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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May 03. 2024

불빛은 꺼져가고

집중치료실에 남편을 두고 내려왔다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을 뻔했다.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편의 얼굴은 살이 쭉 빠져 깊게 파인 주름과 엉성한 앞 머리칼 몇 가닥이 나이보다 스무 살은 더 많아 보였다.


고마웠다.  이렇게 승강기 앞에서 마주치다니.

등을 좀 더 빨리 돌리고 벽을 향해 있었더라면,

내가 서 있는 곳이 승강기 앞쪽이 아니었더라면,

남편이 이동 중에 눈을 감고 있었더라면, 검사 시간이 그 시간  아니었더라면

집중치료실의 환자를 어찌 만날 수 있었을까...

상황이 고마웠다. 뭔가 좋은 기운이 저 밑에서 꿈틀대는 것 같았다.

의식이 뚜렷하여 나를 알아보았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촌각을 다투는 급성 환자는 아니라는 결론.


"언제 왔어? 어떻게 왔어?"

남편도 그곳 그 시간에 나를 만날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겠지.

"도련님차 타고 소망이 소찬이랑 함께 왔어. 지금 주차장에 있는데  들어올 수 없어서 나만 올라왔어."

"애들도 왔어?"

그의 희미한 목소리가 조금 짙어졌다.

그토록 보고 싶은 딸, 아들이 여기까지 왔다니 울컥하게 반가웠고 주차장에서 못 올라왔다니 아쉬웠을 것이다.


그때, 승강기가 도착했다는 알림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의 이동 동선을 함께  따라갈 수 없었다. 바쁜 주치의를  빨리 만나려면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치료 잘 받고 있으라고 코로나 검사하고 다시 오겠다고 짧게 인사를 나누니 승강기가 닫혔다.


반짝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게 무슨 일인지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쩌다가 남편은 이 낯선 곳에서 할아버지가 되어 집중치료를 받고 나는 그의 보호자가 되어 세 시간이 넘는 거리의 이곳에 왔는지 앞으로 이런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지 너무 막막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도 가장의 울타리는 너무 허술해서 무너질 울타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울타리가 되어야 했다.

심리적 가장으로 지금껏 살아왔으니 조금 더 힘을 내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야 했다.

내 등뒤에는 부모의 지원이 필요한 딸과 아들이 있었으니까.


거센 폭풍을 이끄는 요란하고 눅눅한 바람과 무거운 먹구름이 몰려오는 마당  한가운데 나가 서 있는 듯했다.  그 비바람이 얼마나 거셀지, 얼마나 오래 불어닥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집을 지키기 위해 비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이제는 홀로 울타리가 무너지지 않게 버텨야 했다. 내가 울타리이고 내가 울타리를 지켜야 했다.


눈물을 닦았다. 한없이 울고만 있어서는 안 되었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라고 삶이 내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아팠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 주치의를 만났다.


계속 검사가 진행 중이다. 위장출혈로 많은 피를 쏟아냈는데 지금은 출혈이 멎었다. 위 내시경  결과는 나쁘지 않다. 위중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추가 검사를 진행하고 다시 얘기하자.


그는 말을 마치고 총총 사라졌다.

위중한 상태가 아나라니 안도의 숨이 나왔다.

거센 폭풍우는 아니고 소나기일까?

나는 단순하고 무지했다. 출혈의 원인과 집안 내력을 연관시켜 생각해보지 못했다.


병원을 들어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원무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보호자로서 감당해야 할 책무를 듣고

환자 정보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기재하였다.

병원 측에서도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연고 환자로 처리를 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이니 보호자 찾기에 힘을 쏟은 것이다.

그러다 간신히 알아낸 것이 시누이의 사업장 전화번호. 남편은 구급차로 실려올 때 간성혼수,  섬망 증세가 있었고 증세가 호전되면서 그의 입에서 나온 번호가 전에 운영했던 사무실 번호였다.

아내번호도 딸, 아들 번호도 아닌 예전에 운영하던 사무실 번호라니... 그의 기억 심연에는 무엇이 가장 크고 무겁게 자리 잡았던 것일까...

본인 의지와 다르게 어긋난 사업장 운영과 생계수단이 그를 그토록 짓누르고 있었나.

그저 무책임한 가장, 이기적인 가장이라고 치부하기엔 기억 속 가장 중요한 전화번호가 그것을 증명해주지 않았다.


남편이 행정서류상 등록된 주소는 결혼 전 살았던 옛 집이었고 현재 아무도 살지 않는 옛 집에  단독으로 혼자 등록되어 있다.  행정기관에서도 개인정보를 허술하게 관리하지 않으니 보호자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집중치료실은 면회 불가하여 보호자가 굳이 병원에 상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최근 이직한 내 직장의 출근이  떠올랐다.

위중하지 않다고 하니  다시 집으로 내려가서  병원 상황을 지켜보며 근무를 할 계획이었다.

감사인사를 거듭 전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주치의에게 들었던 내용을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일단 환자를 만날 수 있었고 대화를 나눴으니 그것만으로도 안도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제야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어찌 지냈는지 안부를 묻고 휴게소에 들러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자고 했다.

시동생은 이제 형 몸이 아프니 트럭배차를 중개하는  사무실을 차려서 형이 힘들지 않게 하도록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했다.

고마웠다.

20대 중반에 부모님을 다 잃은 시동생에게 힘이 되어주지도 못한 형과 형수였는데 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분당쯤 지날 때였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소화기내과 과장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응대했다.

보호자를 직접 대면하여  환자 상태에 대한 얘기를 나눠야 하는데 지방에 거주하고 이미 보호자가 병원을 떠나왔으니  전화로 전달한다고 했다.

마음이 두근두근거렸다. 불길한 예감.


검사결과,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크기가 작지 않고 한 군데가 아닙니다.  위장출혈은 간암환자 중증에게서 발현하는 증세 중 한 가지입니다. 당분간은 집중치료실에서 치료할 예정입니다.


쾅! 쾅! 쾅!

내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최종판정을 내리는 교수님의 망치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3년 만에 만난 남편을 집중치료실에 두고 다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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