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다고 흐릿한 건 아니었어.

그래도 밉지 않았던 2012 사이판

by yosepina
나는 이 댓글을 보고 입금해드리고 싶다고 답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어마 무시한 찬양 댓글을 받고도 다음 여행기를 쓰지 못한 나도 참 어지간하다. 이 작가님은 내가 여행 고수가 된 이후의 글들이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러려면 최소 5~6개의 여행기는 지나야 한다고 했고 그랬더니 부처님처럼 존버 하신다고 했다. 존버 하시다가 정말 부처님이 되셨는지 요즘 잘 안 보이신다. 훌쩍.

다음 여행지는 2012년 사이판이다. 그런데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사진을 들여다봐도 이렇다 하게 쓸만한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생각만 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마지막 괌 여행기를 쓴 지 일 년이 지나서 아무리 그래도 일 년에 하나는 쓰는 양심 머리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일단 글쓰기를 눌렀다. 쓰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뭐.

'아, 뭔 내용도 없는 글 너무 억지로 쓴 거 같은데?'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이걸 써야 다음 여행기로 넘어간다. 초등학교 졸업은 해야 중학교 가잖아?


어쩌다 보니 사이판

딱히 처음부터 사이판을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같은 해 봄에 괌도 갔다 왔고 당시 나는 백수였다. 휴가를 잘 못 내던 친구가 추석 전 휴가를 낼 수 있다고 같이 갈 수 있겠냐고 물었고 처음에 나는 조금 망설였다. 1년에 해외를 두 번이나?? 뭔가 부잣집 딸내미 흉내 내는 것 같았다.(풉) 주변에선 갈 수 있을 때 가라고 부추겼고 나는 빈곤한 내 처지와 상관없이 일단 가기로 마음먹는다.(젊었나... 대책 없이 살았나 보다.) 그리고 일 년에 해외여행 두 번 가기 스타트를 2012년에 끊고 나서 이후로 매년 3회 이상 꾸준히 출국을 일삼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 친구와 여행은 처음이라 서로에 대한 여행 취향을 모른 채 나라부터 정하기 시작했는데 친구는 대만, 마카오를 가고 싶어 했고 나는 다 상관없다 해놓고 여행사 특가로 나온 사이판도 후보에 올렸다. (아마 이때는 휴양지를 조금 더 좋아했던 모양이다.) 내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인 바 없으나 당시 항공권과 날짜가 맞지 않아서 대만 마카오가 탈락되고 사이판이 최종 결정되었다.(쓰다 보니 친구는 다르게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큰 틀이 정해지고 백수인 내가 세부 일정과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아니, 백수가 아니었어도 내가 했을 테지만..) 지금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어 웃음이 나지만 당시 일정표를 보고 있자니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검색하던 나의 열정이 생각난다.(겨우 저 정도 양을 가지고 왜 그렇게 오래 공부했을까.. 여행 머리가 아직 발달하기 전이라 그런가 보다.)


그런데 뭔가 계속 삐그덕 삐그덕

사이판 여행의 키워드 하나를 대라면 이거일 거다. 매일매일 뭔가 삐그덕. 그 기운은 출발도 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여행사에서 급하게 전화 와서 호텔이 변경된다고 했다. 원래 지정되어 있던 호텔은 조금 외곽에 있던 급이 더 높은 좋은 호텔이었다. 여행사 직원은 거듭 미안하다고 하면서 과일 바구니와(과일이 죄다 신맛이 강해 입에 대다가 말았다.) 와인을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둘 다 술 잘 안 먹음. 반도 안 먹고 남겼다.)

오, 마침 사진도 있다. 누가 봐도 맛없게 생긴 과일.

아니, 휴양지는 숙소가 절반 이상인데?? 갑자기 급 낮은 호텔로 가라고? 하지만 이미 출발은 예정되어 있었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바뀐 호텔은 사이판 바로 중심지에 있었다.

"네. 알겠어요."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그래, 여자 둘인데 좋은 숙소 있어봤자 뭐해. 위로하면서 출발을 강행한다. 숙소의 위치는 아주 좋았고 그에 반비례하게 룸 컨디션은 별로였다.

그리고 이후로도 묘하게 떨떠름한 일들은 계속 발생했다.


건기/우기 구별도 안 하고 다니던 시기

마나가하 섬에 들어가는 일일투어 상품을 예약했고 상품 특전에는 공항-숙소 이동 서비스와 도착한 날 관광지 투어를 시켜 준다고 했다. 몇 군데 갔던 거 같은데 기억 안 나고 마지막에 만세절벽만 기억난다.

만세절벽은 무엇인가.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일본인들이 절벽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살한 곳이다.

여기가 맞지 싶다...(자.. 자신이 없다..)

"으유, 독한 것들." 나는 애국지사처럼 눈을 이글거리며 한마디 뱉었고 그래서 만세절벽을 기억하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이곳을 마지막으로 폭우가 내렸기 때문이다. 꾸물꾸물하던 하늘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술 취한 다음날 변기통에 구역질을 토해내듯 갑자기 비를 쏟아냈고 관광일정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아... 그래.. 사이판은 그때 우기였다. 훗날 내 기억에 괌과 사이판이 아주 다르게 그려진 건 그러니까 순전히 날씨 때문이었다. 날씨를 잘 모르고 갔고, 날씨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도 몰랐다.

어쩐지 날씨가 계속 우중충하더라. 어쩐지 흥이 덜 나더라.

비가 오거나, 올 것 같거나 둘 중 하나.

쨍쨍하게 화창한 날은 하루 있었다. 떠나오던 날.

이상하다. 늘 그런 식이다. 왜 마지막 날은 늘 그렇게 눈이 부신지.

공항으로 가던 길에 만난 파란 하늘

무슨 일이 있는지는 저희가 묻고 싶은데요.

마나가하 섬 투어는 도시락과 스노클링 장비 등등 모든 것이 포함된 상품이었다. 호텔로 우리를 픽업 온 가이드 아저씨는 우리를 태우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손님이 너무 없어요. 한국에 무슨 일 있어요?"

".... 그... 그래요?"(글쎄요... 추석 연휴 전이라는 거 말고는...)

"오늘도 두 분 밖에 없어서 도시락이 취소됐어요. 여기 점심 비용 다시 드릴게요."

"네???"

잠깐.. 쓰다 보니까 그땐 화가 안 났는데 화가 난다. 아니, 그럼 전 날에는 말을 해주셔야지. 돌려받는 비용으로는 섬에서 점심을 해결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사진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해둔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가거나 예약을 하러 가면 문을 닫거나 공사 중이었다. 다행히 나의 성격대로 플랜 B가 있어서 다른 식당으로 가거나 예약 일정을 바꾸면서 파국(?)은 면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마저 문이 닫혀 있자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지금 사이판 무슨 일인데?"


그래도 여행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사이판 여행이 별로였냐면 그건 또 아니다. 기대 안 했던 식당들도 맛있었고(내가 미식가가 아닌 건 함정) 식당들 간의 커넥션(?)이 있어 쿠폰까지 알뜰하게 써가면서 맛집들을 털고 다녔다.

티끌모아 티끌인 내 인생 모토는 밖에서도 여전하다. 각종 쿠폰들


특별한 메뉴들은 아닌데 실패는 없었던 기억

마지막 날 밤은 딴엔 분위기 낸다고 펍에 가서 칵테일도 한잔씩 마셨다. 생각해보니 나는 호텔 들어가서 마사지도 받았다. 백수가 달러 쓰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마지막 밤엔 다들 이런데 가쥬?

지금 생각하면 딱히 살 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 가게 저 가게 돌아가며 기념품이랑 선물도 참 많이 사 왔다.

이렇게 비슷한 물건을 파는 비슷한 가게를 다 털고다님

아! 어떤 가게 카운터에서 계산하는데 젊은 여자 직원이 나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너, 한국 사람이야?"
"응. 나 한국 사람인데?"

"너, 예쁘게 생겼다."

"... 고... 고마워."

계산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에게,

"야! 저 직원이 나보고 예쁘대. 나는 한국에선 잘 안 듣는 소리를 꼭 해외 나오면 듣더라. 이거 봐. 나는 한국에 맞는 얼굴이 아닌 거야."

라고, 얘기했지만 친구는 별다른 대꾸를 안 했던 걸로 기억한다.

말 같잖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친구는 착해서 내게 대놓고 쓴소리를 하지 않는다.)

어쨌든, 여행은 이처럼 옳은 것이다. 평소엔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을 이렇게 내게 안겨준다. 아... 나는 이 소즁하디 소즁한 기억을 왜 잊고 있었단 말인가. 역시 아무거나 쓰다 보니까 뭔가(?) 나온다. 그때 그 직원이 지금 건강하고, 행복하고, 하는 일 모두 잘 되고 있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아.

기억을 되찾기(?) 위해 사진을 뒤지고, 일정표도 다시 읽어 보고, 전두엽의 기억 세포까지 즙을 내다보니 신기하게도 그때로 돌아간다.

난기류는 만난 적 없다고 입찬소리를 했다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제대로 된 터뷸런스 후려 맞고 밥 먹다가 손을 후들거렸던 나.

예쁘진 않지만 명백하게 젊은, 아니, 어리디 어린 사진 속의 나.

물놀이 안 좋아하는 친구 맘도 모르고 혼자 신나게 수영장에서 튜브 끼고 둥둥 떠다니던, 행복한 나.

나는 그때의 나를 만나고 그리워하고 하나의 추억이라도 더 되살려 보려 친구까지 기억 소환에 끌어들인다.


그래서 밥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나?

친구 아.. 아니... 안 나는데.(기억력은 내가 더 좋은 걸로...)

그때, 너 호텔 로비 공중전화로 여행사에 전화 걸었었잖아. 왜 걸었었지?

친구 아... 그랬지.. 왜 했지? 니가 말하니까 그랬던 적이 있었다 싶다...(역시 기억력은 내가 더 좋은 걸로..)

(과일과 와인 사진 보여주며) 이거 보니까 기억나더라. 과일 드럽게 맛없었잖아.

친구 아... 이거 와인... 우리 와인 따개 없어서..

나,친구 (동시에) 개고생!!


그렇지.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함께 한 사람들에게만 남는 문신 같은 역사.



*다음 여행지는 호주인데...

처음으로 먼 곳으로 떠난 곳인데..

열흘을 갔는데...

두 도시나 갔는데....

어... 언제 쓸 수 있을.... 까...

새해엔 원치 않는 나이 선물 말고 부지런함을 선물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