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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May 08. 2024

PCR검사라는 복병

기초생활수급자 신청하다

두려워하던 일이 실제상황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종양의 크기와 개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방음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반대쪽 상황이  눈으로는 보이는데 귀로는 들리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랄까...

충분히 파악되지 않은, 그저 막연한.

한 번 쿵! 하고 내려앉은 심장이 점차 경화되어 어떤 충격적인 말에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둔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의 병증에 대한 걱정보다 또렷해진 의식으로 집중치료실에서 당분간 있어야 하는 게 더 걱정이었다.

그곳은 회복을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회복 불가한 환자가 서서히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말짱한 맨 정신으로 죽어가는 자들의 소리를 듣고 봐야 하니 그 공포가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 그 생경한 경험이 이후 치료 과정에서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었다.


역시 나는 무지했다.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무지하고 막연하고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무서웠다. 눈을 질끈 감고 상황을 외면하고 싶었다.  전화통화로 들은 간단명료한 소화기내과 과장님의 진단을 보충해 줄 만한 자료나 정보를 검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병증을 이해하고 싶지가 않았다. 병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생길수록 내 심장은 더 경화증이 깊어질 것 같았다.

두려웠다. 그 모든 게.

그를 두고 내려온 나는 지금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일까?

암보험 한 개도 없는 남편의 투병기간 동안

앞으로 치료비는 어떻게 충당하나 이런 걱정이 더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자체나 기관의 도움을 받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했다. 공공기관의 오픈 시간에 맞춰

다짜고짜 주민자치센터를 찾아가 문의를 했고 동시에 모든 상황을 친정오빠에게 알렸다. 행정적인 부분에서 실질적으로 의논을 할 수 있는 가족은 오빠뿐이었다.

어제 하루를 종일 굶고 오늘 점심이 다 되도록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각성상태였다.

일단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다.

우리에겐 부동산이 없고 (소유했던 건물이며 땅을 모두  다 날리고 부채만 남은 상황) 현재 남편은 무직이며 나도 채용은 되었으나 두 달을 실직상태로 있다가 간신히 한 달 남짓 근무한 상태.




남편은 바닥에 무너져 버려 회생 불가한  사업장을 부여잡고 동기간들에게 융통해 온 돈마저 은행 이자로 다 발리고,  남은 돈은 살고 있는 아파트 임대 보증금이었다.

임대기간이 만료되고 분양  전환을 할 때, 살 곳마저 은행에 내어주고 집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될 것을  염려하신  친정부모님께서 분양 당시 아파트 명의를 친정어머니  이름으로 등기하셨다. 물론 분양가에서 임대보증금을 제외한 나머지 부족한 돈을 한 번 더 융통해 주셨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반은 우리 집, 반은 엄마집. 행정적으로는 엄마집.

신청은 했지만 하루가 급한 내 맘과는 달리 처리 기간은 한 달이 소요된단다.

주민센터에 신청해도 상급기관으로 이첩되어야 하니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오빠가 친구찬스를 썼다. 서류가 재빨리 이첩되어 처리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상급기관에 빠른 처리를 부탁한 것.

그러느라 전화통화는 불이 났다.

간신히 서류  신청을 완료하고  집으로 와서 잠깐 쉬었다가 출근 준비를 했다.




직장에 출근해서 오너에게 간략히 상황 설명을 했더니 몹시 안타까워하며 위로해 주셨다.

반면 협업을 해야 하는 동료는 직장 그만두려고 핑계 만든 것 아니냐며 반신반의했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렴 퇴사 사유를 포장하기로서니 남편의 중병을 거짓으로 내세울까.  말이 씨가 된다는데.

나는 황당하고 서러웠다. 이제 근무 한 달 남짓이니 나를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했다지만, 어느 경우가 이럴 수 있는 것인지.  위로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런 폄훼 발언이라니.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간신히 이를 악물고 온 힘을 쥐어짜 내어 근무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무것도 알 리 없는 친정엄마가 호출을 하셨다.

엄마는 없는 걱정도 사다 하실 분, 남의 걱정도 뺏어다 하실 분이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기함하고 쓰러지실 것 같으니 비밀로 하자고 동기간들끼리 함구하기로 했었다.

엄마의 호출은 간단한 것이라서 해결해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물 밖에 먹은 게 없으니 기력이 나질 않았다.

그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근무자가 교대할 때마다 친절하게 상태를 전화로 알려주곤 했었다. 그런 전화겠거니 하고 받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었고 의사소통도 가능하고 전반적인 검사도 완료했으니

더 이상 집중치료실에 있을 이유가 없다 했다.

일반 병동으로 옮겨서 음식물도 섭취해야 하고 앞으로 치료 방향도 결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보호자가 상주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의 보호자는 나인데, 나 밖에는 간병할 사람이 없는데 그러면 생계는 어찌해야 하나.




남편이 누워있는 병원은 3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이고 병원을 출입하려면 PCR 검사를 해야 한다.

검사 결과는 하루 이후 통보,  아침 일찍 검사하면 당일 저녁에도 나올 수 있다니 근처 종합병원으로 가보자.

일단 직장 오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드리고 출근을 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올라가 봐야 알 수 있다고 다시 연락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이제 한 달 남짓 된 직장 오너의 배려.

오너는 직장일은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가서 경과를 보고 통화하자고 하셨다.

참 감사했다. 눈물이 마구 쏟아져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꺼이꺼이 울면서 바로 차를 돌려 5분 거리 권역응급의료센터로 달려갔다.

그런데 무증상자, 확진자와 경로가 겹쳐 보건소의 안내 문자를 받지 않은 사람은 검사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차를 돌려 3분 거리의 준종합병원으로 갔다. 검사를 해주겠단다. 그런데 검사결과가 내일 10시 시 이후에  나온단다. 오늘 자정  안으로 검사결과가 나오는 시료는 이미 조금 전 수거가 된 상태라는 것이다.

오늘 안으로 남편이 있는 병원에 들어가기는 틀렸다.




서울에 사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 요청을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올라와서 거기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언니집에 머물다가 낼 새벽 결과 나오는 대로 바로 병원에 출입하는 것.

그리 진행되면 집중치료실에서 하루가 지체되는데 일반병동으로 가고 싶어도 보호자가 없어서 갈 수 없는 이 상황을 언니가 너무 안타까워했다.

강동 **병원에 근무하는 언니가 거기 드나드는 간병인들에게 정보를 얻어 백방으로 간병인을 구하려고 알아봤지만 PCR검사 상황이 여의치 않은 데다 하루 이틀 간병하자고 PCR검사까지 하고  일을 구할 분은 없다고 했다.

언니네 아들, 즉 조카가 입사 면접 보느라 어제 PCR검사를 했었는데 오늘 오전 면접이 진행되니 면접 끝나면 바로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가서 보호자 역할을 대신하게 한다는 묘수를 내었다.

언니와 조카가 너무 고마웠다.

이때 면접이라니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조카는 그 면접에 통과하여 지금도 꿈의 직장이라 여기고 이직은 인생에 없는 단어쯤 생각하며 근무하고 있다)

초등학교 이후 이모부를 못 만난 조카가 남과 다를 바 없는 이모부  보호자 역할을 해주겠다니 너무 고마웠다. 언제나 어리게만 보이던 조카가 어엿한 20대 후반 청년이 되어 이모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친정 오빠와 언니가 한 마음으로 도와주었다.

부랴부랴 옷가지 몇 개와 간병에 필요한 물건과 성경책을 챙겨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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