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ena Jun 26. 2019

7. 쉽게 사랑에 빠지고 후회하는 것쯤

그 사람과 약속을 잡은 월요일은 아무런 계획도 없는 날이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하루의 끝자락인 밤 9시였다. 퇴근이 늦어서 그 시간밖에는 안 된다고 했다. 너무 시간이 늦지는 않냐는 질문에 사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시간이 펑펑 남아돌아서 아무 때나 상관없는데요 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내가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움에 반동해 허세가 튀어나왔다. 저도 그 시간이 딱 괜찮아요. 저도 오후까지 약속이 있거든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오전 9시였다. 더 누워있을까 하고 다시 눈을 감는데 어제 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저도 오후까지 약속이 있거든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씻고 준비를 하며 관광객이라면 관광지에서 유명한 것들과 만나는 게 약속이라고 합리화를 했다. 파리를 오후까지 만나고 있으면 되지 뭐, 라면서.


만나기로 한 것은 알렉상드르 3세 다리였다. 금박칠이 되어있는 동상들 덕분에 파리에서 제일 눈에 띄는 다리이다. 제일 가까운 지하철 역은 Invalides역이지만 조금 떨어져 있는 Assemblée Nationale역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바로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돌아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고 싶었다. 조용한 골목, 모르는 건물, 취향인 가게 같은 것들. 나는 이곳에 오랜 시간을 머무는 사람이었고 그건 파리의 많은 것과 천천히 만날 수 있는 약속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만나러 와야겠다고 생각한 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파리에서의 로망을 꿈꾸게 하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장소가 이곳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길과 조연이었던, 그러나 마지막엔 조연이 아니게 되는 가브리엘이 바로 이 곳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이전에 우연히 파리의 골동품 가게에서 만났다가 이 곳에서 재회한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둘이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한 뒤 나누는 대화이다.


가브리엘: 저는 파리에 살아요. 당신은요?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어요?

길: 저는 그냥 산책하러 나왔어요. 그리고... 저는, 결정했어요. 파리에서 살 거예요.

가브리엘: 정말요?

길: 네.

가브리엘: 와! 후회 안 할 거예요.


길이 파리에서 살기로 정말 결심한 건 바로 저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브리엘에게 결정했어요 하고 말하던 바로 그 찰나의 순간. 길이 가브리엘과 사랑에 빠진 순간. 그건 고작 문장 하나를 말하는 시간에 불과했고 무척 성급해 보였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보이는 파리의 아름다움은 그 모든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있게 만든다.  


파리에서 누구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에 빠지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래서 파리가 적합하다. 사랑의 시작이 순간의 파동과 같다면 파리는 그 파동을 쉽게 만들어내는 곳이다. 얼굴 위로 부서지는 늦은 오후의 햇빛,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가득 찬 풍경, 그리고 북적이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 같은 것들로 인해서.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의 오후 약속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약속 시간인 밤 9시까지 3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기다리는 시간 안에 설렘이나 기대는 딱히 없었다. 남은 시간은 휴대폰으로 책을 읽으며 때웠다. 집에서 나가기 전에 입고 나간 옷도 가져온 옷 중 제일 편한 옷이었다.


정시에 만나기로 한 카페 앞에 도착했다. 상대방에게도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는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동양인은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다가 혹시나 해서 구글 지도를 보니 원래 만나기로 했던 카페와 한 정거장 거리에 이름이 같은 카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와 있는 곳이 바로 그 이름이 같은 카페였다. 심지어 약속 장소를 정한 것은 나였다. 황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내 바보 같은 실수로 인해 벌어진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한 뒤, 사과를 하고 곧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두 카페는 일직선상에 있었고, 뛰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곧 숨이 차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밤공기가 뺨을 스쳐가는 느낌이 서늘해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이 내가 파리에서 처음 들은 한국말이었다. 깜짝 놀라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저 사람이구나.


영화처럼 첫눈에 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차분한 느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정되어 흘러가는 파리에서의 아까운 시간을 같이 보내기에 아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카페로 같이 걸어가는 길에 옆얼굴을 슬쩍 훔쳐봤다. 만나서 인사를 한 이후부터 계속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기분 같은 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약간 자만해져서는 들뜨기 시작했다.


카페에 도착해서는 야외의 테라스석에 앉았다. 파리 사람들은 야외에 앉는 걸 좋아해요, 하고 자리에 앉으며 그 사람이 설명했다. 파리에 대해 잘 아세요? 하고 묻자 저는 여기서 태어났어요, 하더니 슬쩍 웃었다. 사실 저는 한국말을 잘 못해요. 불어가 훨씬 더 편해요. 책을 읽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리고는 살짝 주변을 살피더니 카페 직원과 눈을 맞춰서 그 사람을 우리 테이블로 불러왔다. 그리고 불어로 메뉴판을 달라고 말한 뒤, 나에게 한국말로 혹시 괜찮으시면 와인 마실래요? 하고 물었다. 그때 갑자기 옆 테이블의 담배 연기가 넘어와 코 끝에 닿았다. 처음으로 담배 냄새가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파리 와서 처음 한국말하는 대상이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게 너무 재밌어요. 하면서 나는 신나게 떠들어댔다. 계속 종알거리고 묻고 대답을 들었다. 파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프랑스의 직장 문화는 어떤지,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지 같은 것들을 물었다. 모든 대답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내가 한 질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다시 나에게 되돌아왔다. 원래 무슨 일을 했었는지, 한국의 직장 문화는 어떤지, 그리고 파리에 왜 왔는지. 그게 제일 궁금하다고 말했다. 파리에 왜 온 거예요?


그 질문에는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사실할 일이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던 것과 같았다. 회사 다니다가 우울증에 걸려서 생각 없이 오게 됐어요,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파리는 누구는 정말 좋아하고 누구는 정말 싫어하고, 그런 게 좋아서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걸 잠시 멈췄다. 내가 조용해지자 귀에 들려오는 말은 불어뿐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소리들은 백색소음처럼 귀에 잠시도 머물지 않았지만 저 사람의 귀에는 분명한 말소리로 남을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손가락이 길고 예쁘네요, 하는 말에 정신을 차려보니 무의식적으로 와인잔을 계속 톡톡 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웃으면서 어렸을 때 피아노를 오래 쳤어요, 한 뒤 왠지 쑥스러워져서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리려고 했을 때 갑자기 그 사람이 손을 뻗어 내 손가락을 살짝 만졌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그래서 그렇구나 라고 이야기했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 퐁당 하는 느낌과 동시에 파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머릿속에 떠오른 건 구제불능이라는 단어였다. 지금 여기서? 이 상황에? 저 사람한테? 손가락 좀 닿았다고?


파동을 만드는 게 무엇이냐에 따라 퍼져가는 속도와 물결의 크기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고작 손가락이었다. 단지 가벼운 그 행동에 빠르고 커다랗게 물결이 일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파리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하고 그 사람이 물어보았다. 글쎄요. 아마 최대한 오래? 나는 마치 알렉상드르 3세 다리 위에서 가브리엘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의 길처럼 그 순간에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이 모든 감정들이 바보 같고 어색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12시를 넘긴 시간이어서 이제 집에 가는 게 좋겠다고 말을 건넸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처음 보는 파리의 한밤중이었다. 길거리에 간간히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인이었고, 공기는 아까보다 훨씬 차가웠다. 지하철 역에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그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 뭔가를 망설이는 듯 하더니 말을 꺼냈다. 혹시... 저희 집에 가실래요?


잠시 심호흡을 한 뒤에, 애초에 그런 말 하려고 나오신 거예요? 하고 따지자 그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오늘 우리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국으로 갈 사람이랑 진지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여유는 저한테 없어요.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얘기한 거예요.


그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솔직함이 웃기다고 생각한 건 그 때 눈에 들어온 남의 눈치 따위는 안 보고 거리에서 키스하고 있던 연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프랑스였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자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저렇게 솔직할 수 있는 게 프랑스식이라면 프랑스식으로 대답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귀지 않는 사람이랑 자는 건 제 규칙이 아니에요. 그치만 솔직히 오늘 얘기한 것 자체는 재밌었어요. 파리에 있는 동안 그냥 친구로서 만날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알겠다며 끄덕이는 표정에 흔들림 하나 없는 것이 약간 화나는 일이었다. 빠르고 커다랗게 퍼져간 물결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게 나만의 감정이었다는 것이 우습기도, 웃기기도 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다리 위에서 밤의 파리 속으로 사라지던 두 사람을. 그리고 그 이후의 두 사람의 이야기 속 분명히 생겨났을 후회들을. 쉽게 사랑에 빠지고 후회하는 것쯤이야 파리에서는 하나도 특별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일이라고. 그건 나에게 위안을 가져다주는 상상이었다. 집까지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물결이 잦아들기를 바라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6. 운에도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