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 안배를 위해 주요 일정들을 앞쪽에 몰아두었다. 남은 이틀은 조금 설렁설렁해도 된다. 내 그 마음을 알아주었던? 걸까. 날씨가 내 맘 같지 않기 시작한다.
물론 어제도 아침부터 비가 퍼부었지만 그래도 아침에만 오고 일정 중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오늘부터는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물론 나라 특성상 언제든 스콜성 비가 내릴 수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비를 몹시 싫어하기에 우기를 피해서 왔건만 이러는 건 곤란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전 세계의 날씨가 기존 계절 기후에 부합하지 않고 건기/우기 구분도 불분명해지는 것 같다. 지구가 많이 아파하는 신호다. 걱정이다.(숙연하게 시작)
추억의 장소에 왔으니 쇼핑을 해야죠?!
오전 첫 일정. 부기스로 간다. 부기스는 동네 이름인데 차이나타운과 함께 저렴한 물가로 쇼핑할 수 있는 '주머니 털리는 곳' 양대산맥이다. 과거 내 첫 여행의 숙소가 있었던 지역이기도 했는데 가보니까 생각났다.
"저쪽에 호텔이 있어서 이렇게 와서 이 길로 와서 지하철을 타러 왔던 것 같아. 그땐 뭘 몰라서 숙소에서 지하철역까지 이만큼 걸어야 하는 데로 잡았지.(지금 호텔은 바로 앞이 지하철 역) 20대여서 가능했나 봐." 더듬거리며 기억을 쥐어 짜냈다. 방향치인 내가 그런 기억은 하고 있는 게 엄마는 신기하다 했다.
"그리고 저 앞에 이민호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2010년이었는데 이민호 사진이 대형 건물에 걸려 있었고 숙소를 가기 위해 매번 지나다녔던 부기스 골목에선 노바디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한류의 힘은 아무런 기반 없이 생긴 게 아니다.(갑자기 임진모 빙의)
그때와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당신엔 마냥 재래시장 같았던 부기스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깔끔한 쇼핑구역으로 탈바꿈했고 근처에 개방형 쇼핑몰까지 있어 완벽한 쇼핑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부기스정션이라는 쇼핑몰에서 야쿤카야 토스트로 점심을 먹은 후, 크지도 않은 쇼핑구역을 몇 번 왕복하면서 계획에 있던 품목+없던 품목 다 끌어모아 샀더니 미리 준비해 온 타포린 백이 터져나갈 듯했다.
이제 오전 일정을 끝냈으니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성당과 차임스로 걸어가 볼까? 하는데 비가 온다. 꽤 온다.
비가 오면 에너지가 사라져요
그냥 큰 길가를 따라 쭉 걷는 10분이 왜 이다지 멀게 느껴지는지. 더우면 더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그쪽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한 손에 우산을 드는 순간 체력이 떨어진다. 마음도 떨어진다.(일조량에 지배당하는 자)
보통의 관광객들은 굳이 들르지 않는 굿 셰퍼드 성당이란 곳에 왔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 가톨릭 대성당인데 굿셰퍼드(선한 목자)라는 성당의 이름은 조선에서 기하 박해 때 순교한 성 엥베르 신부(프랑스 성직자로 조선에서 전도한 인물)의 편지(한국인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유언을 남김)에서 유래되었기에 우리나라와 연관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만 천주교 신자 흉내를 내본다.) 피에타상도 있고 내부가 생각보다 컸다. 아무 시간(?)이 아니라서 사람은 없었고 조용히 구경하고 나와서 바로 앞에 차임스라는 곳엘 갔다.
일반 관광객들은 잘 안 가요. 신자분들은 한번 가보십시오..
차임스는 131년간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을 리모델링해서 현재는 식당, 카페, 바가 입점한 감성적인 곳인데 저녁-밤 시간에 가야 분위기를 탈(?) 수 있다. 하지만 무려 5박 7일 일정임에도 밤에 차임스를 올 수 있는 시간은 나지 않아서 낮에 왔다. 대신 예쁜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실 예정으로 여러 군데 카페를 후보지에 넣고 검색해서 왔는데 그치지 않는 비+짐+떨어지는 에너지로 인해 카페에 들어갈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엄마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이하 동문. 그렇게 차임스는 스캔만 하고 사진만 찍은 채로 숙소로 일단 복귀한다.
숙소 가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컵라면 먹기.
클라이막스에도 비 오는 건 반칙이지!
1개씩 싸 온 비상식량 컵라면은 바로 이 타임에 먹기 위함이었다.
오늘 저녁은 플러튼 호텔의 꼭대기 루프탑에서 아름다운 마리나베이샌즈 야경을 감상하며 고급지게 먹을 예정이었다. 고급지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러니까 비싸다는 말이다. 비싼 싱가포르에서도 더 비싸다는 말이다. 배 터지게 시키면 파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허기지지 않게 배를 채우기로 한다. 점심도 토스트로 좀 약하게? 먹었기 때문에 토스트-컵라면-비싼 저녁은 아주 황금비율?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JJJJ인 나의 계획안에 들어 있었다.
다행히 숙소로 돌아오니 비는 잦아든 듯했다. 라면과 과일을 세트로 때리고 좀 휴식을 취한다. 드레스코드도 맞춰 입었기 때문에 갈 때는 택시를 불러(무슨 상관?) 호텔 앞에 도착한다.
싱가포르 높은 지대에서 야경 볼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나는 스펙트라 쇼의 뒷면인 레이저 쇼를 볼 수 있다는 여기 랜턴바를 택했고 예매가능한 3주 전 현지시간 타이밍에 맞추어 예약을 넣었다.(수십 년간 티켓팅에 길들여진 티켓터의 능력 발휘) 그래서 기대가 꽤 컸던 곳인데, 좋아 보이는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앉아서 메뉴판을 펼치니까 비가 온다.... 아악... 이러지 마.. 오다 말 거지?라는 내 바람과 달리 빗줄기가 세진다. 직원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제가 시간까지 재며 예약한 건 이 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자연재해? 니까 어쩔 수 없다. 일단 주문을 넣어놓고 앞쪽으로 가서 사진을 찍어가며 혹시나 비가 그치지 않을까 계속 손을 내밀어 보지만 어림없다는 빗줄기다. 다행히 외부 테이블을 다 막아놔서 손님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사진 찍기 어렵거나 번잡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좀 아쉽다. '엄마 생일이어요. 야경도 보고, 스펙트라 쇼도 볼 거니까 좋은 자리 줘요. 헤헤헤' 예약사항 비고란(!)에 애교까지 부리며 힘준? 일정이었는데...
사진만 보면 완벽했는데 말이죠.
아쉬우니까 남은 감자튀김을 싸달라고 하고(응?) 계산하고 나왔더니 비가 그쳤다. 약간 약 오르기도 하는데 비가 그치면 머라이언 공원 야경을 보러 가기로 한 거라서 그래, 하나라도 할 수 있으면 됐지, 지금이라도 그친 게 어디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뇌에 갈아 끼우며 도보 3분인 머라이언 공원으로 향한다.
너 밤에 쫌 더 이쁘더라?
낮과 밤의 머라이언 공원 분위기가 아주 다르니 둘 다 방문하는 게 좋다는 걸 들었으면서도 14년 전에도 밤엔 올 수가 없었다.(밤에 할게 몰려있는 싱가포르) 슬금슬금 걸어가며 좀 전에 랜턴바에서 실컷 보고 실컷 배경으로 사진 찍었던 마리나베이 샌즈 앞에서 또 사진을 찍어댄다. (느낌이 또 다르거등요.) 머라이언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진다. 옆 사람이 같이 안 나오게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이지만 그래도 오길 잘했다. 진짜 낮과 밤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사람이 조금만 더 적었으면 여유로운 감정에 취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나도 다른 사람들에겐 걸리적거리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라 우산 안 들고 사진 찍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한다. 이게 뭐라고 마음이 흐느적거릴까? 하긴 나는 서울 야경에도 마음이 자주 휘청이는 사람이다. 집 밖을 잘 안 나가서 서울 야경을 볼 일이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서도(돈이 없어서 택시 안 탄게 아니구요...싱가포르는 택시나 그랩을 아무 데서나 못 타요... 그거 찾고 기다리는 게 더 귀찮아서..) 아쉬운 마음에 반짝반짝 빛나는 호텔 앞에서도 사진을 찍어본다. 잠을 잘 수 있는 마지막 밤. 5개월 전부터 준비했던 싱가포르의 단 하루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