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건 이렇게나 편리한 것인가?
당신의 죽임이 다가오니, 당신에 대한 증오가 사라진다. 눈 녹듯이 사라진다는 말이 이렇게나 잘 어울릴 수가. 죽음이라는 햇빛을 맡고 순식간에 녹아버렸는데, 도시의 눈밭처럼 얼룩덜룩 자국이 남아버렸다. 그래도, 내가 당신을 죽도록 싫어했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어쨌든, 당신이 그렇게까지 아파한다는 사실보다는, 죽음이 다가왔다는 사실에 절망할 것을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사그라든다. 당신이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 안타까운 게 아니라, 과정이나 이유가 어찌 됐든 본인의 죽음을 예측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피말리는지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 딱히 받은 사랑도 없어서 돌려줄 사랑까진 없지만, 굳이 원망이나 혐오를 보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당신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가장 큰 이유를 하나 품고 있다. 나는 당신이 죽은 뒤, 당신의 장례식이 열렸을 때,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다. 결혼식을 안 가더라도 장례식은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기쁜일을 축하하는 마음은 멀리서도 전해지지만, 슬퍼하는 얼굴은 눈을 통해 나눠야 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았던 사람이더라도 웬만하면 장례식은 참석하는 게 예의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의 장례식을 가는 게 너무나도 무섭다. 그 사람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누고, 한 공간에서 잠시라도 머물러야 한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악몽을 꾼다. 요즘 내 일상의 불안과 무기력의 원인은 그것이다. 당신의 죽음이 두렵다. 죽을 만큼 무섭다. 당신이 죽게 될 때쯤에 내가 한국에 없거나, 원인 모를 병에 잠깐만 걸리거나, 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할 수 없는 납득가능한 원인이 생겼으면 좋겠다.
죽음은 누군가의 죄책감을 씻어주기도 하고, 짙게 만들기도 하던데. 나한테는 얼룩을 남기는 동시에 미끄러운 빙판길이 되어버려서,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내리막길을 한 발로 서있는 기분. 위태위태하다. 매일매일이 무기력하면서도 위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