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 혹은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 - (2015)
낙인 효과라는 말이 있다. 사회과학 용어인데, 한 사람에게 낙인을 찍으면, 그 낙인이 내재화되어 일탈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도둑이라는 소문이 돌면 실제 그가 도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도둑처럼 여기게 된다. 처음 그는 이것이 오해라는 것을 하려고 하지만, 사회적인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그는 이판사판이다 싶어 남의 물건에 손을 대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여성이 수학을 못 한다는 편견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에서 여성의 수학 성취도는 남성의 수학 성취도보다 낮은데,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바로 여성의 수학적 능력에 대한 편견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직 가설 수준이긴 하지만, 실제 이러한 편견이 없는 경우 여성의 수학 성취도가 남성의 수학 성취도보다 더 높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 등, 이 가설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와 같은 가설은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실제 여성의 학업성취도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수학을 못한다는 것이 이미지가 되어야 하는데, 선후관계가 거꾸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철학에선 시뮬라시옹, 그리고 이 '이미지'를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시뮬라크르는 본래 모방이란 뜻이고, 시뮬라시옹은 영어의 시뮬레이션과 비슷한 의미이다. 하지만 철학에서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 뜻에서 조금 더 확장된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원본이 없는 복제품'으로, 시뮬라시옹을 시뮬라크르의 동사형으로 정의했다. '원본이 없는 복제품'이란, 비록 원본을 본따 만들긴 했으나 실제 원본과 아무 관계도 없는 복제품을 말한다. 예시로 겨울연가의 이민혁과 배용준의 관계를 들 수 있겠다. 배용준이 비록 겨울연가에서 주연인 이민혁을 맡긴 했으나, 이 둘은 사실 어떠한 관계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뮬라크르가 원본을 감추고, 나아가 현실을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한 배역을 계속 연기하는 배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 배역을 계속 연기하는 동안 그의 본연은 시뮬라크르인 배역에 감추어진다. 사람들은 그를 배우 자신으로 보지 않고 그 배역으로 본다. 게다가, 오히려 그 자신마저 결국 그 배역의 영향을 받는다. 결국 이게 계속 반복되면 원본인 배우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영화 버드맨(혹은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은 이러한 현상에 저항하는 한 배우의 이야기이다.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役)은 과거 슈퍼히어로 영화 '버드맨'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거듭된 실패와 악재로 결국 실패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저 버드맨으로만 기억된다. 즉, 그는 이미 시뮬라크르인 버드맨에 가려져있는 셈이다. 그는 심지어 버드맨의 모습을 한 환영과 환청으로 고통받는다. 그는 이를 연극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택한 연극은 아쉽게도 그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연극이 정말 좋은지, 혹은 좋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작중 마이크 샤이너는 리건 톰슨과 같이 간 바에서 타비사를 가리키며, 브로드웨이의 모든 연극은 저 여자의 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모든 브로드웨이 연극의 평가는 뉴욕 타임즈의 평론가인 타비사 디킨슨의 손에 달려있다. 만일 그녀가 이 연극을 좋게 평가하면 연극은 흥행하지만, 악평한다면 그 날로 끝인 셈이다. 결국 연극 역시 연극 그 자체의 수준보다는 타비사의 칼럼의 영향을 크게 받는 셈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극을 추진해나간다. 그러나 연극 바로 전날, 술집에서 만난 타비사는 리건에게 "연극에 엄청난 악평을 쏟아부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너는 연기자가 아닌 유명인일 뿐"이라며 나가버린다. 그 말을 듣고 리건은 길거리에서 취한 채 잠이 든다. 다음날 리건은 길거리에서 일어난다. 버드맨의 환영은 그에게 '우리의 방식대로 종지부를 찍자'고 말한다.
그날 밤, 리건은 무대에 오른다. 관객들은 버드맨이 연극도 잘 한다며 호평한다. 마지막에 리건은 대기실에서 전처에게 자신이 자살하려고 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진짜 총을 가지고 무대에 올랐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쏜다.
그러나 리건은 죽지 않았다. 비록 코가 날아가긴 했지만, 리건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타비사는 그를 혹평할 것이란 말과 다르게(비록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이라며 에둘러 까긴 했지만) 그를 호평했고,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자신의 병실에 몰려왔다. 딸은 자신이 원하는 꽃을 사왔다. 전처, 그리고 딸 샘과의 관계도 회복됐다. 딸이 만든 그의 트위터 계정은 하루만에 8만 팔로워를 기록했다.
딸이 잠시 꽃을 담을 꽃병을 가지고 오는 사이, 리건은 화장실에 들러 거즈를 뗀다. 그 곳에서 버드맨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창문을 열고 그 위로 올라탄다. 잠시 후, 샘은 병실에 아버지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버지를 찾는다. 샘은 창문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아래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지만, 잠시 후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언뜻 보면 그가 왜 창문을 열고 투신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리건이 사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을 날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초능력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장면을 예시로 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런 장면이 리건의 망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리건이 화를 내며 대기실 안의 물건을 부수는 장면이다.
해당 시퀀스에서, 리건에게 카메라가 집중된 시점에선 그가 초능력으로 물건을 부수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리건의 매니저인 제이크(잭 캘리퍼내키스 役)에게 카메라가 돌려지자 리건이 직접 물건을 때려 부수는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놓치기 쉬운 장면이지만 리건의 손을 자세히 보면 상처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리건의 초능력은 바로 망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떨어져 죽은 것 자체가 바로 비극일까? 이 영화가 비극인 이유는 그가 결국 버드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버드맨은 작중 내내 리건을 압도했다. 리건이 언론과 인터뷰를 했을 때, 기자들은 그를 둘러싼 가십과 그가 버드맨이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한다. 리건은 작중 내내 버드맨이라는 말을 듣는다. 영화의 주연이 아닌, 단역들이 그를 리건이라고만 부르는 경우는 드물다. 그를 버드맨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그냥 버드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버드맨의 환영과 환청은 이러한 시선과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다. 버드맨의 환영은 원본인 리건을 버드맨처럼 끊임없이 유혹한다. 즉, 리건은 원본, 그리고 버드맨의 환영은 시뮬라크르인 셈이다. 시뮬라크르인 버드맨은 리건에게 끊임없이 영향력을 끼치려고 한다. 리건은 이에 저항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버드맨의 꾀임에 계속 저항한다.
타비사가 내일 연극이 좋건 나쁘건 무조건 혹평을 내릴 것이라 한 것은 사실 리건에게 있어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앞서 말했듯 브로드웨이 연극의 평은 타비사 디킨슨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그런데 그녀는 연극이 어떻건 무조건 혹평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리건의 연극은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타비사가 쓸 기사는 원본에 대해 다루긴 하지만 원본과는 하등 상관 없다. 다시 말해, 다음날 타비사가 쓸 기사는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만약 그의 연극이 그녀의 기사와 상관없이 성공한다면 그는 첫 승리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자포자기한 그는 다음날 버드맨의 꾀에 넘어가 첫 연극에서 머리에 총을 쏘게 된다.
그가 깨어나 마주한 것은 비극이었다. 타비사는 그의 연극에 대해 호평을 했고, 그가 그렇게 싫어하던 트위터에 자신의 계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타비사는 그에게 자신의 기사를 무너트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리건의 연극에 호평을 한 것이다. 이 기사는 일대 이슈가 되었고, 리건은 한 번에 자신의 연기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이는 리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의 연기가 아닌, 타비사가 만든 글, 즉 연극의 복제품으로 호평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뮬라크르보다 더 영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리건은 트위터 계정까지 만들게 된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딸인 샘(엠마 왓슨 役)이 그의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 이 장면은 큰 의미를 갖는다. 리건은 본래 트위터와 블로그등 SNS를 경멸했는데, 때문에 그는 그 흔한 페이스북 페이지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리건의 SNS가 있다? 이는 분명 모순이다. 때문에 리건과 그의 SNS 계정은 양립할 수 없다. 즉, 리건과 그의 SNS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비록 리건의 이름을 단 SNS일지언정 말이다. 즉, 리건의 SNS는 새로 만들어진 그의 시뮬라크르이다. 리건은 시뮬라크르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또다른 시뮬라크르에 가려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리건은 제이크가 틀어준 TV를 통해 자신을 추모하는 공간이 뉴욕 곳곳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뜻 보면 리건의 작은 승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리건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에 불과하다. 추모소에 걸린 사진은 리건 톰슨의 사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추모소에 걸린 사진은 버드맨의 포스터였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만든 연극에서 유명해진 것은 결국 버드맨이었다. 모두들 리건이 아닌 버드맨을 추모한 것이다.
리건이 자살한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원본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연극을 시작했지만, 결국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은 시뮬라크르에 먹혔고, 그 어디에도 자신은 없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리건은 모두가 나간 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본다. 리건은 거즈를 붙인 모습은 물론, 거즈를 뜯은 뒤 본 자신의 코마저 버드맨처럼 변한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시뮬라크르인 버드맨이 원본인 자신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을 은유한다. 결국, 그의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리건은 결국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다. 즉, 이 영화는 시뮬라크르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남자의, 코미디로 포장된 비극인 셈이다.
리건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택한 연극은 레이먼드 카버의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이야기하는 것>을 각색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택한 이 연극의 결말부는 자신의 부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의 결과가 바로 자신의 부재로 이어진 것이다.
"당신은 그럼에도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셨나요?"
"네"
"그게 무엇이었나요?"
"내가 지구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느끼는 것"
- 레이먼드 카버의 '레이트 프래그먼트' 中
영화 초반에 나온 인용문이다. 리건이 자기 자신으로 남고자 하는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바로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버드맨이 아닌 자신, 리건 톰슨으로서 사랑받기 위해서. 하지만 그는 죽기 전까지 사랑을 얻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시뮬라크르인 버드맨을 사랑했다. 리건 톰슨이 아니라. 그렇기에 리건 톰슨은 결국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