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sepina Oct 06. 2024

14년 만에 만난 첫사랑-싱가포르(6)

어제 도착한 것 같은데 왜 마지막 날?

 진짜 진짜 마지막 날 아침. 커튼을 열었는데 역시나 또 흐린 아침. 비만 오지 말아라, 하면서 식당으로 내려간다. 어김없이 오늘도 식당에서 텀블러에 얼음을 받아 왔고 수영복으로 환복 한다. 늘 수영복은 2개씩 가지고 다니는데 한 번씩 입어봐야 하지 않겠어요?(사진도 잘 안 찍으면서 왜 이러는지 모름) 오늘은 엄마도 수영장에 따라나선다. 내 사진 찍어준다고 하는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키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마법의 사진을 몇 번 보고 난 후로 이제 놀라지도 않게 되었으니까. 하핫.


 밥도 먹고 관광도 했는데 비 온 것만 생각나요.

 전 날 이미 체크아웃 시간을 한 시간 연장 요청해 둔 상태였다.(극 성수기, 만실이 아니라면 대부분 1시간 정도는 흔쾌히 OK 해준다.) 씻고 짐을 싸고 호텔에 짐을 맡기고 첫 일정을 시작한다.

 사실 마지막 날은 꽉 짜인 그럴듯한 계획은 세워 놓지 않았다. 더워서 일정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는 후기를 워낙 많이 봤기에 마지막 저녁만 예약하고 못한 일정을 채우려고 비워두었다. 근데 대부분 다 했다.(그다지 덥지 않았어요. 한국이 젤루 더움) 며칠 전 받았던 발 마사지 가게에 연락해서 1시간짜리 마사지 예약을 일단 해둔다.

 우선 차이나타운을 다 보지 못했으니 차이나타운을 다시 가기로 한다. 도보로 8분 나오니까 오늘은 가볍게 걸어서 가보자 했는데 호텔 나오자마자 비가 온다. 이런... 그리하여 또 지하철을 탄다. (싱가포르는 교통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답니다?)

 점심때가 되었으므로 동방미식이라는 식당을 찾아간다. 가성비로 최고라고 했고 메뉴판이 백과사전이니 미리 메뉴를 정해놓고 가라고 했다. 꿔바로우가 시그니처 메뉴라고 했는데 엄마랑 나는 둘 다 좋아하진 않는 메뉴라 다른 추천메뉴들 중에 시켰다. 아는 맛인데 맛있긴 했다. 좀 더 다양한 메뉴를 먹어보고 싶었지만 2인분 위는 한계가 있으므로 적당히 먹고 계산하고 나왔다. 비가 그쳐있길 바라면서.

  아닌데 아닌데? 안 그쳤지롱? 비가 계속 온다. 터덜터덜 우산을 쓰고 걸으며 불아사라는 절을 찾는다. 둘 다 불교신자도 아닌데 왜 왔나. 유명하다고 하니까 왔다. 우린 관광객이니까. 며칠 전엔 지나가다 위치만 확인했는데 오늘은 내부로 들어가기로 한다. 들어가기 전에 정면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우산 한번 날아갈 뻔했다. 마지막 날씨 이러지 마세요.

 불아사라는 뜻은 부처님의 치아라는 뜻인데 그 치아가 4층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2층엔 다양한 공예품, 3층은 불교 유물이 있다고 공부하고 갔는데 못 갔다. 막은 건지 못 찾은 건지 계단이 없었다. 올라가는 사람도 없더라. 궁금했지만 비가 오니까 만사 귀찮았다. 그냥 나왔다. 불교 신자가 아니라서 마음이 부족한 게 아니라 성당이어도 그랬을 거다. 비가 오면 뺏어간 주체가 없는데 나는 에너지를 뺏긴다.

그래도 사진은 찍어아쥬. 불아사 외부/내부

 방향치는 멍청비용이 들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또 어떠하리

시간에 맞추어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의자 앞 TV에는 CNN 방송이 나온다. 한국 뉴스도 나온다. 비가 엄청 왔다고 했다. 며칠 동안 자국 뉴스를 보지도 않았는데(검색한 거라곤 내일의 싱가포르 날씨) 완전 집중해서 뉴스를 보면서 엄마와 "비가 엄청 왔나 봐?" "그래서 아빠가 집에 못 간 건가?" 꽤나 심각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더니 마사지해 주는 오빠가(오빠 아니겠지만 그냥 다 오빠) 웃는다. 자동으로 국적 노출

 마사지받고 왔더니 비가 그쳤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다. 저녁 식사 장소가 야외인데 양심이 있으면 지금은 비가 그쳐야 옳지? 드디어! 우리 숙소 동네까지 걸어가 보기로 한다. 걷는 중간에 오렌지 주스 자판기가 나와서 오늘도 출첵! 하고 진짜 쪼끔 걸었는데 아는 건물이 나왔다.

 "이렇게 가까운데 우리 그동안 지하철 타고 다닌 거야? " 허탈하다. 깔깔

하지만... 처음엔 짐이 있었고... 그다음엔 비가 왔고... 숙소 앞이 바로 지하철 역이었고... 열심히 이유를 갖다 댄다. 게다가 길 찾기 능력이 제로인 나는 엄마와 헤매는 게 두려웠다. (막상 헤맬 것도 없는 길이었지만)

 정작 그렇게 길을 오래 헤맨 적은 없는데 두려움이 너무 커서 자신감이 상실되는 것 같다. (평소에도 아는 길로만 다닙니다.) 그래도 이런 능력으로 여행을 잘도 다니는 것 보면 대단한 것 같고. 하하하.(급 자기애 흘러넘침)

 저녁 시간 전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어서 숙소 앞 센트럴 쇼핑몰로 올라간다. 딱히 살게 없어도 어딘가 매장에 들어가게 되면 시간이 순삭이다. 다이소를 두어 바퀴 돌고 아빠에게 전화를 한통하고 나니 벌써 예약해 둔 저녁타임이다. 대망의 칠리크랩! 숙소에서 3분 컷! 점보레스토랑으로 간다.


 여전히(?) 살아서 다시 올 수 있었으니, 그걸로 행복해

거의 한 달 전에 예약을 시도했는데 원하는 시간 6시 예약이 불가능했다. 이럴 리가! 몇 번을 새로고침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선선함+석양을 보면서 먹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5시 30분을 예약했다. 결과적으로 저녁 시간 전까지 시간이 비었고, 저녁 먹은 후엔 좀 더 여유로운 출국 준비를 할 수 있어서 괜찮은 시간이었다.(이래서 일희일비를 하면 안 됨. 하지만 잘 안됨)

 요즘엔 칠리크랩으로 유명한 식당이 워낙 많아지는 데다  이곳 점보식당이 예전 같지 않다는 비추 후기도 적잖게 올라오고 있었지만 숙소 진짜 진짜 바로 옆인 데다 엄마는 처음 먹는 칠리크랩이니 그래도 클래식은 영원하다! 는 명제를 믿고 예약했다. 비싼 건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날 저녁 제대로 된 칠리크랩을 먹으려면 이 정도는 먹어줘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요즘 뜬다는 칠리크랩집은 더 비싼 곳이 많았다.(실제로 내 최애가 싱가포르 칠리크랩집을 소개한 적 있는데 내가 싱가포르 간다고 하니 우리 팬이 '그 칠리 크랩집 가시나요?' 하길래, '아니요. 거긴 너무 비싸서 못 갑니다.'라고 했다. -실사구시 실학파 팬-)

 예약확인증을 내고 자리를 안내받았다. 가장 바깥쪽 야외 석이었다. 아직 햇빛은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고 메뉴판은 볼 것도 없이(그래도 보고 확인함) 칠리크랩, 그리고 원하는 조리법 선택, 시리얼 새우, 흰쌀밥, (볶음밥은 양이 너무 많다고 하여), 메뉴판엔 없지만 말하면 준다는 번 4개와 콜라를 시켰다.(이거시 점보식당에서 한국인이 주문하는 매뉴얼입니다. +a 인원에 따라 몇 가지 다른 후보도 있음.)

 비추 의견 중 하나는 '너무 달다'가 있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단 거 좋아하는 사람) 엄마는 맵찔이인데 엄마가 못 먹을 정도로 칠리도 아니었다. 칠리크랩은 어떻게 먹어도 예쁘게 먹을 순 없다. 그래도 여긴 비싼 집이라 그런지 물티슈와 비닐장갑, 앞치마까지 모두 무료제공이었고(그래도 한번 더 확인함. 싱가포르는 자동 세팅되어 있는 물티슈는 사용하면 모두 유료 결제 됩니다.) 비싸서 그런지 확실히 며칠 전 먹었던 페퍼크랩집보다 게도 실하고 번도 맛있었다.(비싼데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비싼데 맛있어요. 맛있는데 비싸요.

 생각난 김에 14년 전 이곳에서 저녁을 먹었던 사진을 찾아본다. 미리 예약했지만 막상 먹기 시작할 때 비가 와서 엄청 좋은 자리에서 테이블을 옮겨 화장실 앞처럼 생긴 입구에서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나랑 싱가포르 날씨 궁합이 안 맞는 건가... 쓰다가 깨달음) 그 비 오기 전에 좋은 자리에 앉아 행복해하던 사진을 꺼내보았다. 그리고 엄마가 방금 은 사진을 바라본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인데 사람이 다르다? 늙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행복하니 되었다.(라고 생각? 다짐? 했다.)


 여행은 공항도 재밌다. 아, 돈을 써서 인가?

다 먹고 계산한 후(계획 예산과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희열 느낌. 문과임) 노을이 막 내려 앉을랑 말랑한 식당 앞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호텔 앞으로 가서 호텔과도 몇 장 찍는다. 비싼 호텔은 그만한 값을 한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해 준 만족스러운 호텔이었다.(하지만 싱가포르에선 비싼 호텔이 아니었음. 나에게 비싼 호텔)

 미리 알아둔 비밀 통로(룸 키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수영장 샤워실로 진입! 한다. 좋은 호텔의 장점 중 하나는 체크아웃 후에도 샤워실을 이용할 수 있는 것. 미리 다 알아놨고(J입니다. 1) 별도 예약을 해야 되느냐고 물었었고(J입니다. 2) 샤워실에 어떤 용품이 있는지도 조사했지만(J입니다. 3)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해서 수영장을 이용할 때 미리 들러서 어떤 구조로 생겼는지, 어떤 용품이 있는지 봐둔 상태였다.(JJJJ4- 이렇게 사는 거 피곤하냐고 묻지 마세요. 이렇게 안 살면 괴로운 J입니다.-)

 저녁 시간이 30분 당겨진 관계로 여유 있게 샤워를 끝내고 짐을 찾고 택시를 불렀다.

수속도 1분 컷.(거짓말 포함). 자동 출입국으로 인해 빠른 출국 심사 끝내고 면세구역까지 오는데 10분 컷(과장 포함)

 항상 인천공항과 상위 랭크를 다툴 만큼 시설 좋은 창이공항. 대한항공이 이용하는 4 터미널은 부대시설이 기존 터미널보다 다양하진 않아도 이모저모 예쁘게 잘 꾸며져 있다. 대기 의자도 편해서 라운지보다 더 편하다고 하는데 말 다 했지.(그래도 나는 라운지 갑니다.)

아늑한 창이공항 면세점

 원래 면세점에서 뭘 사는 편이 아닌데 '찰스 앤 키스' 가방과 신발이 한국보다 꽤나 저렴해서 몇 년 전 싱가포르 사전 조사땐 가방 하나 살까 했었지만 이런저런 가방이 너무 많은 데다 나이 들수록 물욕은 떨어져서 엄마한테 이런 브랜드가 있다고 소개만 했는데..."그래? 가볼까?" 하더니 엄마 가방 하나 구매.

 내가 고작(?) 사려 던 건 '뱅가완 솔로'라는 쿠키. 사실  호불호가 강한 쿠키라고 해서 별로 관심 없는데 호인 사람들 반응이 엄청나서 나도 한 케이스 사고자 했다. 그런데 워낙 종류별 맛이 다양한데 시식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냥 시그니처를 사 올까 하고 쿠키가게에 들어갔는데 여긴 시식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근데 이거 저거 먹다 보니 그 맛이 그 맛 같다. 남아있는 현금을 정리해야 해서,

 "나 현금이랑 카드 섞어 계산해도 돼?"라고 물었더니 친절한 직원이 "그럼 그럼"이라고 해줘서 감동받아 계산에 정신 빼는 통에 나중에 생각났다. 창이공항 어플 다운 받아서  바코드 내밀면 쿠키 할인 해준다는 사실을. 그거 때문에 앱 가입한 거였는데...(J는 멍충비용이 발생하면 뒤끝이 쩝니다...지금도 잊지 않고 그 일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라운지에 가서 더 들어갈 자리가 없는데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꾸역꾸역 밀어 넣고 비행기 탑승했더니 밤 10시에 또 저녁?을 준다. 비즈니스는 진짜 또 임금님 수라상처럼 주네요. 안 먹으면 나중에 계속 생각날 거 같으니까 또또 먹는다. 이제 다 나왔나요? 저, 그럼 이제 좀 자도 될까요? 처음으로 좌석을 180도 젖혀 누워본다. 올 때는 신나서 영화 보고 먹느라 눕진 않았으니까. 와.. 진짜 침대처럼 누울 수 있군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잠이 푹 들진 않았다. 역시 내가 비행기에서 못 자는 건 좌석 탓이 아닌 걸로 판명.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

  이렇게 2월에 항공권 예매를 시작으로 한 7월 싱가포르 여행이 끝났다.

14년 전에 자유여행으로는 첫 경험이었던 곳. 그 후로 2018년부터 내내 재방을 노리다 미루고 미뤄져 이제야 다시 찾게 된 곳. 당연하게도 많은 것들이 변하기도 했고, 그래서 조금은 씁쓸하고 아쉬운 점들이 있었지만 14년이란 시간을 생각하면 그대로 존재해 주는 것들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게 기적 같은 일이기도 했다.

 사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런던이었으나 '마일리지 비즈니스로 탑승하는 싱가포르'로 목적지가 변경된 것 또한 결국은 원래 정해져 있었던 내 인생의 올해 개요가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그랬기에 '런던행'에서 아낀 비용으로 다음 여행지에서 가족들에게 플렉스 서프라이즈를 계획할 수 있었으니.(딱히 사주 믿고 그런 사람은 아니고 그냥 합리화+정신승리 잘하는 인간유형)

 그러니 다 좋았고. 다 괜찮았고, 다 옳다.(해피엔딩이어야 뒤가 안 찝찝함)

 모든 여행은 즐겁다. 네팔이건 부산이건, 비행기건 버스건,  그리고 누구와 함께이건 여행은 즐겁다. 그래, 여행은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거야. '살까 말까 망설이는 물건이 있으면 사지 말아야 하고, 갈까 말까 망설이는 여행이 있으면 가야 한다'라는 말은 언제나 명언이다.

-박혜란, '오십이 된 너에게'中-
매거진의 이전글 14년 만에 만난 첫사랑-싱가포르(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