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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epina Apr 21. 2023

질러놓으면 가게 된다.(괌 0325)

안 하던 짓도 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 그 둘째날

 첫째 날 밤. 

내일을 위해 크지도 않은 호텔 방에서 이리저리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중에 내 눈에 들어온 침대 위 모습.

저 하얀 거 수건 아니고 드레스 원피스

".... 어? 이게 뭐야?"

"니가 스타킹 빨러 들어가는 동안 꺼냈는데 니가 너무 빨리 나오더라고. 근데 못 알아차리더라? 아.. 얘가 정신이 없구나.. 했지."

 그렇다. 여행 기간 생일을 맞은 나를 위해 친구가 준비한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지팡이까지 풀 옵션(?)으로 들어가 있는 보석세트(!)와 드레스까지.

"원피스가 구겨지니까 저대로 둘 수 없어서 빨리 보여주고 걸어놔야 했어. 이거 풀 장착 해야 해."

손편지까지 있다. 엉엉. 그리고 받은 감동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정말로 저걸 전체 다 착용하고 뽐내야 했다.  한국 사람이 득시글 거리는 유명 선셋 식당에서.(예고편)

 다음 날 아침, 수영장으로 가는 전용 뷰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 무지개까지 만난다. 신이 난다. 신이 나!


그녀가 몇 년 전에 찜해두었다던 곳, 리티디안 비치.

친구가 유일하게 강력하고 가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했던 리티디안 비치. 그리하여 찾아보았던 반일 투어. 개인 사유지에다가 군사지역 근처라고 했다. 접근성이 조금 떨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산호가 많고, 물고기도 많고 스노클링 하기 좋은 곳이다. 대신 이안류가 있고 파도가 심한 날은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예약을 해도 당일에 얼마든지 취소될 수가 있었다. 심지어 투어라 일정이상 인원이 되지 않아도 못 간다고 했다. 

 "리티디안 요즘 계속 문 닫았다더라."

 "아직까지 연락 없는 거 보면 갈 수 있는 거겠지?" 

우리끼리는 열심히 고민하고 걱정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우리 차 말고도 떼거지(?)한 팀이 더 왔다. 

오랫동안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았던 탓인지 친구는 "와~! 너무 좋다"를 6만 번 정도 부르짖어 내 맘을 짠하게 만들었다.

 투어에는 스노클링 말고도 ATV 체험도 포함이었는데 우린 처음부터 그건 할 생각이 없어서 안 한다고 했다. 두 팀을 진두지휘했던 가이드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한국말을 웃기게 잘했는데(이상한 표현이지만 진짜 이랬음) 우리 보고 재밌는데 왜 안 하냐고 제발 한 번만 해보라고 애원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위험할 거 같다고 나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구사하며 방어에 나섰다. 미국 사람은 이상한 한국말로 설득하고 한국 사람은 이상한 영어를 하며 거절하는데 서로 알아듣는 환장의 창과 방패. 결국은 우리가 이겼다. 스노클링만 몸살 나게 하다가 밥 먹고 투어 종료하고 호텔 수영장에서 노느라 정신줄을 놓았다는 오후 스토리.


고급진 곳에서 웃음거리가 되어보자. 

씻고 단장을 한다. 거의 한 달 전쯤에 예약해 두었던 선셋 맛집으로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 2부(?) 첫 일정이다. 두짓타니 리조트에 있는 식당으로 20% 할인을 받기 위해 멤버십도 가입했고 예약을 위해 어플을 깔고 회원 가입 후 예약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이드 뷰는 확정이 아니고 서버 맘대로라 최대한 일찍 가는 게 좋다고 해서 5시 15분에 예약을 걸고 5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물론 예약할 때 일정 중에 생일이 있다는 말도 써두었다.(아직도 생일 아님 주의) 그리고 견뎌야 한다고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직사광선을. 아니나 다를까 직원이 물었다.

"지금 저 바깥 자리는 해가 몹시 강렬하여 너희 머리통을 익혀버릴지도 몰라. 그래도 앉을 거야?"

"응. 구워져도 괜찮아. 앉을게."

"진짜 괜찮지?"

"물론!"

이라고 했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견뎌야 해..... 왜냐하면 우리는 의지의 한국인. 내 눈을 바라봐. 주위를 둘러봐. 뷰 사이드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한국인. 점유율 90%

 한국 사람들이 많이 시킨다는 메뉴를 시키고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나름 고급졌는데 20% 할인 받으니까 크게 비싸지 않았음.

햇빛에 살갗을 30분 정도 내어주었더니 드디어 해가 뉘엿뉘엿 지며 구름에 조금 숨은 석양 사진을 건질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서 또 사진을 5천 장 정도 찍고, 동영상을 수십 개 찍었다. 한국사람 모두 Ctrl c+Ctrl v. 우리만 이런 게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만 했던 미션이 하나 남아 있었다. 나의 공주님 생일 미션. 그나마 덜 튀는 귀고리와 반지는 하고 나왔지만 왕관과 목걸이, 지팡이까지 들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한다고 했다. 그래. 저 석양을 배경으로. 한국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이곳에서. 나는 했다.(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당연히 한국 사람들은 안보는 척하면서 힐끔거리며 지들끼리 눈을 맞추며 웃었다. 

"생일이라서요, (생일 오늘 아님), 친구가 선물해서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라고 큰 소리로 변명하고 싶었다. "안 하면 친구가 서운해할 것 같아서요. 저는 배려심이 넘치는 게 문제거든요." 이렇게도 우기고 싶었다.

 자리를 옮겨 배경이 좋은 곳에서 풀 샷도 찍어야 한다고 했다. 갤러리아 면세점에서 친구가 맘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여 그곳에서도 2천 장 정도 찍었다. 한국여자 둘이 지나가며 너무 티 나게 웃었다. 근데 이상하다. 나도 이제 막 아무렇지 않아 졌다. 요상한 표정과 포즈도 취하기 시작하며 친구를 만족시켰다. 나는 분명히 내향적인 사람인데 사실은 관종인가, 또라인가 나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은 순간이었다.

처음이라 그래 며칠뒤엔 괜찮아져....(BGM 벌써 일년)

이번엔 응애응애 아기가 되어보자.

 괌에서만 사 와야 하는 특산품(?)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젤리캣 인형. 우리나라에선 아기들의 필수품, 애착인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게 뭔지 몰랐다가 쇼핑 공부를 하다가 어? 저거 많이 본 건데? 하다가 깨달았다. 절친께서 작년에 조그마한 열쇠고리형 인형을 국내에서 힘들게 구하다가 내 것까지 사준, 그 브랜드였다. 토끼 귀가 보드라워서 가방에 걸고 다니며 내가 귀를 만지작거리던(변태는 아님) 그 아이들 시리즈였다. 태교 여행으로 가도 사 오고, 아기 엄마들도 사 오고, 성인들도 심심찮게 사 온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직구로 구매해야 하는 데다가 구매할 수 있는 종류도 적고 비싸기 때문에 쓸어 담아 왔다는 블로그도 많이 목격했다.

'에이, 이 나이에 무슨 인형을... 아무리 싸도 계산해 보면 싼 게 아닌데?'

'침대에 인형 두 개나 있는데 무슨 인형을 또...' 싶으면서도 성인 여성들도 많이 사 오는 걸 보니까 괜히 안 사면 손해인가 싶었다.(이것은 무슨 논리인가.)

中사이즈 하나를 사 올까? 싶어 어제 슬쩍 둘러보았던 JP 스토어(여기서만 판매)에 들어갔는데 中사이즈는 생각보다 작다. 大사이즈는 가격이 확 뛰었다. 집는 손이 멈칫거린다. 

"살 거면 큰 걸 사야지. 안고 잘 거면 중은 너무 작잖아. 어차피 돈 쓰는 거면 큰 거 사. 큰 거!" 친구는 단호하게 조언했다.

"그... 그런가?" 큰 아이를 안아 촉감을 비교해보고 있는데,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그 앞에 선다. 아이가 다가오자 엄마는 큰 소리로 딱 잘라 말한다.

"이건, 아기들이 잘 때 가지고 노는 거야, 알았어? 응애응애 우는 아기들이 갖고 노는 거라고!"

이상하다. 딸한테 하는 말인데 나한테 말하는 것 같다. 아니다. 저 아줌마 딸한테 말하는 척하면서 나를 까는 것 같다. 흥흥.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결국 큰 아이를 샀다. 데리고 온 날 이렇게 공주세팅 시키고 기념사진도 찍어주었다.

매일 안고 살다 보니 왜 애착 인형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뒤끝 쩌는 나는 밥 먹다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생각날 때마다 이때 일을 다시 소환했다.

"아니, 그 아줌마 너무 나한테 대놓고 말하지 않았어? 응애응애 아기들이 가지고 노는 거라니. 키덜트도 모르나?"

"그 아줌마 말이야. 내가 응애응애 하는 애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돼?"

"그렇게는 안 보였나 보지." 친구는 깔깔대며 웃었다. 첫날 햄버거집 5% 할인 못 받은 걸 두고두고 말하는걸 이어, 얘가 원래 이렇게 뒤 끝이 긴 인간이었나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응애응애 아기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을 나는 아주 잘 데리고 살고 있다. 보통 인형은 유독 잠이 안 오는 날만 안곤 했는데 쟤는 데리고 온날부터 매일매일 안고 만지고 자는 것도 모자라 글 진도가 안 나가는 날은 친구가 준 저 보석 반지를 끼고 인형을 안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도 건다고 한다.

"토야, (1차원으로 지은 이름) 좋은 생각 없어? 나 진짜 오늘은 다 써야 해. 어? 어떻게 할까?"

정신이 나간 건 아니다. 정신이 좀 이상할 뿐이다.


꽉 찬, 빠듯한 3박 4일 일정 중 벌써 이틀이 지났다. 여태까진 그래도 설렁설렁했다. 내일은 아침부터 빡센 강행군이 예정되어 있다. 시간이 훅훅 뭉텅이로 지나가는 것 같다.

 길이 꽤 정돈되었다고  했는데도 리티디안 가는 길은 덜컹거렸고, 오늘도 여지없이 스콜은 내렸지만 안 하던 짓, 한국에서라면 절대 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과소비해 가며 우리는 여행자의 특권을 누렸다. 

여전히 사방천지에 한국말만 들리고 예상대로 물가는 비쌌지만 우리는 많이 웃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리티디안에서 힐링하던 시간. 외곽의 군사지역이라 로밍인 나와 유심인 친구 폰 모두 데이터가 터지지 않았다. 이에 파일로 들어있는 나의 노래 중 우리 추억의 노래를 하나 재생해 틀어놓으며 하늘을 보며 현재의 행복을 만끽했다. 친구가 동영상을 찍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자연스레 노래가 bgm이 되었다. 습관적으로 나는 노래 공간사이에 'god 짱!'을 내지르려다 참았는데, 다행히 잘 참았네. 지금 다시 보니 그때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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