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가족력이 뚜렷한 삼십대의 치매에 대한 단상
아빠는 일곱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빠의 엄마인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셨다. 내가 아주 어릴때부터 할머니는 하얗게 세어버렸지만 늘 말간 미소를 띄우고 계셨다. 할머니가 비녀로 머리 쪽지는 모습을 참 좋아했다. 정갈하고, 바른 할머니. 늙으신 모습이었지만 늘 고왔다.
내가 중학생 때부터 할머니는 기억을 서서히 잊어갔다. 가끔은 어릴적으로 돌아가신듯한 얘기도 하시고, 말이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몇년이 지나고 할머니는 나를, 우리를 더이상 알아보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한참 바쁘던 시기라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할머니는 간혹 나를 알아보는 듯 했다. 정확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손을 잡으며 예전의 예쁜 미소를 지어주시곤 했다. 잠시 손잡아 드리고 떠날때는 늘 슬펐다. 혼자 할머니는 돌보느라 늘 바삐 움직이는 큰고모를 보면 죄책감이 들곤했다.
거의 십년쯤 되던 해,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큰아버지의 상실감은 남달랐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어머니를 찾아뵙던 분이셨으니 오죽할까. 시간이 흐르면서, 큰아버지는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셨다. 지금은 아들내외 근처의 요양병원에 입원해 도우미의 돌봄을 받고 계신다는 얘기를, 지난달에 들었다.
외할머니의 마지막 3년도 치매와 함께했다. 처음에는 이상한 소리를 반복하는 틱장애로 시작되었는데, 혼자 사시던 외할머니의 질환 진행은 누구보다도 빨랐다. 처음에는 대화를 원활히 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세달뒤에 보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러고 또 반년뒤에는 가족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사교적인 분이셨다. 동네 사람들이 훤했고 삼십년도 넘게 지내온 내 집이 가장 편했다. 그럴거라 생각했다. 여전히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외할머니를 찾아뵙고 돌아왔던 어느날, 엄마가 눈물지으며 말했다. 얼른 모셨어야했어, 그 오래된 집에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엄마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슬픈 감정이 엉겨붙어 가슴에 맺혔다. 마지막으로 외할머니를 뵈었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다른날과 달리 우리를 기억하는 듯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억척스런 손으로 마주잡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가는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웃어주셨다. 외할머니의 웃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뒤돌아서며 아 사진을 찍어둘걸 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외할머니는 내가 신혼여행을 간 중에 돌아가셨다. 나는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를 비롯한 일가 친척들은 막연한 불안감을 품고있다. 우리 가족은 명확한 가족력을 가지고 있다. 인지장애나 고혈압, 당뇨같은 만성질환은 가족력을 중시 여기는 질환이다. 엄마 아빠는 치매를 그저 나이가 들면 어쩔수 없이 밀려오는 질환 정도로 생각하시고 계신듯 하다. 나 또한 그랬다. 하나하나 쓰러져가는 모습에 거역할 수 없는 파도라 생각했다.
사촌언니가 전화가 왔다. 고모가 요즘 우울하시단다. 어떤 영양제를 먹으면 좋을지 알려달란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노인 우울증은 치매로 발전하기 너무 쉽대.. 고모가 힘드시면 설득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정신과 방문해보는게 어떨까.. 언니는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고모가 경도인지장애로 진단받으신건 벌써 작년이라고 한다. 고모는 패치제도 붙이고, 임상시험에도 참석하셨는데 특별한 개선은 없으셨다고 했다. 그 점이 고모는 실망스러우셨던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선생님을 찾았는데도 낫지 않는다. 고모는 본인이 치매 환자라며 이미 희망을 놓으셨다.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듯 하다.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날도 적지 않다고 했다.
가족력이 있으니 어쩔수 없고, 고모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독 친했던 친구들의 이름도, 놀러갔던 장소도 가물가물할 때가 있다. 남들은 그저 웃어넘기고 아무일 아니라고 하지만 혼자 진지해진다. 나는 가족력이 있다고, 남들보다 빨리 기억력이 떨어진것 같아 종종 불안하곤 했다.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작년에 큰 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다. 만약 치매가 발병할 가능성이 있다면 뭐라도 예방 조치를 받고 싶었고, 사실 그보다는 그럴리 없다는 확증을 받고 싶었다. 진료를 하시는 선생님은 다소 황당한 듯 했다. 젊은 여자가, 직장생활도 무리없이 하고 있다는 사람이 본인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줄줄 설명하면서 인지장애가 있는건 아닌지 알려달라고 하니 그럴만도 했다. 검사도 필요없고, 줄 수 있는 무엇도 없다고 했다. 저는 가족력이 있는대도요? 선생님의 표정이 잠시 찡그려졌다. 가족력이 있고, 본인이 그렇게 느끼신다면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뚜렷한 치료약제도 없고, 본인의 생활이 충분히 가능한데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우문현답이다. 예측할 수 없는 질환이니 그럴리 없다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병이 없는 사람에게 있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니 말이다. 저는 인지장애가 없다고 판단하신다는 거죠? 선생님은 강하게 말했다. "네." 병원을 나서며 마음을 정리했다. 나는 치매에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나 뿐만이 아니고 모두가 그렇다. 누구든 걸릴수 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명확하다. 나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선 전혀 무리가 없으며, 어릴때부터도 암기가 싫어 이과를 갔던 학생이었다. 나는 특별히 더 나빠지고 있지 않으며 만약 나빠지고 있다면 그는 자연스러운 노화현상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람은 다양하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다. 나는 다른 잘하는 것이 있는만큼 암기에 조금 약할 뿐이다. 급하게 떠올리는 것에 조금 서투를 뿐이다. 불안해하지 않고 더 건강하게 살아가야겠다 마음먹었다.
고모의 얘기를 듣고서 일가 친척을 한명 한명 되짚으며 가족력을 점검했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앞서 말했듯 치매를 앓았으나 주로 집에서 지내기 시작하신 85세쯤에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할머니는 누구보다 명석하셨다. 큰아버지는 큰어머니를 일찍 사별하시고 홀로 지내셨다. 다양한 사교모임을 즐기셨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통풍때문에 외출이 어려워졌던 시기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이 겹쳐진 후 질환을 맞으셨던 것 같다. 밝고 긍정적인 큰고모는 할머니를 보살피며, 누구보다 부지런한 생활을 하셨다. 여든을 바라보시는 지금도 누구보다도 밝고 정정하시다. 평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사시며 본의아니게 바쁘게 지내셨던 둘째 큰아버지도 여든이 넘으셨지만 너무나 정정하시다. 둘째 고모도 가족들과 애완동물과 바쁜 생활을 유지하시며 여전히 건강하시고, 넷째 고모도 마찬가지다.
단지 우리 가족만의 이력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치매를 앓으셨던 분들은 모두 "혼자" 지낸지 오래 되었고, 그로 인한 우울감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리고 활발한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셨다. 나이와 건강상의 문제로 외출이 어려워 활동이 줄어들고 그렇게 고립된 시간이 늘어났던 것 같다.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을 보시며 보내셨다고 들었다. 신체와 두뇌활동 모두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나이가 드셨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활동하고 주변인들과 교류하며 보내는 분들은 모두 여전히 정정하셨다. 내 걱정은 그저 걱정일 뿐이었다 보다.
지금부터도 꾸준히 운동하고, 끊임없이 두뇌활동을 하고, 가족들과 사랑하며 보내는 삶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늘어져서 유튜브를 보고, 침대에 가만 꼼짝않고 있기 보다는 가족과 대화를 나누고 두 발로 힘차게 걸어나가며 나만의 일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런 미래의 상상도에 치매에 걸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은 더해지지 않는다. 건강하게 살아갈 것이다. 몸은 마음가짐을 반영한다. 건강한 마음이 신체에 투영될 것을 확신한다. 이제 더이상 가족력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십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가족력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우리 고모도 자신을 믿고 가족들과 더 오랫동안, 누구보다 행복하길 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