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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May 25. 2024

당신이 가야 할 집

눈시울 적시는 저녁노을 귀향 길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에도 햇살이 눈부셨다. 형체도 없이 쏟아지는 햇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일순간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버릴 것 같은 날. 그늘 속에 서서 햇볕 가득한 풍경을 바라보면 빈혈처럼 눈앞이 하얀 도화지가 되어 3초쯤 눈살을 찌푸려야 하는 그런 날 한낮에 우리는 병원건물을 걸어 나왔다.


병원에서 퇴원한 남편이 머물 곳은 어디일까?

그가 살아오면서 거쳐온 많은 집이 있었다. 지나 온 그 집들에 오래 머물 수 없어서 또 다른 집을 찾아 떠나야 하는 고된 삶이 여기까지 이어져 왔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고 넘어지고 깨졌다.

그러는 사이에 몸은 중병으로 시들고 이제 일어설 힘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가.

우리는 떠밀리듯 병원 밖으로 토해졌지만 돌아갈 집이 있어서 다행이다. 기다리는 가족이 있어서 다행이다.

입술을 지독하게 깨물고 큰 덩이 음식을 삼킨 듯 목울대가 아파와도 기어이 가야 할 집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그만 떠돌자. 회생하려 해도 집이 있어야 하고 죽음을 준비하려 해도 집은 있어야 한다.

먼지처럼 이리저리 떠밀리지 말고 이제는 집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살든 죽든 해보자.




아침  회진 때 주치의는 당일부터 바로 표적치료제로 치료를 시작하자고 했다. 뜻밖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지난 주말에 분명 내과 과장님은 오늘 퇴원하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바로 치료를 시작하자니 그럼 퇴원이 아니란 말인가?

퇴원할 줄 알고 고향에 사는 시동생에게 형을 태우러 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시동생이 호남고속도로를 이미 벗어나 경부선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고 했다. 다시 차를 돌려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장님이 호출을 했다.

"하루 이틀 치료시기가 늦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으니 고향에 가서 치료를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정대로 퇴원 절차를 진행하고 시동생에게 다시 차를 돌려 올라오라 전했다. 남편 친구에게도 알렸더니 내려가기 전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한다. 언니에게도 알리니 챙겨갈 것들이 있다고 가는 길에  집에 들르라고 했다.

분주하게 짐 정리를 하는데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사회사업팀에 신청했던 결과 안내 문자였다.

기부금 수혜 선정대상에서  탈락되었다. 내심 기대를 했건만, 더 급박한 누군가가 있겠거니 했다.


남편의 분노는 조금 사그라들었는지 짐을 챙기는데 호의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나.

병든 몸이지만 딸, 아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지역병원에서 새로운 치료를 시작한다는 기대가 있었을까? 나조차도 표적치료에 기대를 거는 마음이 있어 훨씬 가벼웠다. 3개월, 길게는 1년, 드물게 3년...이라는 내과 과장님의 말은 까마득히 잊은 채.


먼저 짐을 챙겨 1층 로비에 옮겨놓고 수납 업무를 진행했다. 다시 병동으로 올라와 전원시 필요한 서류 등을 챙겼다. 남편은 큰 가방을 들고 가려했다. 나 혼자 감당하기 벅찬 짐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병색이 완연한 그에겐 작은 가방조차도 들게 할 수 없었다. 혼자서 메고 들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병원에 들어온  후로 처음 외부로 나가는 거라서  눈이 부셨다.

이 길이 여행길이면 얼마나 좋을까. 깨끗하게 치료되어서 퇴원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남편은 6년의 임시거처살이를 접고 응급실과 집중치료실과 일반병동을 거쳐 말기간암환자가 되어 고향길에 올랐다.


표적치료제로 치료하면 극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남편친구와의 점심 식사자리에서도 눈물을 함께 삼키는 일 없이 음식만 삼킬 수 있었다. 근동에서 갈비탕으로 유명한 고급 식당이라는데  안 껄끄럽고 피로감에 국물만 삼키다 나왔다.

경기도를 벗어나 서울에 진입하여 언니에게 전화를 하니 마침 데이 근무를 마치고 퇴근했단다.

제부를 걱정하며 눈물바람하는 언니 앞에서도 너무 걱정 말라며 오히려 언니를 안심시켰다. 한 고비를 넘겼고 이제 회복은 시간문제인 환자의 보호자처럼 굴었다. 언니는 폭삭 늙어버린 제부와 간병할 동생 부부를 어찌할 바 모르고 안타까워했다.

악성종양이 vip멤버십 카드라도 되는 양 최선의 배려를 받았고 어느 누구도 우리 앞에서 죄인처럼 굴었다.

앞으로 어떤 투병기가 될지, 병원 치료비는 어떻게 감당할지 그런 염려 따위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그만큼 중병이라는 걸 그땐 정말 몰랐다. 매일매일이 다음 날보다 그나마 건강이 더 좋은 날이었다는 것을.




미리 딸아이에게 전화로 아빠 저녁식사를 간단하게라도 준비해 놓으라고 했다. 낮에도 식당에서 먹었는데 집에 와서 첫 끼를 또 외식으로 할 수 없어서 집에 있는 반찬과 부드러운 계란찜을 부탁했다.

내려오는 동안 남편은 시동생과 어릴 적 이야기, 고향에 남아있는 동네 친구들 근황 등 전혀 암환자 같지 않게 끊임없이 대화를 했다. 차 안 분위기는 마치 경사에 참석하느라 먼 길을 다녀오는 귀성 분위기와 흡사했다.


술만 먹으면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키우려고 한 게 아닌데..."울던 남편.

아무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없이 애처롭게 아이들을 바라보던 남편.

부모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자식들에게 어떻게든 양분을 대어주겠다고 몸부림을 쳤건만 결과는 허망하게 긴 이별과 병든 몸이었다. 그 모든 책임을 우를 가장 안전하고 제대로 된 방법을 몰랐기에 몸이 부서졌다.


톨게이트에서 집으로 가는 방향은 서쪽. 해가 저무는 저녁 하늘이 집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구부러진 길 따라 보였다 사라졌다 하면서 점차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릴 때 배가 고프도록 뛰어놀다 보면 집에 돌아가야 할 때, 옷에 묻은 흙먼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고 신발을 벗어 돌멩이에 내리쳐 모래를 떨어내다가 문득 바라봤던 하늘.

어린 눈에도 먼 들판 건너에 납덩이를 달고 쏟아지듯 하는 해를 품은 하늘이 너무 고와서 입을 벌린 채 바라보던 그때가 떠올랐다.

집에 빨리 들어가자고 채근하며 내 팔을 잡아당기던 언니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노을 지는 하늘을 두고 갈 수 없어서 뜨거워진 눈시울로 뒤돌아보곤 했던 그 하늘.


갑자기 차 안 어딘가에서 보골보골 밥물 잦아드는 소리가 들리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자욱이 나는 듯했다. 남편과 시동생의 이야기 소리가 가물가물하더니 어느새 나는 어스름 저녁을 배경으로 걷는 똑 단발 어린 소녀가 되어 있었다. 노을이 서글프게 아름다워도 끝내 풋내 나는 열무겉절이와 고봉밥 저녁 밥상이 있는 집으로 총총총 걸어가는 소녀.

그 시절이 뜬금없이 떠올라 나는 엄마~~ 하고 크게 부르며 달려가 엄마 품에 안겨서 그냥 막 울고 싶어졌다. 그러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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