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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May 01. 2024

어둠 속 희미한 불빛

남편이 나를 알아보았다


궁금했다. 남편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에서는 왜 시누이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일까?

남편은  어쩌다가 병원에 누워있는 것일까?


시동생 차를 타고 안부도 물을 새 없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한바탕 울고 나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출발은 했지만 작은 시누이가 전달해 준 내용만으로는 어디 병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시누이는 사업장으로 온 병원 전화를 받자마자 당황하였고  병원이름을 듣고도 잊어버렸단다.

일단 고속도로 진입 방향으로 달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031로 시작되는 병원 전화번호였다.  그 번호로 전화를 했지만 발신 전용인지 불통이었다. 포털에 바로 검색을 했다. 병원 대표번호가 아니어서 뜨지 않았다. 112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에서는 119에서 전화번호 위치를 추적할 수 있으니 그곳에 문의를 해보라고 했다.

다시 119에 전화해서 긴박한 사정을 설명하고 발신전용 전화번호를 알려드렸다.

우리의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신 119 덕분에 그곳이 경기북부도시 **병원쯤으로 위치가 파악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 도움 주신 콜센터 담당자님 진심 감사드립니다)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자세한 정황을 얘기하고 환자이름을 알려준 후  입원여부를 문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원무과 직원과 통화가 되었다.

 그곳에서 치료받고 있단다. 의식이 있단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단다.


제발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라도 버텨달라고, 기다려 달라고,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고, 그동안 딸, 아들이 많이 컸다고 얼굴은 한 번 봐야 되지 않겠냐고 되뇌며 하염없이 울었다.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아무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달렸다.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PCR검사하느라 긴 줄이 서  있었다.

시동생은 주차장에서 한숨 돌리겠다고 하여 아이 둘을 데리고 현관 입구로 갔다.

병원 현관 입구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곳은 코로나19가 종합병원 중 첫 번째로 발생한 곳이어서 PCR검사를 하지 않으면 출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난감했다. 통사정을 해도 안되어서 다시 원무과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직접 현관 입구로 나오겠다고 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었다.  그분도 보호자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단다. 여러 명이 출입할 수는 없고 보호자 한 명만 가능하다 해서 아이들은 차에 돌아가 기다리기로 했다.


그를 따라 프리패스로 원무과 사무실로 들어갔다.

먼저 남편의 상태를 물었다.

남편은 뇌출혈이 아니라 위장출혈로 구급차에 실려  5일 전에 병원 응급실로 왔다.

당시에 정신이 혼미하여 질문에 답변이 정확하지 않았다. 집은 어디인지, 보호자는 누구인지, 연락처는 몇 번인지 물어도 모른다고만 했다.

최초 119 신고자도 환자 보호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환자 핸드폰도 없었다.

며칠 동안 금식하고 치료와 검사를 진행했다.

그러는 동안 의식이 차차 회복이 되면서 연락처를 묻는 질문에 보호자가 없다고 했다. 끈질긴 질문에  마침내 시누이 사업장 번호를 알려줘서 간신히 연락이 닿았단다.

분주한 사무실 직원들과 달리 그는 차분하게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남편은 현재 집중치료실에 있어서 면회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철저히 방역수칙을 지켜야 해서 집중치료실 환자는 면회 불가라고 했다.  대신 주치의를 만나볼 수는 있다고 했다.

PCR검사도 없이 병원 출입을 했는데 집중치료실 출입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원무과 직원의 안내로 집중치료실 근처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주치의를 만나 현재 상태를 들어보고  이후 다시 원무과로 내려오라고 했다.


한없이 눈물이 났다.

지나온 삶이 정말 지긋지긋하게 고달팠는데 마침내 짜인 각본대로 파국으로 치닫는 기분이었다.

차갑고 조용한 복도에서 서럽게 조용히 흐느꼈다.

두려워하던 그것이 마침내 내 앞에 다가왔고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해서 처량하고 무기력했다.

그때 전방에 흰 덮개포로 몸을 덮고 얼굴만 내놓은 환자가 간이침대에 실려 이동하는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벽 쪽으로 몸을 돌려서 눈물을 닦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망엄마!"

낮고 희미했지만 분명 내 딸 이름이 들어간 호칭.

간이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남편이었다.

초췌하고 바싹 마른 얼굴의 남편이  먼저

알아보고 나를 불렀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승강기 앞쪽이었는데 남편이 검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이동하려고 집중치료실을 막 나서는 참이었다.

딱 3년 만이었다. 그렇게 3년 만에 낯선 도시  병동 복도에서 할아버지 얼굴이  되어버린 남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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