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과 목과 원>
<완과 목과 원>
여느 남자 친구라면 싫어할 남자 사람 친구의 존재. 유감이지만 내게 셋이나 있다. 미래 어느 날에 사귀게 될 그에게 미리 미안할 바다. “걔들 만나지 마!” 한다면 “그럼 날 만나지 마!” 할 테다. 한두 살 어릴 적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먹곤 했다. 당장 내 앞의 그에게 사랑받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몇 년 간 이어온 단톡도 나갔다.
그럼에도 너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긴 연애를 마치고 돌아온 나를 반겼다.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처럼 물을 건네받는다. 한 일 년 반 만에 앉은 술자리인데 하루 반이 겨우 지난 얼굴이었다. 바로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잔을 맞댄다. 내가 연애 중이라 자기들끼리 알아낸 술집은 이미 너희와 와본 것 같았다.
완은 원래 그런 거라 한다. 끝이 있어 부질없다 한다. 목은 탕수육을 집는다. 나 보고 냉장고에 소주 한 병 더 가져오라 한다. 이 집은 셀프란다. 우리는 늘 한 제목에 같은 말을 붙이지 않는다. 다시 돌아온 단톡도 여전히 콜라주였다. 서로의 종잇조각을 중구난방 늘어놓아도 어울린다. 이상하게 나는 그런 게 가지런한 것보다 좋았다.
<완>
완을 소개한다. 네 얼간이에서 나와 같이 96을 맡고 있다. 대학 다니며 만난 사람 중, 나에 대해 가장 예상 잘하는 동갑이다. 이를테면 술을 진탕 먹고 난 다음, 단톡에 <좆됐다>고 보내는 아침이다. 금방 내 말 주머니를 들어 올리는 답장은 이렇다. <또 연락했제> 인사불성이 된 다음 날은 발신에 구애인 이름이 떠있곤 했다. 머쓱해서 <오케이> 이모티콘을 보낸다.
원래 그는 내 동기의 고향 친구다. 사람 만남에 ‘어쩌다’가 붙는 걸 싫어하는데. 누가 완과의 처음을 물으면 빠질 수 없는 말이다. 생일을 맞은 동기를 만나러 우르르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어쩌다 친구가 됐다. 어쩌다 5년째 친하다. 완은 희한하다. 노는 걸 좋아해서 놀지 않는다. 물론 그 노는 때는 거의 함께 술을 먹어서, 시험기간에 거절당해도 서운하지 않다.
완의 사투리는 내게 제2우리어가 되었다. 걔는 말을 참 함부로 한다. 그건 거의 우리를 걱정하는 욕이다. 뻑하면 <병신이가, 도란나>한다. 굳이 해석을 하면 <네가 또 네 상처를 만들잖아, 다신 그러지 마>다. 우리들을 벗어나면 꼭 어딘가 다쳐오는 내게 그런 함부로 인 말은 단골손님 같은 것이다.
그걸 들으면 좀 낫다. 듣기 전엔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지만, 듣고 나면 '딱 욕먹을 정도'로 바뀌기 때문이다. 걱정스러운 욕을 한 바가지 먹을 걸 알고도 내가 그에게 털어놓는 이유다.
남 앞에선 세상 부끄러울 일도 완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속상해서 전화하다 울면 완은 되게 간단하게 그치게 한다. 흐느낌에 무조건 <마>로 답하는 것이다.
나는, 흑 (마-) 그게, 흑 (마-) 어떡할지, 꺽 (마-)
숨 넘어가도록 슬픈 날 통화는 늘 이랬다. <마>가 열 번을 채울 땐 신기하게도 나는 제대로 말하고 있다. 흑 없이 말이다. 이건 완만의 재능이다. 내가 아는 부산 남자 중 가장 욕 잘하고 가장 믿음직하다.
<목>
목은 축친놈이다. <축구에 미친놈> 직접 그가 뛰는 모습은 본 적 없지만 열심히인 줄은 안다. 저학년 때 자주 보이던 축구 바지 차림새. 혹은 잔뜩 술 먹고도 비틀거리며 운동장으로 향했다는 경험담. 목은 미친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걔를 잘 들여다보면 축구에 미친 게 아니다. 책임을 반드시 질 뿐이다. 자기가 속한 축구 동아리 주장인 목은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다. 축구 잘하는 남자가 좋단 내 말에 목은 자기 친구를 소개해준 적도 있다. 그런 덕에 웬만한 대학교의, 일명 <축동 주장>은 다 만나본 듯하다.
나보다 한 살 더 먹은 목은 아주 가끔 오빠 행세를 한다. 대부분 내가 <어린 동생 짓>을 부릴 때다. 4년 전 2학년 재학 중에도 나는 자주 취해있었다. 그리고 자주 연대 정문 앞 정류장에서 흑역사를 썼다.
그때마다 원과 목은 쩔쩔맸다. 답 없는 내 주사는 걔들이 몰랐던 번호도 알게 했다. 이를테면, 우리 엄마 선영의 것이라든지. 잘 가지 않는 일산행 빨간 버스의 것이라든지.
맨 처음 완과 목과 원과 술 먹다 날을 샌 아침이었다.
당시 자취했던 목은 잠이 덜 깬 상태로 정류장 배웅을 해야 했다. 신촌이 아직 낯설던 내가 <나 혼자 갈 줄 몰라> 어렵게 꺼내자, 어기적 나온 것이다. 걔는 내가 탄 버스를 배웅하고 과외를 갔다.
그 시절 우리 넷은 오로지 정신력으로 이어간 과외로 술 값을 냈다. 쉬는 날이던 완과 나, 이미 하고 술자리에 온 원과 달리, 목은 또 책임졌다.
벌써 4년도 더 된 아침이다. 목이 내게 오빠였는지 까맣게 4년이 되어 잊었다.
그런데 연대 정문 쪽에 서서 버스를 기다릴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곤 한다. 한 번은 그곳에서 남자 친구였던 애가 왜 웃냐고 묻자, 말해준 적 있다. 나는 같이 웃기길 바란 건데. 돌아온 대답은 <너 술 적당히 먹어, 그니까>였다.
나 참, 친구가 아닌 남자는 다 똑같다.
<원>
원은 생긴 것처럼 마음이 둥근 녀석이다. 작년 11월 있던 내 졸업 전시에 그는 떡을 사 왔다. 꽤 많은 사람이 다녀간 자리에 마카롱 박스와 꽃, 그리고 에그 타르트 상자가 있었다. 그걸 본 원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리곤 왜 저러냔 표정에 답한다.
" 내가 너 이런 거만 받을 줄 알고 떡을 사 왔지."
친구가 당이 넘쳐 죽을까 봐 떡을 사 왔다는 원. 걔는 호탕한 웃음을 가졌다. 어느새 같이 웃음보가 터진 나였다.
원은 나와 먹을 걸 나눌 때 잘 통하는 친구다. 걔가 하란대로 숟가락을 채워 입에 넣으면 맛없는 법이 없었다. 맛있게 먹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비결은 원과 똑 닮은 그의 아버지 영향으로 예상한다. 말로만 전해 들어도 다정한 부자다.
어느 날 또 목과 원과 술을 먹었다.
그 둘은 취기가 늦게 올라오는 날 잘 안다. 잘 가! 하고 등 돌릴 적엔 멀쩡하지만, 귀가하는 어디선가 비틀거릴 걸 미리 본다. 선영이 당부했지만 못돼먹은 주사는 예외 없다. 막차를 타러 일어서는 날 원이 가위바위보에 져서 따라나선다. 목은 낄낄댄다.
교통카드를 찍으려는 찰나, 원은 역 내 빵가게를 발견한다. 그리곤 '야 너 빵 하나 먹으면서 가라.' 한다. 뒤 이어 말한다. '처먹음서 가야 안졸 거 아녀.' 하며 단팥빵 세 개를 계산한다. 목의 것도 담는 둥근 마음이 원 답다.
가다가 또 집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원과 목은 한 살 오빠로 돌아가야 했다. 나완 다르게 선영은 걔들을 오빠로 여기곤 했으니. 그때도 웃음보가 한껏 터져 단팥빵을 받아 들었다. 95년생 원은 원대로, 목은 목대로 96년생을 챙긴다.
원이 사준 빵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이 우스운 일을 빨리 선영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해서다. 손을 넣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촉감이 좋았다.
다음 날 아침, 각자 주머니에서 나온 빵을 말하며 단톡은 <ㅋ>으로 도배됐다.
아직 그때 갔던 곱창집을 다닌다. 직장이 방배로 잡히자마자 목에게 <야 거기 어디였지> 물었다. 맛도 훌륭했지만, 다시 거길가면 우리 셋이 앉아있을 것만 같았다. 2년이 지나 먹는 곱창도 맛있다. 그러나 갈 때마다 역시 걔들이랑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완과 목과 원 그리고 나.
<공대생 셋 미대생 하나>에서 <대학원생 셋 직장인 하나>가 되었다.
그래도 모이는 건 언제나 신촌이다. 넷에게 익숙하고도 앞으로 몇 년은 벗어날 일 없는 대학가. 골목골목을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를 발견한다.
술집으로 향하기 전 코인 노래방에서 열창하는 우리, 생일을 축하하며 소주병을 길게 늘어놓는 우리, 다모토리 대기줄에서 사진을 남기는 우리, 함께 동트는 아침 공기를 맡는 우리. 정말 많다.
너희는 내가 제일 애정 하는 공대생들이다.
곧 있을 셋의 졸업을 축하하며,
항상 우리답게 취하기를. 술에나, 우정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