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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May 12. 2024

신발도 옷도 없이 구급차를 타고

고3에게 공진단 대신 찬밥을 남겨두고 왔다

                        조카가 사다 준 슬리퍼



코로나 시국이어서 거의 모든 학교가 온라인 수업에 돌입했던 때.  

타지에서 캠퍼스 생활하던 딸, 고3인 아들이 당분간 먹을 반찬도 챙겨놓지 못하고 급하게 서울로 올라왔다.

고3  1학기는 내신 성적이 마무리되는 시기이다.

고3 중요한 시기라고 남들은 공진단이네 경옥고네 이것저것 챙겨 먹이는데 나는 찬밥 덩이만 남겨두고 집을 떠나왔다.



언제 집에 돌아갈지 모르고 앞으로 남편 투병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데 어쩔 수 없었다.

기숙사생활 1년, 자취생활 1년을 한 딸에게 동생을 잘 챙겨줄 것을 부탁했다.


이럴 때 친정엄마의 손길이 간절했지만 이 사태를 알면 날마다 전화통을 붙들고 울어대실 엄마를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보아온 바로 고난 앞에 엄마가 대처하는 방식인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내가 엄마의 엄마 역할을 해야 했다.  단칼에 미련을 거두었다.


대형마트 앱 쇼핑몰에 내 아이를 부탁하기로 하고 나는 손 안의 쇼핑몰을 열어 서울로 이동하는 동안 주문서를 작성했다.






동서울 종합터미널에 내리니 동생이 마중을 나왔다.  생수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겨 왔으나 어디서도 마스크를 내리고 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없었다.

함께 지하철과 택시를 갈아타고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주차장 한쪽에 마련된 검사소에 가서 PCR검사를 했다.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PCR음성결과받은 조카가 면접 일정이 끝나자마자 오후에 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남편의 보호자가 되어 집중치료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기게 도왔단다.

저기 어디쯤엔가 조카와 남편이 있을 텐데.. 생각하며 건물을 한동안 바라보다 발길을 돌려 동생 뒤를 졸졸 따라 언니 집으로 향했다.

몇 끼를 굶었는지 기력도 없고 막막했는데 초행길인 언니 집을 혼자 찾아갔으면 더 서글펐을 것이다.  시간 내 준 동생이 고마웠다. 이것이 형제애지.

다시 택시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아차산역에 내려서 언니 집으로 갔다. 오후 세 시가 훌쩍 넘었다.

언니는 대학병원 근무를 막 끝내고 집에 도착해 있었다. 언니를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언니는 언니였다. 며칠 새 언니는 수시로 내게 전화를 걸었고 동생은 따로 전화도 못했었다.




손수 끓인 육개장과 열무김치와 몇 가지 반찬을 내놓았다. 허기가 밀려왔다.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서 호호 불어 천천히 먹었다. 입이 까끌했지만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언니의 사랑을 다 먹었다.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라고 나를 채근하는 밥이었다. 동생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고 언니에게 보여주는 밥이었다.

지금도 그때 육개장을 잊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언니의 육개장. 조카를 보호자로 배치하고 (그때 안 하겠다는 조카에게 시급의 두 배를 용돈으로 주었단다) 나를 밥부터 먹인 언니의 보조간병은  지금도 나를 한없이 눈물 나게 한다.


소파에 잠깐 누웠다. 여전히 각성상태인 듯 잠이 오지 않았다.

내 발이 둥둥 떠 있는 듯하다. 발을 옮겨 걸어도 내 의지대로 안되고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발. 간신히 땅에 발이 닿은 듯하면 땅이 부스러기가 되어 발밑에서 물처럼 흘러가 버리고 다시 허공에 둥둥 뜬 발이 된 기분.


언니 속상할까 봐 입술을 꾹 다물고 눈물을 삼켰다. 눈을 뜨지 않았다. 벌건 눈을 보여서 슬픔을 나누기 싫었다.




그때 형부가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함께 신도림디지털마트에 다녀오자고 했다.


"제부 핸드폰도 없다며? 핸드폰 개통해야 내일 갖고 들어가지."

생각지도 못했다. 언니가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S사 최신형 모델을 골랐다. 그동안 어떤 기종을 썼든 최신폰을 가져다주고 싶었다.

번호 뒷자리를 우리 가족 공통번호로 지정했다.

여러 절차를 거쳤지만 영업시간 마감 등의 이유로  당일 개통이 불가하다고 하여 다음날 아침  오픈시간에 바로 찾으러 오기로 하고 언니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있는 남편은 어떤 상태일까?

조카는 간병하느라 얼마나 애쓸까?

조카의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었다.

이모부 잘 만났다고.

근데 병실 환자, 보호자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이모부가 자기를 못 알아봤다고.

"이모, 내가 이모부 신발이 없어서 병원 편의점 슬리퍼 사다 줬어. 근데 이모부가 누구길래 신발을 사다주냐고 지금 돈이 없어서 신발 산 돈을 못주지만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라고. "


대구 살던 조카를 5학년때 만나고 홍천과 서울로 이사 다닌 동안 15년 가까이 못 만났으니  마스크 쓴 얼굴을 몰라볼 수밖에.

집중치료실에서부터 이모부를 병실로 데려 온 조카를 병원 직원으로 알고 있었나 보다.

보호자도 없이 구급차에 실려 왔으니 신발도 뭣도 아무것도 없던 환자가 남편이었다.

신발뿐 아니라 속옷 한 장만 걸치고 응급실로 온 건지 환자복 외에 아무것도 없더란다.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구급차에 실려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맨몸이나 다를 바 없으니 수치심을 느꼈을 텐데 혼미한 정신이었다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웃픈 현실.


언니가 조카에게 속옷, 일회용 면도기와 세면도구, 목욕용품, 간단한 간식과 컵밥, 즉석밥 등은 어제 챙겨 보냈다고 한다. 추가로 남편이 입을만한 반팔티와 바지를 비롯해서 신발, 병원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었다.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간병하려면 너부터 잘 먹어야 하니까 밥 굶지 말고 뭐든 챙겨 먹어."

내 몫으로 홍삼제품, 비타민을 따로 챙겨주고 당분간 쓸 가용비도 넣어주었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이 참 녹록지 않았다.

친정 식구들은 내 삶을 두고 하나님 안 믿었으면 진작 이 세상 사람 아니었을 거라고  한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우는 것이었다. 울 수밖에 없는 삶이었고  아무것도 내 의지대로 안 되는  삶이었다.






다음 날 6시 40분쯤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검사결과 메시지다. 음성.

일찍 서둘러 다시 핸드폰을 찾으러 갔다. 그런데 매장 오픈 시간이 지났음에도 매니저가 나타나지 않았다.

 애가 탔다. 빨리 병원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제 그렇게 상황 설명을 하고 부탁을 해놓았건만.

형부가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재촉을 했다.

한  시가 급한데... 이미 조카는 일정 때문에 병원을 나왔다고 한다.

매니저 도착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하니 어쩔 수 없이 이웃 매장 매너저에게 일처리를 부탁하겠다고 했다.  


핸드폰을 갖고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쿵쾅거렸다.

병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언니가 차에서 상자를 여러 개 내렸다.

"이게 다 뭐야  언니?"

"응, 여기에 얼마나 머물지 모르는데 필요한 것들을 좀 싸봤어."

"근데 너무 많다  언니."

"다 필요한 것들이야. 내가 병원 근무하니까 알아서 챙겼어. 이건 병동 간호사 간식이고 이건 옆 병상 환자 보호자들 나눠줘. 받기만 하고 그냥 있기 민망하잖아. 그때 필요할 거야.

이건 제부랑 너 먹을 간식...~~~~"

한참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간호사들 힘나게 하는 게 있는데 고객소리함에 칭찬편지야. 병동 복도나 휴게실 찾아봐. 고마우면 편지로 표현해."

슬기로운 병원생활 팁도 얹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아까 민찬이 전화 왔었어. 어젯밤 자정 다 되어서 추가 검사가 또 예약되었었는데 저녁 식사를 6시쯤 병실에 갖다 줬나 봐.  검사 때문에 금식이라 식판을 도로 내놓으려니 이모부가 이따 검사 끝나고 와서 먹겠다고 그냥 두라고 했대.

다 식은 밥을 자정 넘어 먹겠다니 얼마나 밥이 먹고 싶었으면.. 그 얘기 들으니 눈물 나더라."


병원 들어와서 첫 밥인데 그동안 일주일 가까이 응급실을 거쳐 집중치료실에 있었으니 밥이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입술을 또 한 번 앙다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없이 짐을 병원 출입구 쪽으로 옮겼다.

짐이 너무 많으니 출입을 통제하는 분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르기를 도와주도록 허락해 주셨다.

짐을 옮겨주고 언니와 형부는 돌아갔다.

나는 병동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누르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짐을 내놓았다. 병동  입구가 유리문으로 막혀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분이 계셔서 짐은 엘리베이터 앞 휴게실 한쪽에 두고 얼른 따라 들어갔다. 간호사실이 보였다.

남편 보호자라고 얘기하고 짐이 휴게실에 있으니 옮겨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우선 짐부터 옮기라고 출입카드와 짐 옮길 때 쓰는 카트를 내주었다.

눈앞에 남편이 있는 병실이 보였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낯선 도시에서의 간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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