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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Jun 05. 2024

지역병원 첫 응급실행

구급차와 경찰차가 출동했다


연어는 강에서 산란하며 치어(穉魚)는 거의 1년 동안 강에서 살다가 바다로 내려간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다시 돌아와 알을 낳는 모천회귀(母川 回歸) 본능을 갖고 있다.....
상류로 갈수록 강물은 깊어지고 바닥에는 자갈이 많아진다. 드디어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연어는 지친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산란하고 서서히 죽어 간다. (지식백과)




고향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어떠했을까?

암진단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과의 시간을 충분히 거치지 못한 채 남편은 느닷없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도피하듯 떠난 고향에 회한의 더께로 무거운 걸음을 하고 질고의 패배자가 되어 돌아왔다. 고향을 떠날 때는 돌아올 시점도 구실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병든 몸이 되어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가족이 있는 집으로 온다는 안도감인지,  표적치료제라는 알약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 건지 얼굴이 전보다 편해 보였다.

남편이 내려온 날 우리 온 가족은 거실에 모여 함께 잤다. 이제 죽어도 함께 있자는 모종의 결의였다.

그러나 남편은 숙면을 하지 못하는 듯 밤새 뒤척임이 많았다. 누군들 숙면을 할 수 있었겠나.


친정 오빠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틀 후 지역병원 소화기내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진단서. 소견서, 입퇴원 요약기록. 투약기록. 의사지시기록. 검사보고서 등 100페이지가 넘는 기록들과 CE. CT. ES. MR. NM의 영상 기록이 있는 DVD를 챙겨서 지역 병원으로 전원 했다.

먼저 DVD를 등록하고 진료실 앞에서 오래 기다려 진료를 받았다.

교수님은 진료기록을 세세히 살펴볼 시간적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이미 남편의 상태가 중한 상태인걸 알고 있었다. 표적치료제에 대해 기본적인 설명을  곁들여 처방해 주셨다.

처음 표적치료제 알약 1일 1회 2정. 개인차가 있으니 일단 2주 동안 복용해 보기로 했다. 경우에 따라 현재 4주에 한 번 내원하는 환자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혈압측정기와 단백뇨 검출 시약을 처방받았다. 매일 일정시간에 측정하고 수첩에 수치를 기록하라고 했다. 2주 후에 다시 만나기로, 진료 전 소변검사와 혈액검사를 한 후 결과에 따라 처방을 변경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두었다.


아이들도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어 집에 머무르는 때였기에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준비했고 그동안 먹지 못했던 집밥을 정성껏 챙겼다. 그러나 남편은 입맛이 없는지 잘 먹지 못했다. 어릴 때 즐겨 먹었던 음식이 생각나면 가끔 먹고 싶은 음식을 부탁했고 나는 말하는 족족 마트에 나가 식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들었다. 음식을 보면 시동생 막둥이를 불렀고 시동생이 퇴근 후 집에 와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바쁜 와중에도 시동생은 이틀에 한 번 혹은 날마다 퇴근 에 들러서 형을 보고 갔다.


딸은 아빠에게 살가웠지만 아들은 무뚝뚝했다. 고3 1학기 내신 성적이 마무리되는 시기였기에 예민해져 있기도 했다. 아빠는 아들을 어떻게 이뻐해야 할지 표현에 서툴렀다. 아들은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시기부터 말 수가 급격히 줄었고 그때 아빠는 6년 가까이 곁에 없었다. 면도기를 사줘야 할 때, 몽정을 처리해야 할 때, 더 편한 속옷은 드로즈인지 트렁크인지 아빠의 한 마디가 필요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들 서먹하기는 아빠도 마찬가지.  그저 한 번씩 아들을 불러 일부러 심부름을 시키거나 함께 tv를 시청하자고 했다. 아들은 아빠 말을 따라주었지만 더 이상의 적극적인 표현은 없었다.

남편이 가장 활짝 웃는 때는 시동생과의 식사 시간이었다. 서로 반찬을 밀어주고 오래전 이야기를 하며 식사할 때 시동생은 조카들도 챙기며 살뜰했다.  




그동안 주민자치센터에 신청했던 결과가 나왔다. 이번에는 기초수급자에 선정되었다. 센터에 방문해서 작성할 서류가 있다고 해서 나와 남편과 딸이 함께 외출했다.  나는 센터에, 남편과 딸은 기다리는 동안 근처 안경점에 갔다 오기로 했다. 눈이 침침한지 노안이 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돋보기를 맞춰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간이 안 좋으면 시력저하가 당연한 것인데 그걸 연관 짓지 못했었다. 말기암 환자인데 정상 범주대로 기능했겠나. 관련된 새로운 증세가 계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부가 거칠어지면서 각질이 비늘처럼 떨어졌다. 걸어 다니는 곳마다 하얗게  떨어졌다. 남편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눈치채지 못하도록 각질을 닦아내고 털어냈다.


남편이 돋보기안경을 찾은 이유는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책.

남편이 집으로 내려왔다는 연락을 받고 목사님께서 바로 심방을 오셨다. 목사님은 간단히 예배를 드리시고 돌아가셨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구원에 대해 남편에게 전했다. 남편은 처음엔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읽었다.

환자라 읽기에 오래 집중할 수 없었다. 돋보기를 오래 쓰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잠깐잠깐씩 읽었다. 종교서적에 포함되는 체험수기 책을 매일 조금씩 읽었다. 책이라고는 손에 붙잡지 않던 사람이 병들고 나서 책 읽는 모습을 보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모습이 처량했다.


주일이 되니 아들 딸만 교회에 데리고 갈 수 없어 남편에게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자고 했다. 단박에 싫다고 했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주일 성수(주일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를 빠짐없이 했었는데 남편만 홀로 두고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결단을 하고 목사님께 남편과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이들만 교회에 보내고 남편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버티던 남편이 순순히 예배에 동참했다. 남편도 어떻게든 살아야겠다의지를 보인 셈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의도보다 예배드리고 기도하면 병이 나을 거라는 바람이었다.


남편이 아프지 않았을 때에 마음속에 늘 남편 영혼구원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예수님 믿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몸이 아파서 그걸 계기로 믿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그런데 덜컥 그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알 수 없었다.




남편이 지역병원을 다녀오고 처음 한동안은 아파트 주차장이나 놀이터에 나가 걷기 운동을 했다. 운동을 하면서 근처 식당에서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포장해오기도 했다. 아픈 아빠가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은 많지 않았다. 짧은 외출도 몹시 피곤해했다.

은행에 가서 계좌를 개설했다. 아픈 말기암 환자가 은행 계좌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것은 삶에 대한 의욕의 표현이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주는 코로나 생활지원금을 개설한 통장에 입금시켰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흔적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도록 했다. 가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몸이 많이 아프니 돈을 갚아달라고 요청했다. 못 들은 척했지만 남편도 그것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아서 어떤 속사정인지 알 수 없었다.


6월이 다가오면서 날씨가 점차 더워졌다. 창문을 열어 두어야 했는데 남편은  체온조절 기능조차 떨어져 몹시 추위를 탔다. 겨울 극세사 이불과 두꺼운 토퍼를 사용했다. 그러고도 비가 오는 날에는 추워서 창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갈수록 날이 더워질 텐데 새로운 불편함이 생겼다. 밤새 TV를 켜놓고 자는 둥 마는 둥 숙면을 하지 못했다. 가려야 할 음식이 있는데 인스턴트 음식을 찾아 식사 대신 먹으려 해서 거기서 비롯된 실랑이가 생겼다.


서울에서 언니는 몸에 좋은 음식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버섯종류, 장어, 소고기, 심지어 파프리카 채소 종류까지 마음이 일렁일 때마다 식재료를 주문해서 보내주는 것 같았다. 애가 타는데 도울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식재료가 넘쳐났고 남편이 시동생을 부르는 횟수가 더 잦아졌다. 시동생 또한 퇴근 후에 전화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없냐고 묻고,  대답하는 대로 사다 주었다.

그런데 말기암환자가 식이요법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우리는 그만 무지로 인한 응급실행을 해야 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중국에서 귀국했다.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남편을 따라 중경에 가서 산 지 3년.

 그런데 코로나가 발생했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간신히 항공편이 열려서 친구만 급히 귀국했다. 격리기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친구가 만나자고 했다. 딸에게 아빠를 2시간만 부탁하기로 하고 친구 집을 방문해서 오랜만에 안부를 묻고 간단한 다식을 하고 위로를 받고 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베란다 쪽을 향해서 의자를 내놓고 윗옷을 벗고 앉아 있었다. 체온조절 기능이 떨어져서 춥다 춥다를 입에 달고 있던지라 당황스러웠다. 오자마자 춥지 않은지 물어보니 안 춥다고 했다.

뭔가 이상했다. 다 큰 딸도 있고 하니 어서 옷을 입으라고 했더니 화를 냈다. 곧 저녁시간이 되어 식사 준비에 들어갔는데 자꾸 내게 짜증을 냈다. 평소와 많이 달랐다. 본인 처지가 그런지라 내 외출이 못마땅했나 싶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안 하겠다고 했다. 시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시동생이 퇴근하고 간신히 남편을 설득해 밥을 조금 먹었다. 아침에 먹는 표적치료제 외에도 먹어야 할 약이 매 끼니마다 있었다. 발등의 부종은 여전해서 다음 진료 때는 부종 약을 처방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동생이 돌아가고 나서도 남편은 덥다고 상의를 탈의하고 밤새 잠을 안 자고 집안을 서성였다. 아침이 되니 식사를 안 하겠다고 화를 불같이 냈다. 표적치료제가 아침 복용이기에 간신히 온갖 비위를 맞추어 약을 먹였다. 점심은 거르고 저녁이 되어가자 더욱 거칠어져 갔다. 단순히 심리적 변화에 의한 분노를  벗어난 듯했다.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다시 시동생을 불렀다. 응급실을 가야 할 것 같았지만 시동생 말에는 화가 누그러져 있었다. 남편이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해서 시동생이 집에 가지 못하고 남편 곁에서 밤을 새우다 돌아갔다. 남편은 더욱 난폭해졌다. 폭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나를 향해서 손을 들어 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화장실에 다녀온 남편을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남편이 욕조에 소변을 눈 것이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으니 그런 적이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시동생을 불렀으나 시동생이 장거리 출장을 가서 당장 올 수가 없단다.

딸은 학교로 돌아가고 집에는 아들과 둘 뿐인데 병원을 가자고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119를 불렀다. 구급대원이 도착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응급실을 가야겠다고 했다. 구급대원이 집에 들어오자 왜 왔느냐고 나는 병원 갈 필요가 없다고 버텼다. 다행히 구급대원에게는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아들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갔다.

남편이 내게 내지르는 거친 말에 아들은 "엄마한테 그런 나쁜 말 그만하세요."

하고 울부짖었다. 아들이 너무 가여웠다. 아빠가 아파서 그런 거라고 이성을 잃은 거라서 환자라서 그런 거라고 아들을 달랬다. 아들은 더욱 울부짖었다.

"아빠 아파서 그런 줄 알지만 엄마한테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  

아들 마음속에 아빠를 향한 연민과 동시에 원망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구급대원의 설득이 30분 넘게 이어졌지만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니 이송할 수 없었다. 남편이 경기 북부 응급실로 이송될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 구급대원에게 경찰을 요청해야겠다고 전했다. 경찰의 강제 진압이라도 있어야 응급실 이송이 될 것 같았다. 뒤이어 경찰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경찰이 설득했다. 아파트 입구에는 구급차와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의 끈질긴 설득 끝에 포박 없이 스스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이동하면서 목사님께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고 기도를 부탁했다. 다행히 남편은 발열이 없어서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환자복으로 환복하고 소변검사 혈액검사 기본 바이탈 검사 CT, 엑스레이, 심전도 검사 등 필요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검사가 진행되었고 처방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응급실 의사는 관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간기능이 나빠서 아미노산을 분해할 없어 독소가 몸에 쌓이고 혈관에 쌓인 독소가 뇌를 마비시켜 정상적인 사고를 없는 한마디로 간성 혼수상태에 이른 것이었다.

소고기, 장어, 각종 단백질 음식을 과다 섭취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었다. 관장을 하여 대변으로 노폐물을 빼내어 독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목사님께서 응급실 앞에 와계신다고 전화가 왔다. 응급실엔 보호자 1인 외에는 있을 수 없어서 잠깐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목사님은 끼니 거르지 말라고 죽과 빵과 음료를 챙겨 오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제가 이런 말 한다고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는데 그래도 말해야 되겠어서 말씀드려요. 제가 남편분 소식 듣고부터 저녁 금식을 하며 쭉 기도를 해왔어요. 응답을 받았는데... 남편분 생명연장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저만 응답받은 게 아니라 두 분 목사님께도 기도부탁을 드렸는데 동일한 응답을 받으셨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해 놓으셨어요. 이제부터 남편 영혼구원하는 일에 힘을 쏟으시게요. 그러니 맘을 굳게 먹어야 해요. 함께 기도하며 준비하시게요."


"싫어요 목사님. 인생 2막 이런 거 다 필요 없어요. 남편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요."


갑자기 팽팽하던 긴장의 이 끊어지고 튕겨나가는  끝이 나를 강타하는 것 같았다.  

말씀하시는 목사님(여자분)도 우시고 나도 울고 함께 응급실 앞에서 둘이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응급실 안에는 죽음을 향해가는 남편이 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어의 산란은 생명의 탄생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의미한다.

                    모천회귀는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남편의 귀향은

         연어의 회귀와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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