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새뜻한 언덕에서

by 라이테


들판을 가로지르는 농수로 가에 드문드문 하얀 송이들이 눈에 띈다. 귓불에 솜털 보송한 열여섯 소녀처럼 소리도 없이 찾아온 찔레꽃. 짙어지는 햇살에 남은 순(筍)마다 물길을 제법 넓히고 나면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가지 끝마다 하얀 꿈을 슬그머니 내놓는다. 꽃잎보다 화려한 노란 꽃술을 가슴에 품고서도 뭐가 그리 수줍은지 무리 지어 송이를 이룬다. 새벽녘 꿈같은 하얀 꽃잎에서 이다지도 매혹적인 향내를 풍기는가. 아찔하다. 분분한 향내와 함께 어린 시절 그 언덕이 꽃그늘처럼 떠오른다.



집 뒤란에서 바라보면 밭 스무 이랑 건너 언덕배기에 찔레꽃이 흰 목덜미같이 부드러워 보였다. 언덕배기는 장터에 나가려면 지나쳐야 하는 곳이었다. 그 길에서 울고 있는 단발 아이의 정수리로 매끈한 햇살이 부서졌던 어느 시절.

학교에 따라가겠다고 떼쓰는 일곱 살 동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언니는 찔레나무 언덕을 지나 총총히 학교에 가곤 했다. 솔깃한 곳에 갈 때는 꼭 데려가곤 했는데 안 된다고 했다. 대문간에서 몰래 기다리고 있으면 언니가 말했다.

“얼른 들어가 놀고 있어. 언니 일찍 올게.”

언니는 아껴두었던 사탕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집 올 때 먹으려 했는데, 이거 줄게. 먹고 있어.”

사탕을 받고 말았다. 우둘투둘한 담장에 붙어 까치발로 언덕을 바라봤다. 가방을 멘 언니가 재잘거리며 찔레꽃 언덕을 지나갔다.

“언니야.”

흘깃 바라보더니 내려가라는 손짓을 했다. 찔레꽃 언덕을 지나 내리막길로 걷는 언니의 몸이 짧아지더니 정수리마저 사라져 버렸다. 담장에서 내려와 사탕을 막내 입에 넣어주었다. 청포도 향이 입 안 가득 찼다. 입 안에서 굴려 먹는 사탕은 이내 새끼손톱만 한 사금파리 조각이 되었다. 빈집이 조용하다. 아이들만 있는 빈집들이 모여 빈 동네가 된다. 모내기 철 엄마 아빠들은 논으로, 일터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텃밭이나 먼 밭으로 나가셨다.

은행나무 그늘 아래로 자리를 잡았다. 신우대 빗자루가 쓸고 간 자국이 흙 위에 굵은 소나기 같다. 세수도 빗질도 안 한 내가 빗질한 마당에 사금파리로 그림을 그렸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창문을 열어 보니 비가 오더래, 지렁이 세 마리가 기어간다네. 아이고, 무서워. 해골바가지.”

해골 모양 그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고 다시 그렸다. 손은 집과 사람을 그리는데 머릿속에는 먹고 싶은 과자가 그려졌다.

엄마는 중요한 것을 부엌 그릇장 맨 위 칸에 두셨다.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그릇장을 더듬었다. 간신히 손에 닿은 밥그릇이 기울어지고 동전이 또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십 원짜리 두 개를 손에 쥐었다.

“뽀빠이 사 올게, 여기 있어.”

막내가 끄덕이는 것을 보고 앙감질로 뛰었다. 넘어져 무릎에 피가 맺히긴 했어도 과자 사러 가는 길이니까 괜찮았다. 뽀빠이 하나에 십 원. 주머니 양쪽에 넣고 누구라도 만날까 쏜살같이 집에 왔다. 고소한 과자가 입안에서 춤을 췄다.

고샅길로 나서 멀리 들판을 한 바퀴 둘러봤다. 한참 먼 논에 줄을 맞춘 어른들이 알록달록 보였다. 행여 점심때를 놓칠세라 먼 논이 잘 보이는 곳 담벼락에 기대어 앉았다. 다시 무논을 바라보니 알록달록하던 줄이 논배미 두 개 사이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못밥이 왔나 보다.

동생 손을 이끌고 철도 건널목 앞으로 내려왔다. 왼쪽 저 멀리 굽이도는 쪽에도 오른쪽 역사 쪽에도 기차가 없다. 어른이 없어도 건널목은 무섭지 않았다. 서둘렀다. 못밥 자리가 파하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 잰걸음에 동생은 뛰다시피 했다. 논배미 한 개가 남았을 때 엄마가 벌떡 일어나 손짓했다. 다른 어른 눈치 볼 것 없었다. 엄마가 거기 있으니까. 못밥 주인에게 엄마가 한마디 거들었다.

“내일 우리 논 모심어. 그 집 애들 점심때 우리 논배미로 오라고 해.”


엄마랑 함께 돌아오고 싶지만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논두렁을 살피며 토끼풀꽃만 꺾다 돌아와야 했다. 엄마를 기다리며 대문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꽃시계를 찬 동생 손이 힘없이 쳐졌다. 벌써 눈이 감겼다.

“얼른 일어나.”

깨워도 소용없었다. 대문간에 함께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여기서 뭐 해? 얼른 일어나.”

이번엔 학교에 다녀온 언니가 나를 깨웠다. 언니는 동생을 업고 나는 언니 가방을 메고 들어갔다. 가방에서 뭘 좀 꺼내주려나 기다렸지만, 언니가 꺼낸 건 숙제 공책이었다.

진흙투성이 엄마가 돌아오셨다. 덕지덕지 흙 묻은 옷을 빨아 널고 외출복 차림을 하셨다. 언니가 세상 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 어디 가?”

“내일 못밥 내려면 반찬거리 사 와야지.”

“우리도 따라가면 안 돼?”

환타 맛 오렌지 맛 하드 바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숙제하라는 말을 남기고 엄마는 쌩하니 나섰다.

막내만 남겨두고 두 자매는 부리나케 엄마 뒤를 따랐다. 잰걸음의 엄마는 벌써 찔레꽃 언덕 내리막길을 다 내려갔다. 내 울음소리가 엄마 뒤를 따라 굴러갔다. 엄마는 뒤돌아서서 한쪽 발을 크게 쿵 구르고는 외쳤다.

“얼른 집으로 안 갈래?”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음질했지만 떡 방앗간 앞에서 주인에게 붙들려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게 훤했다. 나는 포기하고 찔레꽃 그늘에 퍼질러 앉아 더 큰 울음소리로 발을 동동 구를 뿐.

‘울음소리야, 엄마 앞서서 하드바 가게로 좀 데려가.’

울음의 여운이 엄마를 따라잡지 못했던 걸까. 장바구니에 하드바는 없었다. 신작로가 시작되는 상점에서 하드바를 산다 한들 녹아서 먹을 수 있었겠나. 엄마의 장바구니에는 일곱 살 수줍은 바람 같은 새뜻한 찔레꽃 향기만 덤으로 얹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