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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Jun 13. 2024

집에 가고 싶어

합병증이 목줄 풀린 개처럼 달려들었다

"당신이 지금부터 살아가는 시간은 모두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야. 표적치료제 복용해도 당신 삶을 늘려주지는 않을 거래. 근데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알약을 삼키고 있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말해. 그 알약이 당신 남은 시간을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걸, 그 알약의 표적은 암덩이가 아니라 결국 당신인걸 내가  어떻게 말해. 의정부병원 과장님이 알약을 복용해도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이랬는데 그땐 거기에 당신은 해당 안될 거라 여겼었어. 이젠  짧고 긴 그 중간 어디쯤에 당신이 떠날 날이 있을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말해."





그때부터 나는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싸워야 했고 남편은 악성종양과 합병증과 부작용과 싸우는 동시에 불안과 절망과 두려움에 맞서야 했다.

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희망을 꺾어버리는 말씀으로 받지 않았다. 남편의 이 세상 삶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운 시작으로 이어지기를 염원하는 말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음이 장터에서 엄마의 치맛자락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터질듯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눈물이 되어 밥대신 삼켰다.


응급실에는 A, B, C 세 구역이 있었다. C구역은 가장 안쪽에 가장 중병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곳이다. 남편은 섬망증세인 채로 C구역 병상에 누워서 관장을 받았다. 세 차례에 걸쳐 시간차를 두고 관장을 받는 동안 간성혼수(간성뇌증) 증세가 차차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남편의 분노는 줄어들었지만 입을 꽉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회한도 희망도 평온도 어떠한 표정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누워있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분해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나머지 병상에서는 환자가 들어오고 나가고 검사하러 가고 간단한 처치가 이루어지고 소란스러웠다. 목전에 죽음을 앞둔 노모의 연명치료를  할 건지 말 건지를 두고 한 가족이 긴급회의를 하는 과정이 나체처럼 가려지지 않은 채 펼쳐졌다. 응급실이라는 곳이 그렇지 않은가. 멀쩡한 정신으로 C구역에 누워있으려니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 나는 소음들에 눌려져 점차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갔다.  풍선에 바람을 채우고 팽팽함을 유지하는 것은 이어폰을 끼고 찬양을 듣거나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것이었다. 창 밖의 저 사람들처럼 나도 활기찬 걸음을 걸으며 저렇게 분주한 일상을 보낼 날이 꼭 올 거라는 마음으로. 그러면 그때 남편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든 생각이 풍선 바람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날 밤은 남편도 나도 식사를 거른 채 지나갔다. 응급실에는 보호자 침상이 없는데 남편을 두고 보호자 휴게실에 나갈 수 없어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밤을 지새웠다. 응급실에서는 더 이상 처치할 것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했다. 어서 그곳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퇴원을 하기가 무서웠다. 또다시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까 봐 응급실에서 버텼다. 급기야 응급실 의사가 화를 냈다. 하루만 더 있겠다고 버텼다. 한 번 밖에 뵌 적 없는 주치의 교수님이 간절했다. 교수님의 말을 들어야 안심할 것 같았다. 하필 주일이 이어져서 주치의 선생님을 볼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목줄 풀린 개가 사납게 짖어대서 앞으로 나가기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어린아이 처지 같았다.

퇴근한 시동생이 죽과 간식을 사다 주었다. 남편은 응급실에서도 표적치료제를 먹어야 했기에 아침 식사를 걸러서는 안 되었다. 먹던 약에 응급실 처방 약이 추가되었다. 배변을 원활하게 해서 독소가 몸에 쌓이지 않도록 락툴로즈 시럽 스틱을 처방해 주었다. 매일 2~3번의 대변을 배출해야 병증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또다시 밤이 오고 나는 더 이상 의자에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컨디션이 나빴다. 응급실 들어와서 뭘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관장할 병상에 오물이 묻지 않도록 깔아서 쓰라고 두꺼운 반투명 비닐 여분펼쳤다. 남편 병상 옆 의자를 치우고 장을 나란히  깔았다. 차에서 무릎담요를 꺼내와 누웠다. 밤새도록 대낮처럼 환한 불빛에 조용할 틈이 없는 응급실 병상 밑바닥에 누워있으니 의자보다는 훨씬 나았다. 곳에서도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남편 상태를 체크하러 간호사 선생님 발걸음에 벌떡 일어났다.


"이 밤이 지나면 집에 가자. 당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나가라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버티고 있어. 당신은 진작 집에 가고 싶었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보호 자니까 내가 하는 대로 따르는 거잖아. 아니, 당신도 무섭다고? 집에 가면 또 간성혼수가 올까 봐 무서워서 당신도 집에 가자고 재촉을 못했다고?

그래도 가자. 여긴 당신이 오래 머물 곳이 아니야. 당신 집은 여기가 아니잖아. 아들이 혼자 있는 집으로 가자."




아침이 되니 주치의 교수님께서 회진을 오셨다. 교수님은 남편의 합병증이 질병의 수순인 듯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퇴원해서 집에서 대변을 잘 보라고. 락툴로즈를 더 많이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한 가지씩 새로운 합병증이 생겼다. 오른발 부종을 위한 약도 처방되었다. 합병증세가 늘어나면서 약도 늘어났다.


반찬 재료를 확 다 바꾸었다. 고기를 포함한 단백질류를 극소량으로 제한했다.  다시 똑같은 일을 겪지 않게 조심조심 살얼음 밥상을 차렸다. 남편도 많이 놀랐었나 보다. 생선도 섭취를 하지 않으려 했다. 갈수록 간병이 쉽지 않았다. 이뇨제를 먹으니 발등 부종이 몰라보게 쏙 빠졌다. 발등 부종이 빠지니 신발도 평소대로 신을 수 있게 되었지만 신장에는 무리가 많았을 것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망가진 간 기능을 어쩌란 말인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같은 증세가 또 나타났다. 이번에도 구급차를 불렀고 시동생이 합류해서 다행히 경찰차는 부르지 않았다. 그때마다 아들의 마음은 더 푸석거리는 마른땅이 되어가는 듯했다. 막바지 기말고사가 코 앞에 남았고 생기부도 마무리해야 했다. 이번 간성혼수 증세에도 남편은 분노와 불면증이 심했고 남편이 쏟는 거친 말들로  아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경험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한 번 경험으로 이전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어떤 검사와 절차를 거칠지 알고 있기에 진행에 따라 움직였다. 이번엔 빨리 대처했다. 관장을 3번 해야 한다고 했는데 두 번 후 혈액 검사 수치를 보고 나서 집에 가면 안 되냐고 응급실 의사를 졸랐다. 관장 2번 만에 이른 아침에 들어와 밤이 다 되어 응급실을 나올 수 있었다.

엄마의 말만으로는 아들의 마음을 달래기에 부족한 것 같았다. 아빠의 마음을 얹어야 할 것 같았다. 퇴원 후 집에 오는 길에 남편에게 아들에 대한 사과를 부탁했다.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들도 아빠가 아파서 합병증으로 이성을 잃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쏟는 말들과 거친 행동이 아들 마음에 가시가 되어 찌르는 모양이었다. 아들과 아빠가 너무 긴 시간을 떨어져 지냈다. 그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의 전화통화와 문자메시지는 그 간극을 결코 해결해 주지 못했나 보다.


정기 외래날짜에 진료를 받고 여전히 똑같은 양의 약을 처방받았다. 응급실에서 처방받은 락툴로즈와 외래에서 처방받은 약이 쌓였다. 매일 아침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 채 표적치료제를 먹고 배변을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쳤다. 매일 혈압을 체크하고 단백뇨 검사 시약을 체크하여 기록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조마조마하며 맞이했다. 혈압을 체크했다. 수축기/이완기 60/40이 측정되었다. 혈압 강하제를 먹지 않는데 혈압이 그랬다. 세 번을 다시 측정했다. 마찬가지였다. 더럭 겁이 났다.


바로 소화기내과 외래에 전화했다. 오늘은 주치의 교수님께서 진료가 없는 날이라고 했다. 대신교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교수님의 외래 진료는 있으니 오후에 오라고 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남편의 얼굴도 굳어져갔다. 생각지도 못한 합병증이 또 생긴 것이다. 남편에게 점심식사를 챙겨주고 다시 병원에 갈 채비를 했다. 응급실 사건 이후에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입원준비를 해서 갔다.


분주히 챙겨 외래 접수를 했고 진료시간보다 일찍 가서 혈액, 소변 검사를 했다. 남편의 이름이 불렸다.

역시 혈압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신장수치였다. 당장 입원치료를 해야 할 수치라고 했다. 부종이 가라앉으니 신발을 신을 수 있어 좋았던 것도 잠깐 그게 망가진 신장에 큰 무리를 주었나 보다.

진료해 주신 교수님과 주치의 교수님 사이에 긴급 연락이 있었는지 병실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병실이 부족해서 3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남편이 보채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다고 그냥 치료 안 받고 집에 가면 안 되냐고 했다. 입원하기 싫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남편 주머니에 용돈이 들어있었고 병원 현관만 나서면 택시승강장에 택시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택시를 타면 병원에서 집까지 5분이나 걸릴까.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벌떡 일어나 혼자서라도 집에 있는 충분한 상황이다.


그런데 나이 50고개 마루에 막 올라선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초췌한 남편은 혼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환자가 되어 버렸다. 떼를 쓰고 있었지만 안된다는 보호자 말에 곧 포기해야 하는 걸 아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내 몸이지만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떼라도 써서 슬픈 마음을 표현한 것인가? 형편없이 낮은 혈압수치에 이 길로 영영 집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내심 간절히 정말 간절히 입원치료받아서 혈압도 회복하고 신장수치도 회복해서 꼭 집에 가고 싶다는 표현이었을까? 좀처럼 속내를 비치지 않는 남자, 세상 어떤 욕심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걸 알아버린 남자가 집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썼다.

대기실 밖의 햇살은 여전히 하얗게 비추어 저물 조짐을 보이지 않는 오후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대기실은 점차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니 마침내 우리 두 사람만 남긴 채 텅 비었다. 우리는 대기실 의자가 되어 그곳에 굳어져가듯 나오지 않는 병실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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