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 할머니와 엿

by 라이테


고향 근처에는 미륵산이 있다. 들판 한가운데 낮지만 단단하게 솟은 산이다. 그 산기슭에는 오래된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다시 나라를 일으키려 했던 백제 무왕의 뜻이 그곳에 머물러 있다. 그 꿈을 품고 세워진 사찰이 미륵사였다.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을 갖춘,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서탑 일부가 남아 국보로 서 있고, 당간지주 또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며,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했던 왕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어릴 적, 그 산 아래에 살던 분이다.

내가 태어나던 해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는, 아버지가 두 살 되던 해 남편을 잃었다. 2대 독자였던 아버지를 홀로 키워 낸 분이었다.

늘 허허 웃으시던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웠다. 남편 없이 사는 집이어서인지, 집에는 늘 사람의 기척이 이어졌다. 동네 과부 할머니들이 드나들었고, 보부상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냄비와 그릇을 머리에 이고 다니던 장수, 향긋한 분첩과 꽃신을 펼쳐 보이던 잡화상, 그리고 엿을 담은 암반을 목에 걸고 다니던 엿장수까지.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미륵산 도인 할머니였다.

그날 이후 두 할머니는 친구처럼 지냈다. 엿장수 일을 그만둔 뒤에도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분을 ‘미륵산 할머니’라 불렀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미륵산 할머니는 십오 년 넘게 우리 집을 찾았다. 혈육도 아닌 집을, 해마다 잊지 않고 오셨다.

버스를 타면 멀미가 심해 탈 수 없던 할머니는, 삼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왔다.

우리 집이 빨간 벽돌집으로 이사하던 날, 할머니가 오셨다. 친손의 일처럼 기뻐하며 다락방까지 빠짐없이 둘러보셨다.

갈라진 손바닥으로 벽과 바닥을 쓸어 보시던 할머니가 말했다.

“아이고, 좋다. 집 좋다.”

그 말이 집 안에 따뜻하게 퍼졌다.

새집을 지은 뒤로 살림은 빠듯해졌다. 어머니는 시내 공단에 나가 일을 하셨고, 우리 4남매는 모두 학교에 다니느라 낮 동안 집을 비웠다.

미륵산 할머니는 빈집을 지키다 늦은 오후가 되어야 우리를 만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삼베 보자기를 풀었다. 밀가루 속지에 싸인 엿을 꺼내 하얀 가루를 털어 내고 하나씩 건네주셨다.

콩이 박힌 엿, 참깨와 검정깨를 입힌 엿. 때로는 조청과 말랑한 가래떡도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받아먹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손이다.

하얀 밀가루가 묻어 있던, 그 따뜻한 손.

썰렁한 빈집이었지만, 할머니가 계신 날이면 집 안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부모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할머니는 하룻밤을 머물고 가셨다.

그날 밤은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신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다. 잠들기 전, 나는 꼭 그랬으면 하는 마음으로 할머니에게 묻곤 했다.

“할머니, 내일도 우리 집에 계실 거예요?”

아침이 되면, 할머니는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길을 따라 아무 말 없이 길을 나서셨다. 삼십 리가 넘는 길을 새벽 바람과 이슬 속으로 걸어가셨다.

사춘기를 지나며 후각이 예민해졌는지, 미륵산 할머니가 방에 앉아 계시기만 해도 노인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그 냄새를 피하지 못하는 내 얼굴에는 어느새 티가 났다.

중학교 마지막 학기, 연합고사를 앞둔 초겨울이었다. 이유도 없이 코피가 잦았다. 밥을 먹으려 고개를 숙이면, 하얀 밥 위로 붉은 피가 떨어졌다.

그날도 할머니가 오신 날이었다.

“코피에는 쑥이 좋은데.”

말씀을 남기고 나가신 할머니는, 한참 뒤 된서리가 내려앉은 쑥을 들고 돌아오셨다. 얼어붙은 잎을 비벼 둥글게 뭉치고, 차가운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내 코에 넣어 주셨다. 코피는 금세 멎었다.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동안 할머니를 대하던 내 태도가 하나씩 떠올랐다.

말 한마디면 될 일이었는데. 끝내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 뒤로 할머니는 더 이상 빨간 벽돌집에 오시지 않았다.

그즈음 우리 식구 모두는 저마다의 격동기를 지나고 있었다. 할머니가 이미 두어 번은 다녀가셨을 법한 시간이 흘렀지만, 누구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할머니 댁이 어디인지도 몰랐고, 전화 한 통 넣을 방법조차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우리는 할머니께 빚진 마음을 외면한 채, 미륵산 할머니와 엿을 점점 잊어 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매들은 자랐고, 집 안을 뒤덮던 먹구름 같은 시간도 서서히 걷혔다. 그제야 우리는 가끔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실까.”

말을 꺼내고 나면, 마음 한켠이 조용히 무거워졌다. 그럴 때마다 애써 생각을 덮었다. 잘 지내고 계실 거라고, 그렇게 믿어 버렸다.

미륵산 할머니는 그렇게, 기억의 먼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남편이 말기 암으로 투병하던 시절, 어릴 적 먹던 음식들을 찾곤 했다. 그중 하나가 엿이었다.

다른 음식들은 재료를 구해 직접 만들어 내놓을 수 있었지만, 엿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마침 지역에 엿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어 지인에게 부탁해 구해 왔다. 그러나 그 맛이 아니었다.

어릴 적 엿장수에게 빈 병과 낡은 고무신, 찌그러진 대야와 오래된 책, 비료 포대를 내주고 바꿔 먹던 그 엿의 맛이 아니었다. 지역 축제장 가판대에서 파는 먹기 좋게 잘린 엿도 마찬가지였다.

미륵산 할머니가 삼베 보자기를 풀어 꺼내 주시던 엿. 주름지고 두터워진 손으로 입에 넣어 주시던 그 맛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할머니의 얼굴도, 이제는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두운 밤, 철로 근처까지 내려가 쑥을 뜯어 오시던 그 차가운 손.

그 손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손이었다. 내 자손, 네 자손 가리지 않던 손. 바쁘면 어느 집 부엌이든 들어가 밥상을 차려 내오던 손. 허기진 입에 가래떡과 엿을 밀어 넣어 주던 손.

집집마다 놓여 있던 전화기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문명의 편리함에서 비껴난 손.

그 손을, 지금 어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해 질 녘, 빛이 사그라들 때면 할머니의 모습이 그늘처럼 번져 온다. 부엌에서 이어지던 자근자근한 기척과, 새는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시던 소리가 아직도 마음자락에 남아 있다.

쑥을 매만지던 그 손은 살갑고도 따스해서, 계절이 몇 번을 갈마들어도, 다다를 길이 끊긴 먼 시간 속으로 흘러가도 끝내 식지 않는다.

나는 이따금 그 온기 언저리에 가만히 기대 앉고 싶어진다. 오래 묵은 시간 속에서 ‘미륵산 할머니’를 불러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고요뿐이다.

그러나 그 고요마저도, 시나브로 배어드는 다정함이 되어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