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아서 맘이 좋지 않아서 모든 날이 좋았다.

그냥 다 좋았던 2012년 괌.

by yosepina
(아마도) 이 글엔 얻어갈 여행 정보가 (거의) 없을 것임을 사전 공지합니다.


지난 발행 글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배설 글을 여행기 앞에 새치기시킨다고 했을 때만 해도 사실 괌 여행기에 대한 의무나 압박 같은 건 없었다. 근데 말을 하고 보니까 이젠 진짜로 미루면 안 될 것 같고, 숙제인 것 같고, 또 다른 글을 새치기시키면 혼날 것 같은(누구한테..?) 중압감이 들어서 올해가 가기 전에 이 글을 써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다.(깨달은 바 1. 역시 주변에 자꾸 공약을 해놔야 조금이라도 지킨다. 2. 마감이 있어야 움직인다.)

이걸 써야 다음 사이판 여행기도 쓰고(이건 올해 못쓸 거 장담(!) 합니다... 대뻔뻔) 천천히라도 매거진 글을 이어 나갈 텐데 괌에서 딱 막혀버린 이유는 사실 뭘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괌 여행이 별로여서는 아니다. 진짜 진짜 좋았고 신났다. 기억이 가물거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진짜 진짜 좋았고 신난 감정을 세부적으로 풀지 못하겠고(이게 기억이 안나는 건가..?) 그 당시 좋지 않았던 상황과 맞물려 개인적으로 더 크게 느낀 면도 있는데 이걸 여행기라는 테마에 걸어도 되는 건가 쪼그라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당시 사진을 뒤져봤는데 사진은 왜 다 없고(수영장이랑 바다에서 찍은 사진 죄다 어디 갔니..?) 여행 인생 얼마 안 된(?) 햇병아리 시절이라 일정표를 봐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 건질 게 없었다.(차모로 빌리지가 어디야.. 간 적이 없는데 왜 한글파일에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야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안 열려서 못 가서 기억이 없는 게 당연)

그래도 써야지. 진짜 진짜 좋았고 신났다 라고 초등학생처럼 쓰지 뭐. 언제는 뭐 대의적인 글을 썼던가..


갔던 걸 후회하지는 않지. 안 갔던 걸 후회하기는 해도.

다른 것들도 그렇겠지만 여행은 특히 갈 수 있을 때 무조건 가야 한다. 아마 작금의 시대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말엔 다 동의할 것이다. (엄마는 작년 12월, 내가 치앙마이 가자고 했을 때 임플란트 시술 이유로 거절했던 걸 후회하고 있다. 더운 나라에 마스크 쓰고라도 갔어야 했다며..)

괌을 갈 때에도 그랬다. 당시 나는 악독한 상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출근길엔 늘 가슴이 조마조마했고 퇴근해서도, 주말에도 늘 살얼음판에서 먹고 자고 뛰어노는 것처럼 불안했다. 당연히 휴가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월, 금엔 휴가 쓰지 말라는 얘기도 했었다. 월금 쉰다고 업무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주말 붙여 쉬는 꼴이 보기 싫은 거였다. 쓰다 보니 또 화가 난다.) 그렇다고 내가 착하게 그 말을 다 지켰으랴. 근로자의 날을 붙여 이틀을 휴가 내고 괌에 가자는(정확히 괌은 아니었고 몇 군데 후보지가 있었음) 친구의 제안이 있었고 나는 묘책을 짜낸다.

"라섹 수술해야 해서요. 이틀 휴가 쓸게요."(참나, 이틀 휴가 쓰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가 무슨 중요한 자리에 있어서 나 없다고 일이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는 마지못해 허락했고 나는 잘 다녀왔다.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그로부터 두 달 뒤 나는 반 강제 퇴사를 한다. 그 휴가라도 안 냈으면 억울해서 어쩔 뻔.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라섹수술은 사실이 아니다. 라섹수술은 그 전 해에 했다.(거짓말하는 걸 싫어한다고 지지난 글에 그렇게 통곡하듯 글을 썼는데 앞 뒤가 안 맞네? 아니다. 나쁜 놈한테 이 정도의 거짓말은 나쁜 일도 아니다. 흥!)


미국 땅(?)을 밟았더니 펼쳐진 풍경.

예약을 진행하고 여행 준비를 시작한다. 괌은 미국 땅. 그래서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출입국 절차도 까다롭다고 했다. 스프 때문에 컵라면 반입이 원칙적으로 불가라 재수 없으면 걸린다기에 소심하고 바른(?) 우리는 애초에 들고 가지 않았다.(가서 샀다.) 문제는 입국 시 지문도 열 손가락 다 찍고 영어로 막(!) 질문도 한다는 거다. 대부분 관광객이고 형식적인 질문 몇 가지 해서(왜 왔어? 얼마 있을 거야? 누구랑 왔어? 직업 뭐야? 중 돌려 묻기) 신경 쓸 거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소심한 쫄보들. 더군다나 나는 옛날에도 긴장하면 듣기 평가 망하는 유리멘탈형 인간. 당시 알고 지내던 외국인 친구(몇 번이나 만났고 한국말을 못 하는 애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대화를 이어 나간 겐가..)가 너 같이 어린 여자애한테는 신경도 안 쓴다며 자, 그럼 연습해보자! 라면서 갑자기 질문을 했는데(왜 왔어? 얼마 있을 거야? 누구랑 왔어? 직업 뭐야? 중 몇 가지..) 급 긴장해서 개미 소리로 대답하니까 더 크게 말하라고 혼났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입국할 때 기억이 별다르게 남는 게 없는 거 보면 왜 왔어? 얼마 있을 거야? 누구랑 왔어? 직업 뭐야? 기출문제 중에 나와서 무리 없이 대답을 했나 보다.

공포의(?) 입국 심사를 끝나고 나왔더니 나를 반기는 이 말.

공항 밖으로 나왔더니 더운 기운이 훅 하고 날 감싼다. 여름을 좋아하는 나는 덥고 때로는 습하기도 한 그 공기가 날 덮쳐오는 게 좋다. 정말 여행지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 나서.

미팅 샌딩이 포함된 에어텔을 예약했기에 우리를 데리러 온 차를 타고 금방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뭐야? 왜 또 좋아? 원래 가려고 했던 호텔 스탠다드 룸은 예약 당시 만실이었다. 여행사 담당자는 8만 원 인가 추가 요금을 내고 한 등급 높은 방을 예약하던가 다른 호텔을 예약하는 것 중에 양자택일을 하라고 했다. 여자끼리 가는데 무슨 좋은 룸이야..라고 하며 우리는 다른 호텔을 예약했고 그 결정은 아주 옳았다. 사실 모르고 결정한 거였는데 막상 도착하니 중심지 하고도 가까웠고 욕실과 세면대가 분리되어 있어 여자 둘이 사용하기에 아주 적합했으며 층마다 제빙기도 있었다.(작은 것에 감동하는 타입) 모든 룸이 오션뷰로 되어 있던 방의 커튼을 열어젖히는 순간 나타났다. 사진처럼 찍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면. 그리고 떨림.

감격에 겨워 비슷한 사진을 수십 장 찍었다.

여기가 어디냐?!!

아마도 너무 괴로웠던 일상에서 벗어난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눈에 닿는 곳마다 펼쳐지는 풍경은 정말 황홀했다. 모르고 선택했지만 당시 괌은 날씨가 아주 좋은 건기였고(지금은 가기 전 기후부터 체크), 나는 날씨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었고(그땐 몰랐음), 일정 내내 비 한 방울 없이 너무나 맑았던 여행지는 괌이 처음이었다.

사랑의 절벽이라 불리는 곳. 이곳의 역사(?)는 아무도 안궁금해 할것 같아서 패스. 드라마에도 자주 나온다. 모를땐 몰랐는데(당연한 소리..)알고보니 눈에 확 들어오더라.

매일 아침 커튼을 열면 쨍하고 빛나는 햇빛을 마주할 때마다, 튜브 하나로 성인 여자 둘이서 두둥실 수영장을 헤집고 다닐 때마다, 걷고 걸어도 깊어지지 않는 맑고 투명한 바닷물을 볼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

"야~여기가 어디냐?"(믿겨져? 지금 우리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

"야~여기가 어디냐고!!"(지금 이 순간 엄마 아빠도 생각 안 나. 불법 체류자 철컹철컹도 생각 안 나. 그냥 여기서 살고 싶어.)

하지만 투명한 바다 사진은 실종. 귀가 후 밤 수영장도 너무 좋아서 여기 어디냐 연발. 화질은 2012년 디카임을 감안.

달팽이 여행가의 시작

k마트라는 곳에 갔다.(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유일하게 24시간 하는 곳이었는데(지인이 한국 사람이 하는 곳이냐고 물어봤던..ㅋ) 대형 마트로 그 유명한 하와이안 초콜릿이나 생필품을 싸게 살 수 있는 곳이었는데 첫날에 물건을 스캔한 후, 떠나기 전날 와서 물건을 몰아 사자고 했는데 우리는 첫날만 보고 시간이 없어서 다시 가지 못했다. (이유는 다음에 나온다..)

아! 그리고 가지고 오지 못한 한국 컵라면은 여기서도 다 팔아서 하나씩 샀는데 컵라면을 카트에 담고 친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야! 근데 젓가락 없는데 어떻게 먹어?"라고 말하며 세상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으음?(약간 뜸 들인 후 오만한 표정 지으며) 나 젓가락 가져왔는데? 젓가락 분리하다가 호옥시나 부러뜨릴까 봐 4개 챙겼듬."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나 보다. 내가 여행 갈 때마다 달팽이처럼 짐을 이고 지고 다니게 된 게. 요즘은 젓가락, 숟가락, 접이식 칼, 일회용 접시, 일회용 본죽 통 다 챙겨가고 캐리어마다 이미 다 들어가 있다. 여행 동행인들은 언제부턴가 물건을 찾을 때 나부터 부른다.

"야! 너 OOO 가져왔지?"

"그거 OOO한테 물어봐. 가져왔을 거야." 뭐 이런 식. 나를 찾을 때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캐리어에서 물건을 건네주며 희열을 느끼는 나도 문제다. 변태인지 인정 욕구가 지나친 건지 모르겠다.

컵라면 없이 나무젓가락만 챙겨간 게 사실 큰 일은 아닌데 친구도 나도 여행 하수일 때의 일이라 그런지 친구는 그 젓가락 사건에 꽤 큰 충격(?)을 받았나 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괌 여행 얘기를 할 때마다 그 에피소드를 소환해서 나는 그 자극에 더욱 강화를 받아 그 이후로 이층, 삼층집(짐)을 이고 지고 출국하는 여행가가 되었다고 한다.


달러를 물 쓰듯이

홍콩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괌은 쇼핑 여행지로 불리는데 미국령이다 보니 미국 제품들을 아주 저렴히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지금은 직구도 많아서 큰 메리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친구는 가기 전부터 쇼핑 품목들을 어느 정도 정리해 두었지만 나는 화장품 말고는 원래 쇼핑에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특히 유아 용품들을 엄마들이 그렇게 쓸어 온다는데 그것 또한 내 관심 영역 밖이었기에 영양제만 몇 개 사고 친구 쇼핑하는 동안 외곽의 성당이나 다녀오려고 했다.(성당 안 간 지 몇십 년인데 외국만 나가면 그렇게 기를 쓰고 찾아 감) 하지만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성당은 택시를 타지 않고서는 가기 힘든 곳이라 했고 혼자서 택시 타고 갈 정도의 열정은 아닌지라 친구의 일정에 합류하고 함께 아울렛으로 간다. 아울렛으로 가서... 달러 탕진하는 재미에 빠져 첫날 다시 보자고 했던 K마트는 결국 못 갔다고 한다.(혹시 작년 저의 마카오 여행기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다면 첫 카지노에 빠져 다시 보자던 분수쇼 가지 못했다는 얘기가 기억나실지... 역시 사람은 안 변하는 게 맞나 봅니다...)

무슨 6.25 전쟁 직후도 아니고 미국 영양제 못 구하는 것도 아닌데 영양제는 가족별로, 종류별로 무거워 죽겠는데 왜 그렇게 잔뜩 샀는지 나중에 나도 놀랄 정도였다.(쇼핑은 이렇게 판단력을 흐리게 함.) 다시 찾으러 가기도 힘들고 가더라도 없을 확률이 많으니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들고 있어야 한대서 저렴하다는 이유로 살 생각도 없던 가방을 입구부터 겟 해서 결국 결제까지 했다.(그래도 사서 징하게 오래 들고 다녔음) 게다가 다 결제하고 밖으로 나왔다가 결국 다시 들어가서 산 물건까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캐리어였다. 그동안은 엄마 꺼를 빌리거나 대충 인터넷에서 산, 끌고 다니면 나도 여기 있노라고 바퀴소리를 덜덜내며 존재감을 확인시키던 싸구려 캐리어와 함께 했는데 그곳에는 유명한 가방 브랜드의 캐리어도 그냥 쌓아놓고 팔고 있었던 것이다. (자물쇠는 나중에 별도로 한국 와서 구매했지만) 결국 고가의 캐리어를 너무 저렴히 잘 샀다며 아울렛 앞에서 캐리어와 함께 인증샷까지 찍었더랬다.(이 사진도 없음.) 그리고 그 아이는 이후로 나와 사이판도 가고 대만도 가고 태국도 가고 영혼의 단짝이 되었다고 한다.(사이즈가 작은 아이라 유럽은 같이 못 감). 지금은 외출하지 못하고 작은 주머니에 나무젓가락과 일회용 숟가락 등만 품고서 햇빛 볼 날만 기다리고 있다.(잠시 묵념)

뭐 결과적으로 다 잘 샀다고 만족해하긴 했는데 나중에 좀 웃겼다. 혼자 성당 간다고 고상한 척(?) 하더니 그날 내게 온 신은 지름신이었다. 나는 쇼핑을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안 좋아하는 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둥! 대반전..) 내가 돈을 좀 마음껏 쓸 때는 여행 갔을 때라는 걸 생각하면 뭔가 논리적으로 맞는 말 같다.(하지만 인정 안 할래...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


숙제를 끝내며

이 이야기를 써야 다음 여행지로 이어진다고 말한 첫 단락이 무색하게 내용도 없는 여행기를(이걸 여행기라고 해도 되는 것인가.. 근본적인 물음에 봉착) 이렇게 길게 쓰다니 내 이럴 줄 알았다.(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의 인내심에 경의를 잠시 표하며)

어차피 오래전 여행이라 지금의 상황과는 많이 달라 정보를 제공하는 게 의미가 없고(변명 1), 정보 글은 블로그에 차고 넘치며(변명 2) 여행은 결국 개인의 경험과 감정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니(진지) 그때의 나로 돌아가 아주 사적인 내 경험과 느낌을 복기하고 싶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는 괌을 이렇게까지 좋다고 한 건 우리 둘 뿐이었는데 별로라는 이유는 날씨와, 숙소, 개인적 취향 아주 다양했다.

똑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사람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듯 결국 여행이라는 것도 어디를 가느냐, 무엇을 보느냐 보다는 그곳에서 꺼내 놓는 나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괌으로 출국하던 날 공항에서 친구를 발견한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평소와 다르게 친구를 불렀다.

"태희야(가명)!! 여기여기!"

그렇다. 평소에 우리는 그렇게 다정히 부르지 않는다. 평소 같았으면,

"야! 김태희!(가명)" 이렇게 성까지 붙여 정직한 이름 세자로 불렀을 것이 자명하다.

여행은 이렇게 마음을 너그럽고 풍요롭게 만드는 그런 요상한 것이다.

마지막 날. 떠나기 직전까지도 호텔 안에서 야자수 나무를 그렇게도 찍어댔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