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숙소 웨스틴은 괌 전체 호텔에서 그래도 조식이 괜찮은 편으로 이름나 있고 특히 한식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실제로 김, 김치, 한식 반찬이 있는 코너가 따로 있었는데 편식은 해도 의외로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나는(이상한 말 같지만 진짜다.) 그동안은 한식에 손을 안 댔다. 미역국도 종종 나온다고 했는데 이틀 동안 구경을 못했다. 하지만 생일에 크게 의미를 두지도, 미역국에는 더더욱 의미를 두지 않는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던 마지막 조식의 생일 아침! 미역국이 짠! 나타났다. 에헴! 그렇다면 생일 아침상을 먹어볼까.
미역국을 떠 오다 마침 잡채까지 나온 반찬들을 퍼다 모아 한식 한 차림을 해본다.
어떱니까. 미국에서 먹는 아침 생일상
수영복으로 환복 후, 수영장이 오전 10시 오픈이라(이 호텔의 가장 큰 단점이자 불만) 냅다 바다부터 가본다. 마지막 사진과 동영상을 100개 정도 찍고, 모래 노래도 하고, 모래로 친구가 생일 케이크도 만들어주고, 나는 나무막대기 촛불을 후후 불었다.
생일 인사들이 이곳저곳에서 날아든다. 바다를 보며,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서 생일 축하 문자를 천천히 곱씹는 것이 참 색다른 경험이다. 의미를 부여하면 또 큰 의미가 되는 것이구나.
진짜 진짜 마지막 음식
마지막 날 오전 일정을 물놀이로 변경하면서 아무래도 시간이 빠듯해 체크아웃을 한 시간 연장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하려고 전날 로비에 있던 한국인 직원에게 달려갔었다.
(보통은 가능여부를 미리 메일로 체크하는데 이번엔 연장할 필요가 없어서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호텔은 만실이 아닌 경우, 1시간 정도는 너그러이 연장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저기 혹시... 저희 체크아웃 시간 한 시간 연장해 주실 수 있나요?"
"몇 호시죠? 음.... 어? 1시까지로 연장되어 있는데 더 연장이 필요하신가요?"
"아.. 그래요? 아니요. 1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연장 요청 한 적은 없다. 왜 연장이 되어 있을까. 참말로 나는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있는겐가 ㅎㅎ
아무튼 오전 일정을 변경한 탓에 마지막 점심으로 가기로 했던 브런치 가게는 클로징 시간이 지나서 2안으로 후보에 있던 다른 팬케이크 집으로 갔다. 미국(?) 왔으니 요런 거 한 번은 먹어주고 가야쥬.
여기서도 카페에 있던 쿠폰을 썼다. 쿠폰+할인을 받았다. 팬케이크는 2장짜리 시켜야지 4장짜리 시키면 한국 사람은 큰일(?) 난다고 했는데 진짜다. 2장이 딱이다. 4장 먹으라고 하면 고문이다. 2장이 딱 적당하고 맛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공항 라운지에 가서 또 열심히 퍼먹을 예정이어서 배가 너무 부르면 곤란해지는 상황이었다. 나이 들면 점점 입맛이 없어진다고 하던데 아직 먹는걸 참 좋아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진심으로 들곤 한다. 세상엔 맛있는 게 너무 많으니까.(편식쟁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해본다. 안 먹는 게 많은 거지 적게 먹는 건 아니라서)
생각보다 이런 기억이 오래가는 법.
기내에서 잠을 못 자는 데다 늘 밤 비행기를 타고 타서 피곤에 쩔다가 오후 5시 출발행 4시간 비행을 하니 비행시간이 아주 수월하다. 오랜만에 장시간(?) 비행을 해서인지 친구는 지겨워 몸을 배배 꼰다. 너 그러면서 독일은 어떻게 갈래(친구 이모 독일 거주中, 미래 비행 계획) 혼(!)을 내면서 나는 난이도 下의 기내시간을 즐겨본다. 이런 비행이면 열두 번도 더 타지 룰루.
문제는 그래서 집에 오니 밤 도착. 씻고 짐 정리를 다 끝내니 새벽 3시쯤 됐던 것 같다. 그래도 오후 출근에 아직은 쓸만한 체력이 다행이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하면서 호텔에서 온 메일을 하나 받았다. 우리 호텔을 선택해 줘서 고맙고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 느낌이 어땠는지, 개선점은 없을지, 시간을 내어서 얘기해 주면 호텔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을 아주 길고 정성스럽게도 써서 보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리뷰를 써달라는 자동 메일은 많이 받아봤지만 개인적인 연락을 했던 고객에게 체크아웃 다음날 이렇게 장황한 메일을 써서 보낸 건. 아마도 사전에 이메일로 연락할 정도의 고객이라면, 그리고 그런(까다로울 수 있는) 고객이라면, 정말 진솔한 평가를 해주지 않을까 해서 보낸 게 아니었을지. 정말로 도움이 될만한 의견을 원하는 것 같은 진정성이 느껴져 나도 출근 준비하는 바쁜 와중에 솔직하게 써서 보냈다. 정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너희 호텔 직원들 참 좋았엉. 나 진짜 감동받았지 뭐야. 특히 나 생일 이벤트 해준 거 너무너무 고마웠어.
그리구 스타벅스 웰컴 드링크 쿠폰 준거도 신났단다. BUT.. 청소 시간이 좀 늦더라? 그리고 청소도 청결점수는 좀 부족했어. 그리고 욕실에 빨랫줄도 고쳐야겠더라. 우리 욕실 빨랫줄 고장 나있었거든.(빨랫줄 있다고 해서 안 챙겨갔단 말이야) 이왕이면 방에 간이 테이블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앙. 하지만 다음에 가게 된다면 또 갈게(언제 갈지 모름) 덕분에 잘 놀고와쏘.'
그랬더니 바로 칼 답이 왔다.
잊지 말기로 해. 이 약속.
좀... 감동이었다. 뻔한 공수표 같은 약속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호텔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고 애쓰는 모습이.
그게 어떤 것이든 진심을 다하는 자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진심이 느껴질 때, 나도 진심을 다하고 싶어 진다.
(뒷 이야기인데, 괌 태풍 때 전기와 물, 엘리베이터가 가장 빨리 정상화된 것도 이 호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에도 이곳을 이용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시 한번 괌의 빠른 복구를 기원한다.)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것들.
가도 가도 여행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하고 또 새로운 것을 알려준다.
갔던 곳을 가도 다른 마음,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고, 같은 것을 봐도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친구가 소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회를 안 먹는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친구가 생각보다 적게 먹는다는 것도, 한식 러버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유재석 말고 누가 여행 와서 호텔에서 운동을 해? 했는데 매일매일 한 시간씩 빼놓지 않고 운동하러 가는 사람이 내 친구라는 사실이 신기했고, (내 기준에서 너무) 힘든 일을 하면서 여전히 10대 소녀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그래도 참 다행스러웠다.
아마 친구도 그랬을 것이다.
"너 탄산 좋아하는구나?"라고 물어왔을 때,
"어. 나 그래서 집에 늘 탄산이 있어. 최대한 적게 먹으려고 평소에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서 안 먹으려고 노력하는 거고. 이렇게 나오면 고삐가 풀려서 계속 먹는 거야." 고백을 했던 것처럼.
자주 볼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어, 그래서 그동안 서로의 바뀐 모습을 모르고 지냈던 시간을 3박 4일의 여행은 이렇게 단숨에 벌충해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