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혹하지 않으려는 연습
저 사람은 성실함과 책임감으로만 만들어진 사람 같다고 생각했던 나의 지인은 으레 나쁜 상사와 회사가 그러하듯, 그런 점을 이용 당해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다. 도대체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하는지, 언제쯤 야근은 안 하는지, 휴일에도 계속 출근이면 언제 쉬는 건지 들어도 믿기지 않는 시간을 버티고 버텼다. 그분의 반복되는 노동으로 우리 모임의 약속은 정해졌다가 취소되기를 반복했고 결국 그분은 이대로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질 것 같아 퇴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퇴사 얘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말처럼 쉽지 않았을 뿐이다. 다소 특수한 직무, 쉽지 않은 고용 시장,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1인 가구 가장의 퇴사는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수입 0원으로 나를 온전히 먹여 살려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죽을 것 같은데(몸이든, 마음이든) 무조건 버티는 것도 장기적으로 옳은 답은 아니다. 나는 말했다.
퇴사해도 괜찮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고. 무슨 선택이든 응원한다고.
감동의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일을 해야 하니 참아본다는 그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나 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하면서 나를 위로하고 싶은 건 아닐까 하고.
일찍 결혼했지만 지금은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나의 일본인 덕메-덕질을 함께 하는 덕질 메이트-는(이젠 그냥 덕메 라고 하기엔 너무 깊...은, 서로의 일상에 깊이 관여하는 사이) 얼마 전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마도 사춘기가 일찍 온 아들과의 갈등이 심해진 듯싶었다.
이럴 때 나는 굉장히 조심스러워진다. 결혼, 육아, 시댁 등 겪어보지 않은 범주의 주제를 말하는 것에 대해.
자칫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처럼 느낄까 봐, 교과서적인 뻔한 얘기를 늘어놓게 될까 봐 경계하게 된다.
모르는 감정에 대해 아는 척할 수 없다. 나의 언니도 그 문제로 굉장히 큰 어려움을 겪었노라고, 나는 잘 모르지만 아이를 키우며 겪는 고통도 있지만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기쁨도 있지 않느냐고.
들어주려고 해서일까. 덕메는 어느 나라나 육아의 힘듦은 비슷한 거 같다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뭐라고 했길래? 다시 찾아봤다.) 어쩔 수 없이 간접경험 언니의 사연을 다시 소환했다. 유년 시절 공부를 꽤 잘했던 언니는 '내 인생이 자식 때문에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라며 내게 고백 한 적 있는데, 인생이 그냥 그런 것 같다고. 완벽할 수도, 좌절이 없을 수도, 그렇게 다가오는 장애물을 넘어가고, 극복하면서 성숙해지고 자라는 것 같다고. 어쩌면 너의 아들도 인생을 더 배우게 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쓰고 보니 너무 뻔한데...)
구원이라는 말까지 쓰며 지하철에서 눈물을 쏟아냈다는 메시지를 보며 순간 멍해졌다. 아마도 마음이 너무 약해져 무슨 말에도 쉽게 무너지는 상태였을 테지만 나의 위로가 그토록 진하게 가 닿을 수 있었다니 감격스러웠다. 내가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상처에 취약한 사람은 어떤 말로 상대를 가장 잔인하게 상처 줄 수 있는지 안다. 내가 그렇다. 꽤 오래전이지만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선 상대 남성의 이기심에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메시지로 전송한 적이 있다. (욕과 비속어는 없이, 감정적이지 않게 쓰는 게 포인트) 나중에 그는 무슨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하냐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덧붙이기까지 했다. '살다가 너에게 그런 날이 오면 지금 내가 한 말이 반드시 생각날 거야'라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런 날이 온다면 꼭 상기해 주길 바라기까지 한다. 지독하다. 선하고 착한 사람은 아니다.
약함과 악함은 때론 동의어이기도 하듯이 그래서 또한 어떤 말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너무 듣고 싶었던 말.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잘해주지 않는 말. 도무지 나에게는 친절할 수 없어, 상대를 위한다는 구실로 마음을 전하고, 힘을 얻었다는 상대를 보면서 그제야 나도 위로받는다.
늘 내가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말해준다는 덕메의 말을 보면서 생각했다.
맞아. 한때 나는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것 역시 결국은 다른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수단을 통해 돌고 돌아 나는 잘못 살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싶었던 어리광이었을지도.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나를 위로하고 싶어서 너에게 다정한 것일지 몰라.
그래도.. 나쁜 건 아니지?
'내가 나에게 신랄해지면 불운이 나를 좀 봐줄까 싶어서’일부러 삐딱한 것이다.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中-
나의 선의가 타인의 선한 반응을 이끌어 내고 그 결과 타인의 선함을 경험하면서, 나의 모난 모습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우울감과 괴로움에 시달릴 때에도, 내 과거의 삶을 스스로 가혹하게 비난하며 더 큰 괴로움에 빠진다든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내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오히려 나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게 됐고,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 지금의 나를 스스로 위로할 수 있게 됐다
(.....)
그리고 선의를 돌려받으리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돕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겠다고도 다짐한다. 내가 먼저 그렇게 했을 때 타인은 물론 나 자신의 선함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기에.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기에.
-임세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