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이 불안해질 때 글을 쓴다. 온갖 불안한 경우의 수들로 속이 가득 차버릴 때나 안 좋은 사건들을 상상하느라 내 마음이 짓눌릴 때, 그것들을 토해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최근 두 달 동안 글을 쓸 일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서 가장 짙고 깊은 글을 썼던 시기는 동시에 가장 질고 길었던 악몽의 시기이기도 했다. 한동안 좋은(좋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글을 쓰지 못한 것엔, 아마 적절한 불행이 부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불행이 찾아왔다. 친구와의 전화나 맛있는 간식, 내 몸을 꼼꼼하게 씻는 샤워 따위로는 해결되지 않을 만큼의 불행. 그래서 나는 오늘 오랜만에 내 불행을 토해내러 왔다.
전화를 무서워한다. 모든 사람과의 전화가 어렵지만, 나름대로의 순위가 있다. 3등은 딱히 불편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용건 없이 전화할 일 없는 지인의 전화. 2등은 저장되어 있지도 않아서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찝찝한 전화.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따로 저장하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사람의 전화. 오늘은 하필 그 사람에게 내가 직접 전화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 최악을 꽁꽁 뭉쳐둔 그 사람에게 직접 닿아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살면서 싫은 말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온실 속 화초처럼 큰 건 아니다. 필요 이상의 뒷담을 들어본 적도 있고, 때로는 누군가와 얼굴을 붉히며 싸워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 일방적으로 폭언을 참아내야 할 일은 없었다. 딱 한 번 그런 경험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내가 연락해야 할 사람이었다.
단순히 모욕적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동시에 억울하고 무서웠다. 아무런 변명을 할 수 없는, 아니 하지 못하게 입막음당한 채로 30분이 넘게 폭언을 듣는 것은 내가 각오한 것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었다. 전화를 하는 내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괜히 눈물을 훌쩍이거나 숨을 헐떡이다가 눈물로 모든 걸 무마시키려 한다는 같잖은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들었던 모든 말들을 기억한다. 기록하기도 했다. 언젠가 당시의 음성녹음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전화를 시작하는 그 사람의 "여보세요" 한 마디에 숨을 꾸욱 참고 눈물만 줄줄 흘렸었다. 30분이 넘는 녹취록을 들으면서 이불로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었던 게 기억난다. 그 이후로 한 번도 그 녹취록을 틀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삭제하지도 않았지만.
그 이후로 전화를 무서워했다. 지금도 그 통화내용을 전부 아는 사람은 나뿐이고 앞으로도 그 모든 걸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히 그 폭언들을 내 입으로 다시 전달할 용기는 없으니까. 그 일이 있은지 몇 주 뒤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을 보고 돌덩이를 가슴에 올려놓고 뜨거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번호를 착각한 것이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전화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나에게 온갖 협박과 저주를 쏟아붓던 그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이 되어서 내 가슴께를 깔고 앉은 기분이었다.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요, 제발 비켜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아무리 외쳐봤자 그 사람은 내 아픔에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그 무게에 적응하고 알아서 숨 쉴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
그런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쉽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되도록이면 그 사람이든 나든 누구 하나가 죽기 전까지 최대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쩌면 다정하게 전화를 받지 않을까. 아니면 무슨 생각으로 연락했냐며 또 나를 쏘아붙이려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이미 내 연락처를 전부 차단해버리진 않았을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가 결국 전화가 가능하냐고 묻는 질문 하나만 문자로 남겼다.
그리고 두 시간째, 답장도 없고 전화도 없다. 불안해서 죽을 것 같다. 아침에 마신 커피가 내 온몸을 돌아다니면서 혈관 하나하나를 두들기는 감각이 든다. 온몸에서 심장이 뛴다. 싸가지없다며 꼬투리가 잡혀서 또 욕을 먹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차단당했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물론 나는 그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끝없이 두려워하겠지만. 이런 감각을 감히 누구와 공유하겠는가.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겐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기 싫으며, 내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나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은 나를 떨게 할 뿐만 아니라 철저히 홀로 남도록 고립시켜 버린다.
요즘도 가끔씩 고민한다. 나는 무슨 잘못을 했던 걸까? 타자를 치기 힘들 정도로 손을 떨고 꿈에서는 그때 당신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소리치느라 이를 갈고, 그 떨림이 모두 지나가기 전까진 내 할 일은 하지도 못할 만큼의 잘못은 ,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글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 떨림으로부터 벗어나서 안정될 날이 오기는 할까. 그때는 이 글을 끝낼 수 있을까. 나는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