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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곰 Aug 08. 2017

인어공주는 여성 혐오적인 동화인가?

인어공주에 대한 페미니즘 비평에 대해

여성 혐오와 동화?

 1월 경 즈음에 트위터에서 나돌던 글이 하나 있었다. 모 대학교 교수가 인어공주가 여성 혐오적인 동화라고 발언했다는 것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어 공주'에서 인어공주는 왕자를 얻고 싶어 한다. 인어공주는 이를 위해 마녀에게 다리를 얻고 그 대가로 혀를 내어주는데, 이는 여성이 발언권(혀)을 희생함으로써 생식기를 얻는 것을 은유한다. 이는 명백한 여성 혐오적 연출이다. 우리는 이런 동화의 여성 혐오적 요소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인어 공주에서 안데르센이 그것을 의도하였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는 사실 이 논쟁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현대비평이론에서는 독자가 작품을 충분히 주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고, 이에 따라 작품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창작자들이 골머리를 앓게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위 주장의 정합성이다. 다시 말해 위의 주장에 근거가 있는지, 그렇다면 그 근거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저 주장이 맞다면, 그 점에 있어서는 충분히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주장이 맞다는 근거가 없다면 우리는 저 주장을 따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김첨지와 여성 혐오

 우리는 일전에 트위터에서 '운수 좋은 날'(현진건, 1924)에 붙은 부당한 여성 혐오 딱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등장인물에 자신을 이입한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변호를 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비난을 할 수도 있다. 독자들이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모두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작가는 주연이 선역이건, 악역이건 주연에 이입하기를 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소설의 주제의식은 플롯 속에서 드러나는데, 그 플롯를 이끌어나가는 건 주연이기 때문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주인공 김 첨지는 명백한 여성 혐오적 사상을 가진 가부장적 인물이다. 약을 아예 짓지 못할 정도의 비렁뱅이는 아니지만 김 첨지는 "병은 약을 쓰면 재미를 붙여서 더 온다"는 자신의 신조를 아픈 아내에게까지 강요한다. 물론 김 첨지가 아내에게 아주 박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인물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김 첨지는 아프다는 아내에게 욕을 해대며 손찌검을 한다. 김 첨지의 캐릭터성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전형적인 빈곤층이자 가부장적인 인물인 셈이다.


 수년 전부터 유행한 인터넷 밈인 김첨지 츤데레 설과는 달리, 김 첨지에 대한 해석은 여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인물이자 일제시대 빈곤층. 이 큰 틀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김 첨지에 대해서 현진건은 전혀 변명하지 않는다. 아내가 중병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내 곁에 있어주기는커녕 아내의 뺨을 때리고, 집에 일찍 들어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핑계를 대며 술을 마시고 늦게 집에 들어간다. 그 날 김 첨지의 아내가 죽은 것은 가부장적인 김 첨지의 탓이 크다.


 다만 현진건이 여기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저 김 첨지가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김 첨지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나쁜 사람이지만, 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시대 하층민의 비참한 삶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부장제와 가난으로 대표되는 일제시대 비참한 하층민의 삶은 결국 김 첨지의 아내를 죽게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여성 혐오적 시각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긍정적인 소설이다. 김 첨지는 그 시절 가부장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김 첨지를 통해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 소설은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쓰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여성주의적 독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연인 김 첨지가 여성 혐오자이기 때문에 이 소설 역시 여성 혐오적이라고 주장한다.


등장인물이 '여혐'이라고 소설도 '여혐'?

 소설의 주제의식은 플롯에서 드러나는데, 플롯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주연이라고 앞서 말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주연은 작품의 주제의식과 밀접한 상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연이 주제의식과 밀접한 상관이 있다고 해서 주연의 행동이 곧 주제의식이라는 시각은 굉장히 위험한 시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히트작 롤리타에서 주인공 험버트는 또 다른 주인공 롤리타를 강간하고 '여행'이란 명목으로 강제로 끌고 다닌다. 그렇다고 해서 롤리타가 여성 혐오적인 작품이자 아동 성폭행을 옹호하는 작품인가?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라면 모를까 현재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은 실질적 문맹 외에는 없다. 롤리타의 핵심은 이성의 파괴이다. 생각해보자. 험버트는 끔찍한 아동 성폭행범이지만, 독자는 이를 동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주제의식과 주인공의 행동이 정 반대인 경우는 굉장히 흔하다. 또한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그의 모든 행동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주인공에는 성장형 주인공과 완성형 주인공이 있는데, 전자는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점점 완성되어가는 주인공이며, 후자는 스토리의 시작과 함께 이미 완성되어있는 주인공이다. 우리가 다룬 인물을 두 부류로 나누자면, 전자는 '인어 공주'의 인어공주, 후자에는 '롤리타'의 험버트 험버트와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가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해당 인물이 긍정적인 성향으로 그려진다 해도 그 모든 행동이 긍정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인어 공주'의 인어공주 역시 모든 행동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어 공주의 행동 가운데 긍정적으로 그려진 것은 거의 없다.


 앞서 '인어 공주: 실연을 통한 성숙의 미학'에서 말했듯이, 인어 공주의 주제의식은 "사랑이 아닌 성숙을 통한 성장"이다. 이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드러난다. 가령, 인어공주는 불멸의 영혼을 끊임없이 왕자와 겹쳐서 본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인어공주의 왕자에 대한 의존성이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인어 공주는 왕자를 통해 불멸의 영혼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안데르센의 의도가 아니라고 말하실 분들은 위로 올려서 글을 다시 읽고 오시길 바란다.)


 왕자를 얻기 위해서, 인어 공주는 자신의 혀를 마녀에게 준다. 발언권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대가로 인어공주는 다리(생식기)를 얻는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이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안데르센이 이를 어떻게 그리는지 볼 차례이다.


 안타깝게도 인어공주는 왕자도, 불멸의 영혼도 얻지 못한다. 안데르센은 여기에서 인간의 사랑이 불완전한 탓이라고 여러 번 떡밥을 던져놓았지만 지금은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떡밥들은 무시하자. 어쨌건 인어공주의 의존은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것은 물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인어공주의 자매들이 칼을 들고 와서 왕자를 칼로 찔러 죽이면 300년간 다시 살 수 있다고 한다. 인어공주는 여기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왕자를 죽이고 300년을 살 것이냐, 아니면 사람을 죽이느니 자신을 희생할 것이냐.


 인어공주는 여기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하늘에 떠오른다. 하느님의 눈에 착한 행동이 들어서 공기의 정령이 되게 한 것이다. 공기의 정령들은 300년간 아이들을 위해 일하면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 왕자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었던 불멸의 영혼을, 자신의 선한 선택을 통해 얻은 것이다.


 작중 인어공주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처음에는 왕자를 통해 불멸의 영혼을 얻겠다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이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두 번째로 선한 행동을 택하자, 인어 공주는 불멸의 영혼을 얻는다. 왕자를 통하지 않고서 말이다. 이것이 작중 인어공주가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이다. 인어공주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선한 행동을 했고, 그에 따른 보답을 받았다.


인어 공주와 여성주의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인어 공주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여성의 주체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중 인어공주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존재다. 거기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선택지를 택했을 때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지만,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한 행동을 했을 때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 작품에서 안데르센은 원하는 것을 누군가를 통해서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 대상은 '왕자'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에게 의지해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원하는 것은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즉, 여성주의적 시점에서 보았을 때 긍정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어 공주에서 작중 인물이 발언권을 포기하고 생식기를 얻기 때문에 여성 혐오라는 시각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발언권을 포기하고 남성에게 의지했을 때는 오히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소설이나 동화를 바라보는 것은 좋다. 다만, 한때 유행했던 잔혹동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시각으로 창작물을 폄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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