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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 Nov 26. 2022

나만의 삐뚤빼뚤 동그라미

we're still cool without luck

Letters from Thailand (3)





오전부터 부지런히 준비해 택시를 탔다. 방콕 시내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는 현대미술관(MOCA)에 가기 위해서였다. 찌는듯한 방콕의 더위를 피해 쾌적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길은 꽤 괜찮았다. 며칠간 몇 번의 그랩 바이크를 타며 도시의 매연과 습기로 꼬질해졌던터라,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길게 풀어도 뽀송한 택시 안이 좋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택시 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게 싫어서 이동하는 동안 자주 책을 읽는 나에게, 가장 좋은 건 붐비지 않는 지하철. 기차 안도 좋다. 오히려 비행기에서도 책이 잘 읽힌다. 그에 비해 택시에서는 멀미가 나서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나와 낯선 기사님 둘 뿐이니 같이 놀거나(?) 할 수도 없고. 편하고 쾌적한 대신 오히려 시간이 아깝달까. 


이 날도 그랬다. '목적지가 좀 더 가까운 거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택시에 앉아 있었다. 시간을 낭비하더라도 목적지에 도달해서 하고 싶었다. 어딘가로 가는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 아까우니까. 어쨌든 택시를 탔으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도로 위를 구경했다. 차 안에 앉아 바라보자니, 걸어 다니며 느끼는 것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또 했던 것 같고. 휴대폰을 보자니 마땅히 할 것도 없었다. 멀미가 났다. 그래서 에어팟을 꺼내 노래를 들었다. 그날 어쩌다 그 노래를 듣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들어보긴 했지만 주의 깊게 들어본 적은 없는 노래. 확실히 태국여행에 어울릴법한 노래는 아니었다. 리프레시 휴가에 어울리는 제목도 아니었다. 플레이리스트에서 내가 직접 선택해서 들었던 건 분명히 아니다.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이 노래를 만났다. 낭비하기 싫은 시간의 틈 사이에서.




기를 쓰고 사랑해야 하는 건 아냐

하루 정도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에도 역시 완벽하군 나의 여인 


여전히 무수한 빈칸들이 있지 

끝없이 헤맬 듯해 풀리지 않는 얄미운 숙제들 사이로 

마치 하루하루가 잘 짜여진 장난 같아

달릴수록 내게서 달아나


Just life, we're still good without luck

길을 잃어도 계속 또각또각 또 가볍게 걸어 

(Take your time) There's no right 

실은 모두가 울고 싶을지 몰라 슬퍼지고 싶지 않아서 화내는지도 몰라


여전히 무수한 질문들이 있지 이번에도 틀린 듯해

아주 사소한 토씨 하나의 차이로

마치 하루하루가 삐뚤은 동그라미 같아 

도망쳐도 여기로 돌아와


Just life, we're still good without luck

비틀거려도 계속 또박또박 똑바르게 걸어 

(Take your time)There's no right

 때론 모두가 외로운지도 몰라 지워지고 싶지 않아서 악쓰는지도 몰라


I know that life is sometimes so mean

(La-la-la-la la-la, I love my days) It is true, so I'm trying


난 나의 보폭으로 갈게 

불안해 돌아보면서도 별 큰일 없이 지나온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그래 볼게 


Just life, we're still cool without luck

길을 잃어도 계속 또각또각 또 가볍게 걸어 

There's no right 

실은 모두가 모르는지도 몰라 

어쩌면 나름대로 더디게 느림보 같은 지금 이대로 괜찮은지도 몰라



- unlucky, 아이유 -




몇 소절만 인용하려다가 한 구절도 버릴 글이 없어 그대로 쓰고 말았다. 모든 문장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늘 나에게 큰 용기와 영감을 주는 그녀의 글은 이번에도 나의 태국 여행에 큰 인상을 남겼다.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만난 이 노래는 나의 태국여행을, 나의 2022년을 추억할만한 노래가 되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고 싶어 하는 나. 이동하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나. 막히는 길을 답답해하며 종종거리는 나. 이것이 택시를 타고 미술관에 가던 순간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생의 많은 날들을 그렇게 살아왔다. 빨리 이루고 싶어 했고, 의미 없이 방황하는 걸 언제나 경계했고, 무언가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에 자주 괴로워했다. 우리가 보기에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그녀에게도 스스로가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던 걸까. 무수한 빈칸, 풀리지 않는 얄미운 숙제, 사소한 토씨 하나 차이로 틀리고만 문제.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은 이런 것들 투성이인 걸까. 


왠지 속이 시원했다. 그래, 기를 쓰고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야. 늘 행복하지 않아도, 늘 '행운'을 거머쥐지 않아도, 내가 자주 틀리는 것 같아도,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토씨 하나 차이로 못 이룬 것 같아도. 뭐 어때. 그럼에도 완벽하군 나의 여인, 나의 인생. 우리가 행운이라 부르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unlucky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지? 때론 행운 같은 일들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하고, 불운 같은 일이 시간이 지나 더 좋은 것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행운과 불운이라는 건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컴퍼스로 그린 듯 말끔한 동그라미가 아니라 삐뚤빼뚤 동그라미라도, 그걸 unlucky 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나만이 걸어온 길이라 나만의 삐뚤빼뚤한 발자국이 생겼고 그래서 나다운걸. 그게 더 예쁜데, 그렇지 않아? 


맞아.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그려가는 삐뚤고 어긋나는 이 동그라미가 꽤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삐뚤빼뚤 돌아가는 시간을 아까워하곤 하지만, 나만이 그릴 수 있는 이 그림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저 사람이 그린 선이 탐날 때가 있고, 이 길로 곧장 유연하게 꺾이는 선을 그리려다 삐끗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좀 괜찮은 것 같다. 마침내 나도 '나의 보폭으로 갈게' '느림보 같은 지금 이대로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여행길에서 읽은 책에도 '내 마음의 행복은 무목적의 합목적성에서 온다'는 문장이 있었다. 목표가 이끄는 삶, 계획과 전략을 세우고, 매일 결심과 각오를 새로이 하며 사는 인생도 훌륭하지만, 그저 과정에 충실하고 결과에 감사한 삶이면 가히 족하고도 남는다고. 그냥 내 마음이 움직여서 오늘 하루도 값있게 살자고.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처럼.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p.154, 정재찬)


10대의 나는 정말 목표가 이끄는 대로 살았고,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수능에 실패한 후 20대에는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삐뚤빼뚤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살아왔다. 30대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타고난 성향이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이제는 그래도 '나만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 자체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적지로 가는 길 위의 순간을 더이상 아깝다고 여기지 않으리. 그 순간도 나는 나만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중일 테니까. 그래, 살아내는 것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




미술관에 갔다 돌아오는 택시 안. 택시 기사님과 기분좋은 농담을 몇마디 주고받으며 창 밖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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