 예정이다.



이미 인스타그램에는 함께 걷던 동료들의 산티아고 도착 소식이 속속 전해져 왔다. 어젠 이탈리안 키즈 알렉산드로, 니꼴로 1, 니꼴로 2, 이레네, 로렌조, 루카 1, 그리고 루카 2, 마시모의 인증샷이 올라왔고, 오늘은 페데리카와 JP의 것이 올라왔다.


함께 달려가던 동료들은 이런 나의 행보를 의아해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제일 먼저 입성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을까 나도 그들도 모두가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여기서 미적대고 있다니.



보다 먼 거리를 가서 빨리 끝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지금은 누군가 내가 함께 걸어주길 바라는 게 행복하다. 페데리카가 걸어달라 하여 멜리데까지 멀리 걸었고, 이번엔 까예따나가 함께 가자고 하여 천천히 걷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아직 골인할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아직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공립 알베 맞은편 식당 Casa Neñe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도 테레사가 계산을 했다. 70유로는 족히 나왔을 텐데 부담스러워 이래도 되는 건가 싶다.


반을 내겠다는데 자기들이 둘이니 더 내야 한다고 테레사가 극구 고집했다. 내가 있어서 괜히 더 좋은 식당을 찾아다니는 게 아닌가 싶다. 난 하몽에 빵만 먹고도 잘 다니는 사람이란 걸 빨리 알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뒤뜰 사과나무에 사과가 어찌나 많이 열렸는지 가지가 휘어졌다.



오레오 속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시에스타 시간이 지나니 성당 광장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또 피에스타가 있는 것이다.




까예는 수줍어 나오질 못한다. 나는 몸치여도 얼굴에 철판 깔고 노는 편.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인데 뭐 어떤가. 그동안 댄스킹인양 부풀려서 글을 썼더니 가책이 생겨 오늘은 몸치 실력을 양심선언한다.


까예는 안 나간다는 걸 잡아서 데리고 나갔더니 이렇게 재밌어하고 신나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가 점점 음악소리를 듣고 모여들었다. 춤추는 사람들이 곧 광장을 가득 메우고 기차놀이에, 단체 댄스에, 춤과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자기들 입으로 피에스타에 미쳤다고 한다.



한데 7시가 되자 거짓말같이 음악이 사라졌다. 알고 보니 미사 시간이라 그런 것이다. 7시 30분이 되어 미사가 끝나면 바로 다시 시작한다고 테레사가 알려주었다. 다시 시작된 피에스타를 즐기다  9시가 넘어 통금이 가까워서야 들어왔다.



순례길을 예약도 없이 계획도 없이 되는 대로 가는 것을 여기서는 “the Camino provides”라고 이야기한다. ”까미노가 예비해 준다“라고 옮길 수 있겠다.

침대가 있으면 침대에서 자고, 처마가 주어지면 처마 밑에서 자는 것이다.


너무 빡빡하게 일정을 짜고 예약을 하다 보면 힘이 들 때도 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으니까.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 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마태오 복음서 6장 26-31


08:10 ~ 11:50

멜리데 ~ 아르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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