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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May 15. 2024

여자의 그 남자 간암 4기

남은 생 vs 표적치료제

                           5월의 샤스타데이지꽃



찬란한 5월이다.

연둣빛이 점차 초록으로 바뀌어 가고 능선마다 나목이던 실루엣이 빽빽하게 채워지며 능선이 부드러워지는 계절.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채도를 높여  더욱 찬란하고 밀도 있게 치장하는 달이다. 기쁨의 환희를 입은 자가 아니면 들어올 공간은 여기에 없다는 듯.




병실은 5인실. 남편은 병실 내 화장실 맞은편, 출입구 바로 옆 침상에 누워 있었다.

병상 다섯 개가 모두 남자 환자로 차 있고 상 커튼이 모두 걷혀 있다. 청소하시는 분이 부지런한지 깨끗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환자들은 하나같이 아픔을 털고 곧 일어날 것 같이 분위기도 밝다.

조카에게 이모가 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지 놀라는 기색이 없다. 반가운 기색도 없다.

미안해서 그런지 이런 상황이 불쾌해서 그런지

아무 말이 없다.

가져온 짐을 정리했다. 내가 하는 대로 이동하는 대로 궁금함이 끈적하게 묻은 시선들이 나를 따라붙는다. 끈적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겠기에 다른 환자들에게 음료를 건네며 인사를 했다.


(저는...

저기 끝자리에 할아버지 같지만 아직은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는 만 50세 저 남자.

 고생고생 흑역사의 끝자락에  병든 몸이 되어버린 저 남자, 이제는  신발도 옷도 없이 섬망(간성 혼수)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와 지금 저 끝 침상에 누워있는 저 남자....

의 아내입니다.)






남편은 수액 바늘도 꽂지 않고 있다.

앞으로 치료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 내가 남편에 관해 사소하든 중대하든 모든 결정을 해야 한다. 혼자 해야 한다.

뭐든 해야 한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이제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남편은 빈 손이 되어 암투병이라는 모래판에 나와 있고 나는 그의 뒤에서 그가 샅바를 바투 쥐어 잡고 버텨주기를 애타게 바라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가 힘을 내도록 도울 수는 있지만 대신 싸워줄 수는 없다. 이미 승부가 저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


정리를 마치고 나니 점심 식사가 나왔다. 백미밥에 반찬이 맛깔스럽다. 남편 식사 시중을 들어주고 나도 컵밥 하나를 꺼내 남편이 남긴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아직 주치의를 만나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투병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도움을 받게 될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인사겸 간식을 챙겨 들고 갔다.

간호사실에 가니 오늘 저녁에 담당 과장님 면담이 있다고 알려준다.


한숨 돌리고 앉았는데 사회사업팀에서 병실로 찾아왔다. 남편이 병원에 구급차로 들어온 상황이며 지금까지 전개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원무과장님께서 도움 받을만한 조건이 되는지 알아보도록 연결을 해 주신 것이다.


마침, 남편이 잠들어 있었서 자리 이동 없이 상 옆  벽 쪽으로 난 빈 공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현재까지의 상황을 쭉  이야기하자니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울다 얘기하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가감 없이 얘기했다.

사회사업팀 직원이 돌아가자 옆 침상의 환자가 나를 측은히 바라보며 말한다.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아요.."




남편은 입을 꽉 다물고 말이 없다.

그의 얼굴엔 희망도 절망도 어떤 표정도 머물지 못했다. 얼굴을 만져보면 분명 따뜻하고 말랑한데 딱딱한 가죽 같은 얼굴을 하고선 감정 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누워있다.

잊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주었다. 최신폰에 고가 요금제에 가입되어 얼마든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었지만 그가 사용한  기능은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뿐.


병실이 조용해진다. 살펴보니 남편처럼 중병인 환자는 없다. 남편은 본인의 병 상태를 아직 모르고 있는 눈치다.

남편에게  딸, 아들 소식을 알려주고 통화연결도 해주었다. 통화를 마친 남편 눈꼬리가 반짝인다. 눈물을 보이기 싫었는지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저녁 식사도 마쳤고 나는 담당 과장님의 호출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상태는 어느 정도일까? 그에게 악성 종양이 있는데 어느 정도인지 치료 방법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치료는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인지, 전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직장 오너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을 말씀드렸다.  아직 결정된 사항이 없으니 다시 뭔가 결정되면 다시  전화하기로 했다. 참 고마운 분이다. 이런 귀한 분이 오너라서 얼마나 감사한지.

병실은 저녁 8시가 되어가니  슬슬 취침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담당 과장님의 호출을 듣고 간호사실로 갔다.

과장님은 지난번 집중치료실 다녀갔을 때 전화 통화했던 그분이다.

간호사실 데스크 안쪽으로 들어가 모니터 화면 앞에 섰다. 화면에  떠 있는 사진은 남편의 것이라고 다. 설명 없이 화면만 봐서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과장님은 남편의 사진을 바라보며 설명하기 시작한다.


남편은 간경화, 간암으로 위 내부 혈관이 터져서 위장출혈을 일으킨 것. 현재 간과 림프절에 종양이 있는 상태. 이 상태는 4기 암이라고 판단.

간의 많은 부분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

앞으로 치료는 수술적 치료와 동위원소 치료 모두 부적합하고 가능한 치료는 표적치료제.

표적치료제로  치료를 해도 짧으면 3개월, 길게 1년,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3년을 버틴 환자도 있다. 남편이 4 기암이라는 것을 가족과 알려야 될 분들에게 빠짐없이 알릴 것을 권유한다.


그분은 침착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내게 설명했다.

나는 그 순간에도 무지했기에  3개월, 1년, 3년이라는 그 숫자들이 남편  생의 남은 날들이 될 수 있다는 절망보다는 표적치료제라는 방법이 있으니 치료해 보자는 희망을 뽑아냈다.

정말 무지했기에 그 순간 설명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눈물 한 방울 없이 다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  '가족과 친지, 알릴만한 분들에게 알려라'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날은 지금처럼 '장수국(長壽菊)'이라는 별명을 가진 데이지꽃이  찬란한 5월  중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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