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놀았을 뿐인데. 벌써 넷째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엄마가 비보를 알려왔다. 벼락과 천둥이 쳤다는 거다.(잠귀 밝은 엄마)
커튼을 쳤더니 비가 온다. 주룩주룩. 아... 망했다. 오늘의 오전 일정은 수영장이었단 말이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계속 머리를 굴린다. 일정을 어케 변경하지...? 복장, 동선, 샤워.. 모든 것들이 다 엉켜버렸다. 그런데 아침을 먹고 나니 비가 조금 잠잠해진 것 같다. 수영장 동향은 어떠한가 한번 가본다. 몇몇 사람들이 수영장에 있긴 하다. 그래도 결심을 못한 채로 일단 방으로 올라온다.
어쩌지...? 어쩔까...? 엄마는 얼마 전 큰맘 먹고 수영복을 드디어 샀지만, 또 얼마 전 발톱이 빠져서 회복되는 중이라 이번에도 수영장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너 갈 거면 갔다 오라고 한다. 본인은 방에서 쉬겠다고 한다. 그래! 그럼 마음먹었으니 다녀올게! 혹시 너무 추우면 금방 나올게. 하며
수영장은 흐린 날이 제격이었군요.
수영장에 다시 갔을 때,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기온도 높지 않다. 들어가자마자 나올 각오를 하고 수영장 입수. 그때의 심정을 엄마에게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호텔 수영장 수없이 가봤지만 이렇게 물이 차갑지 않은 곳은 처음이야. 완전 미온수였어."
해가 나지 않아 선크림도 바르지 않았는데 그래서 뜨겁지 않았고 수영장 물은 차갑지 않았으니 이보다 좋은 신선놀음이 없었다. 혼자라 조금 심심하긴 했지만 옆에서 함께 노는 수영장 숙박객들도 내 친구라 생각하고(싶었지만 맘처럼 안 됨) 조용히 놀면서 아.. 이 정도 온도면 밤 수영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 밤 일정은 어제 이미 하지 않았던가. 내 생애 첫 밤수영을 계획하면서 방으로 올라온다.
자, 그럼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가보자.
칠리크랩만 먹으면 서운하니까. 누가? 내가!
일부러 점심을 먹는 일정 하나를 위해 뉴턴 푸드라는 호커센터에 왔다.
싱가포르는 칠리크랩이 유명하지만 꽤 고가이다. 그래서 가격이 부담되는 사람들은 퀄리티나 서비스는 조금 떨어져도 호커센터에 와서 먹기도 하는데 나는 호커센터도 가고 정식(?) 식당도 가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칠리크랩 말고 블랙페퍼도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매운 걸 싫어하거나 칠리크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블랙페퍼가 더 맛있다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 비싼 식당에서 정식으로 칠리크랩을 먹기로 하고 호커센터에서는 블랙페퍼를 한번 먹어보자가 나의 '먹어볼 결심'이었다. 그러니까 돈도 없는 주제에... 결국 둘 다 먹기로 한 것이다. (항공료 안 쓰고 마일리지로 왔잖아.. 의 명분을 반복하며)
아무리 지붕이 있고, 선풍기가 돌아가도 실내가 아니라서 덥고 비둘기들도 많아서 별로였다는 후기도 적잖이 있었지만 우리는 더위에 강하고, 비둘기보단 내가 크니까(응?) 괜찮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비둘기 별로 없어서 다행)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27번 가게와 31번 가게가 가장 유명한데(아예 그냥 한글 메뉴판, 한글 간판이 있음) 나는 그중 31번 집을 미리 찜해두었다. 왜냐하면 똑같은 세트 메뉴인데 6 SGD 더 싸서. 추정컨데.. 물가가 오르면서 27번 집은 이미 가격을 올렸고, 31번 집은 아직 올리기 전이었던 거 같다. (이 주장이 근거 있는 이유는 2018, 2021년, 2024년까지.. 내 싱가포르 여행자료의 업데이트 상황을 보면 금액이 계속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 죽자’라는 SET1 메뉴는(내가 지어낸 거 아니고 진짜 이게 세트 이름임) 칠리 OR 블랙페퍼 중 선택
1마리+시리얼새우+볶음밥+번 이렇게 나온다. 번은 무한 리필이라고 들었지만 리필을 할 수가 없다. 이미 세트구성의 볶음밥 양이 많기 때문이다. 후기를 보고 갔는데도 양이 많았다. 남겼다. 슬펐다.
싱가포르는 라임주스지! 나는 이번에도 라임주스를 시켰고 엄마는 언제 어디서나 곧 죽어도 망고주스 파라 그렇게 시켜 먹고 77-78 SGD 정도 나왔는데 와, 가성비 있게 잘 먹었다 생각했다. 한국 돈으로 8만 원 가량인데 정신이 나갔다. 근데 싱가포르 가보세요. 진짜 비싼 거 아닙니다. 여행은 즐겁지만 저기서 살 수는 없어요.
싼 건 다 여기 있소. 차이나타운
점심을 먹고 오후 일정인 차이나타운으로 향한다.
싱가포르에 와서 웬 차이나타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관광지 중에 한 곳이다. 왜냐하면... 물가가 싸기 때문이다. (비교적) 그래서 기념품이나 쇼핑, 과일 구매 등을 차이나타운에서 많이 한다. 14년 전에도 오긴 했었는데 뭘 사질 않아서 그런지 큰 기억은 없다. 아... 망고스틴을 여기서 발견하고 사서 신나 하긴 했었지.
마사지도 차이나타운이 그래도 비싸지 않은 편이라고 해서 마사지 샵들이 모여있는 피플스파크라는 곳에 도착해서 30분 발마사지를 예약했다. 원래는 망고빙수집을 가려고 했는데 아직 배가 안 꺼져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피플스 파크 한 바퀴를 돌고(옛날 ST. 쇼핑몰이라 볼 건 없음) 30분 발마사지를 받은 후에 쇼핑몰 내에서 오렌지 주스 기계를 발견하고 또 한잔씩 한다.(이건 안 먹으면 서운해)
차이나타운 메인 쇼핑길로 나왔더니 여기 사람들 다 있다. 딱히 살건 없어도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려 본다.
기웃거리던 엄마가 손거울을 집어든다. 1개 1 SGD(1020원 정도) 면 괜찮긴 하다. 내가 쓸 것도 아닌데 나도 디자인 고르기에 참견해 주고 과일로드로 간다. 엄마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두리안에 도전해 본다. 두리안 불호자가 주변에 훨씬 많은데 나는 딱히 불호는 아니다. 냄새가 날 뿐. 그렇다고 비싼(두리안은 비싼 과일) 두리안을 일부러 먹을 정도로 호는 또 아니다. 두리안 가게들은 아예 먹을 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 먹었던 두리안에 비해 냄새가 강하지 않았다. 우리는 딱 두쪽짜리를 구매했는데 앞에 앉아있던 중화권 가족들은 통으로 몇 개나 사서 먹고 또 먹더라. 부자라고 생각했다. ㅋㅋㅋㅋ 먹고 내려가는 길에 망고스틴 한 망도 샀다. 이제 우리나라 기후가 바뀌고 있어서 망고나 망고스틴도 곧 재배될지 모른다는 무서운 말이 떠돌던데 그럼 좀 싸게 살 수 있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철없음)
라우파삿에서 술 안 먹고 새우만 먹는 사람들
차이나타운에서 호텔까지는 한 정거장이고 도보로 8분이었는데 짐도 있고 해서 그냥 지하철을 탔다.(마지막 날 알았는데 지하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보다 걷는 게 더 짧은 거리) 숙소에서 한 타임 쉬고 저녁 먹으러 가기로 했다.
오늘의 저녁은 라우파삿 사테거리.
빌딩숲 사이의 거리가 저녁이 되면 사테 포장마차 거리로 변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의도 건물 사이에 깔리는 좌판이라고 하면 될까. 여행 방송에 꽤 많이 나왔다. 특히 7,8번 집은 한국에서 너무 유명해서 사람이 어마 무시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음식 나오는데 오래 걸리고 너무 정신없어서 비추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이전에 가보지 않은 곳이라 가보기로 한다. 대신 사람이 몰리기 전에 좀 일찍 도착하는 일정을 짰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비가 왔던 모양이다. 테이블과 의자가 좀 젖어 있다. 그래서인지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한국 사람만?) 많이 간다던 7,8번 집으로 나도 간다. 왜냐하면 이 집은 새우 껍질을 까준다고 했다. 우리는 새우 사테만 먹을 거라서 이 부분은 놓칠 수 없는 강점이다. 역시나 한국 사람만 줄을 서있다. 주문받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주문지를 작성해서 주면 진동벨을 준다. 그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진동벨을 주며) 삐삐삐삐, 컴백"
내 앞 앞, 사람한테 말했는데 줄 서 있는 한국 사람 모두 다 알아듣고 같이 크게 웃었다.
그래, '이 진동벨이 울리면 다시 돌아와서 음식을 가져가렴'이라는 문장을 굳이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바디랭귀지, 의성어, 의태어가 분명한 의사소통 방법임엔 틀림없다.
일찍 가서 그런지 음식 나오는데 오래 걸리다더니 한국 푸드코트 수준으로 빨리 나왔다. (많이 안 시켜일 수도) 해지면 맥주 한잔과 더불어 술판?을 벌이는 곳인데 술을 안 마시는 우리는 해도 지기 전에 금방 먹고 일어났다. (심지어 맥주는 꽤 비싸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 안 됐다...라는 오지라퍼적인 생각 발동)
아직도 안 해 본 게 있었네.
원래라면 오늘의 야경 일정은 리버보트 타기였으나 어제 해치웠기 때문에 오늘은 우리 동네 클락키 산책을 하며 돌아보기로 한다.
첫 자유여행으로 왔을 때 이 주변 야경과 특유의 두근거리게 하는 분위기를 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이곳을 숙소지로 정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아마도 어린 나이와 첫 자유여행이라는 그때의 특수성이 주는 요인도 한몫했겠지만.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고 조금 이른 시간에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또 수영장으로 향한다.(누가 들으면 수영선수인 줄...) 확실히 아침보다는 물이 조금 차가웠지만 괜찮았다. 아침보다 사람도 많았다. 밤 수영장 구경 해본 적은 있지만 입수는 처음이었는데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혼자인 게 조금은 심심했지만 고수 혼여행객처럼 느긋하게(그래봤자 30분 놀았음) 즐겼다.
다음 여행지인 방콕에서도 밤 수영을 해 볼까 머리를 굴린다.(여행지에서 다음 여행지 계획 하는 거 나만 그런 거 아니죠?)
평소 동남아 여행보다 1박을 더 잡고 온 5박 7일 일정인데 이제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달리는 사람의 길은 짧아진다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생각해 본다.(물리 1도 모름. 아무 말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