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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Jun 18. 2024

병원에서 감염된 병

장마비처럼 또 다른 증상이 흘러내렸다

점차 붙박이 의자가 되어갈 뻔했던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2인 병실 한 자리만 비었단다.

6인실이 나올 때까지만 머물기로 했다.

입원 절차를 진행하고 남편과 함께 병실로 이동했다. 간호사에게 슬기로운 입원생활 안내를 받고 서류를 작성하고 통제된 유리문을 통과할 수 있는 목줄 달린 카드도 받았다. 호사는 친절했고 뭘 부탁해도 다 들어줄것 같았다. 우리는 말 잘 듣는 어린이처럼 간호사가 하라는 대로  따랐다.


 2인실이지만 좁은 데다 출입구 쪽 병상이라 불편했다. 6인실  병상이 나오는대로 이동하기로 했다.

며칠 치료를 받으면 수치가 나아지겠지. 그러면 이번 주말엔 집에서 보낼 수 있을지 몰라. 힘을 내자.


곧바로 소변검사, 혈액검사, 대변검사, 심장 초음파 검사... 내일은 또다시 다른 검사, 검사, 검사...

보호자인 나도 검사에 지쳐가는데 환자는 오죽하랴. 그런데 검사를 하지 않으면 또 합당한 처방을 받을 수 없으니 피할 수 없다.

저녁 식사가 제공되었다. 남편이 식사하는  사이에 차 안에서 입원짐을 챙겨 왔다.


한 시간 후쯤 심장 초음파를 할 거라고 했다. 이동식 검사기를 병실로 가지고 왔다. 마음이 방망이질 쳤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초음파는 남편이 하는데 내 심장을 샅샅이 기계로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창밖을 바라보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어둑어둑해져서 환한 병실 모습이 창문에 그대로 비쳤다. 누워서 검사를 받는 남편과 초음파를 따라 남편 심장을 살피는 의사.


림프절에 종양이 있다는데 그 사이 심장으로 악성종양이 전이되었으면 어쩌나. 의사와 종양이 숨바꼭질을 한다. 새로 생긴 종양이 있다면? 아니, 찾을게 없는데 술래가 숨바꼭질을 멈추지 않는 걸거야. 놀이가 꽤 길어진다. 초조한 내 왼손을 내 오른손이 꼭 붙잡아주었다.


마침내 검사가 끝났다. 다행히 전이는 없다고 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손을 많이 주물러서 빨개진 내 왼 바닥에 오른손톱 자국이 나 있었다.


검사가 끝나자 남편이 내게 집에 서 자고 오라고 했다. 병원에 있으니 수시로 상태를 체크하고 별일 없을 거라고 다녀오라고 했다. 집에 혼자 있을 아들이 걱정되었나 보다.


아침까지만 해도 입원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학교 다녀오니 빈 집에 들어서 혼자 밥 챙겨 먹고 학원에 갔을 아들 생각이 났다. 곧 내신 반영 마지막 시험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얼굴을 보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원 기간 동안 학교 늦지 않게 잘 다니라고 당부도 할 겸 그날 밤은 집에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포장음식을 샀다. 냄비에 붓고 끓이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반제품으로 아들이 며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앞 분식점 사장님이 이럴땐 참 고맙다. 반제품과 분식.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한 환자를 돌보는데도 온 마을이 필요했다.  주말이면 퇴원할 것 같으니 그땐 좋아하는 음식을 해 줘야지. 꿈이 야무졌다.




2인 실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6인 실로 옮겼다. 가장 안쪽 창가자리가 비어서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한 번 정해진 자리는 이동할 수 없어서 빈 그 자리를 다른 환자가 욕심냈으나 규정에 따라 우리가 차지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좋은 자리라고 말하고 나니 입원실이 뭘 그리 좋은 곳이라고 좋은 자리인가. 그래도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창밖을 응시하고 눈물 흘릴 수 있잖나.


의정부 병원에서 검사한 지 한 달 남짓인데 여기서도 각종 검사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수액줄은 계속 달고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혈액검사 한다고 채혈을 했다. 병원에 있으니 간성혼수가 와도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정해진 식단대로 음식을 섭취하니 안심이 되었다. 두 번의 응급실행에 많이 놀랐었나 보다.


표적치료제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한 약으로 남편의 입안이 빨갛게 헐어서 빨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은 물론, 조금만 자극이 되면 혀와 입 안이 쓰리다고 했다. 그래도 계속 표적치료제를 먹긴 해야 해서 뉴케어와 두유를 번갈아 먹었다. 입맛도 급격히 떨어졌는데 밥을 물에 말아서 반찬 없이 삼켰다.

표적치료제는 입맛을 표적으로 삼았나. 입맛을 살릴 반찬 집에서 만들어 와야할 것 같았다. 검사 일정을 피해서 마트에 들러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왔다. 입 안이 헐어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도 속이 더부룩한지 매운맛 나는 고추조림을 자꾸 찾았다. 반찬으로 남편과 이견이 생겨 실랑이가 벌어졌다. 남편은 입맛이 조금이라도 당기는 게 있으면 먹으려 했고 나는 남편의 입맛보다 몸에 더 좋은 것을 우선했기에 충돌이 잦아졌다.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게 할걸.

 

주말이 다가오는데 퇴원하라는 말이 없다. 혈압 수치는 조절이 되었는데 신장 수치는 더 치료가 필요했다. 장마기에 들어서니 비가 엄청 쏟아졌다. 매일매일 비가 내렸다. 빗물은 땅으로 스미지 않고 내 마음으로 흘러들어와 스몄다.


비가 내려 그런지 남편의 근육통이 심했다. 특히 등이 아프다고 했다. 집에서 붙이는 파스와 바르는 파스를 챙겨왔다. 파스로 통증이 잡히지 않았다. 단순 근육통이 아닌가? 병상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아 누워도 통증이 완화되지 않았다. 환자 병상과 보호자 간이침상을 오가며 누웠다 앉았다 몸부림을 쳤다. 비는 왜 이리도 많이 내리는지 창문에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내 마음에 스민 빗물이 눈물이 되어갔다. 

남편의 몸부림은 계속되었지만 끙끙 앓는 소리가 없어서 오히려 더 측은했다. 말기암 통증이 시작 된 걸까? 겁이 더럭 났다.


맞은편 환자는 병실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음량으로 노래를 계속 재생했다. 임영웅 오빠와 송가인 언니를 포함한 가수들이 노래로 병실에 머물렀다.  며칠을 참아봤는데 음량을 줄이지 않았다. 치료가 되어가니 젊은 어르신은 얼마나 즐겁겠는가. 아마도 청력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그런 분에게 소리를 줄여달라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 분이 어서 퇴원하든지 우리가 먼저 퇴원하든지. 갈수록 불편한 것들이 계속 생겨났지만 우린 계속 입원실을 지키고 대신  다른 병상에 환자가 계속 바뀌었다. 그럴수록 커튼으로 더욱 차단을 하고 나는 이어폰으로 찬양을 듣거나 책을 잡고 있었으나 마음이 자꾸 구멍뚫린 바닥으로 쏟아지듯 했다.


그 즈음 오랜만에 들어가 본 브런치에 천명 구독자를 넘는 한복짓고 그림 그리는 여자 작가님의 투병과 소천소식이 들렸다. 그녀 딸이 올린 글을 읽어보니 남편과 비슷한 시기에 응급실행을 했는데 급박하게 상황이 몰아쳐 허망하게 가셨다. 마음이 갈피를 못잡게 요동쳤다.


간병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굶기를 수없이 하고 체중이 줄기 시작했다. 입던 옷들이 헐렁해졌다. 결막염이 생겼는지 눈곱이 눈을 뜨지 못할 만큼 껴서 안과를 다녀왔다. 환자가 면역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이니 어떤 균에도 감염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치의 교수님께서 내 눈꼽낀 눈을 보며 당부하셨다.


남편 상태가 갈수록 나빠지는 게 느껴졌다. 매일 물 섭취량과 대변, 소변 배출량을 체크하고 체중을 체크했다. 부종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부종은 잡히지 않고 수액은 계속 맞으니 체중이 늘어갔다. 말기암 환자가 체중이 늘어나는 것은 좋지 않은 현상이다.


입원이 열흘을 넘기자 서울에서 언니가 주말에 병문안을 왔다. 고속버스를 타고 혼자 내려왔다. 밤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해 바로 차에 올라탔다고 했다. 피곤한지 동생 상황이 마음 아파서인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입원실에 들어와 남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 얼마나 있겠나. 이제 50고개 막 넘긴 죽어가는 제부 앞에서 처형이 뭐라고 할 말이 있겠나. 치료 잘 받고 밥 잘 먹으라고 밖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나.


숙면을 할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 불면증이 생겼다. 언니가 불면증 약을 처방받자고 손을 잡아 이끌었다. 먹어야 간병도 하고 잠을 자야 간병도 한다고 애가 타서 병원으로 이끌고 갔다. 급한 대로 토요일 오후 진료를 하는 가정의학과에 가서 처방을 받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약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언니는 내 몰골을 보더니 당일에 올라갈 수 없었나 보다. 마침 주말이 되어 집에 와 있었기에 언니에게 내 아이 둘을 부탁했다. 집밥을 부탁했다. 언니가 함께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좀 사다가 두 아이에게 집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지척에 친정어머니가 계셔도 이 사실을 알면 내게 짐을 더 얹어줄 상황이어서 함구해 왔으니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언니는 다음 날 오전서울로 올라간다고 병원에 인사하러 들렀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걸 결국 참지 못하고 언니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언니에겐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내 힘든 모습을 보여줘도 될 것 같았다.

저녁에 집에 잠깐 들르니 언니가 음식을 많이 해놓고 갔다. 냉장고도 꽉 채워놓고 갔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또 눈물이 났다. 서울에 도착한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집 남매가 둘이 명랑하게 잘 지내니 애들 걱정은 많이 안 해도 되겠다고 했다.




그 사이 입원 2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이면 퇴원할 줄 알았는데 2주가 지나가자 퇴원은 더욱 요원해졌다. 이대로 병원에서 몇 개월을 지내야 하는 걸까. 자꾸 체념의 마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장염이 와서 남편이 설사를 하니 락툴로즈를 먹지 않아도 되었다. 입원 중 병원 내 감염이 된 것이었다. 생수를 끊고 날마다 집에 가서 보리차를 끓여왔다.


갑자기 간호사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우리가 사용하는 쓰레기통을 특수처리 해야 하니 다른 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 물으니 결핵 수치가 높게 나왔다고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검사 결과가 그렇다고 했다. 감염의 우려가 있다고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분명 입원당시 검사에서 결핵에 대한 어떤 이상소견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렇다면 2주 동안에 병원 내 감염이 있었단 말인가. 나오지 않는 가래를 뱉어 결핵검사를  진행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몹시 애가 탔다.


 복도를 하염없이 서성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검사는 네버엔딩스토리처럼  이어졌. 남편은 검사실에 있고 나는 검사받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리며 중얼중얼 기도하며 벌벌 떨며 불안을 견뎌냈다. 남편의 등통도 더 심해졌다.




결국 발열이 생겼다. 발열은 위험신호라고 했는데 ... 얼음주머니를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있어야 했다. 남편은 몹시 얼음주머니를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열을 내려야 해서 끼워주면 남편은 빼내기를 반복했다.

점입가경으로 혈장주사를 계속 맞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노란 혈장 수혈을 2팩씩 하는데도 다음날이면 수치가 다시 떨어졌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혈장수혈 전에는 혈액검사를 하고 검사 수치로 혈장수혈을 결정했지만 수치는 오르지 않았다. 검사에 검사가 지속되면서 채혈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혈관이 숨어버려서 단번에 채혈을 못하고 간호사를 바꿔가면서 채혈을 하는 힘겨운 상황이 되었다. 케모포트 시술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입원 당시보다 배가 불룩해졌다.


다행히 열이 잡혔다. 더는 간호사님들을 불편하게 할 수 없어 캐모포트 시술을 했다. 결핵 검사한 지가 며칠인데 결과는 어찌 된 건지 간호사님들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주치의 교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교수님께서 회진을 오셨다. 결핵은 어찌 되었는지 물으니 공기 중에도 결핵균이 떠다니다가 섞여서 검사치가 높게 나올 수 있다고 걱정은 말라고 하셨다. 그날 결과가 나온건지 우리는 6인실 안 격리 아닌 격리에서 해제되었다.  그리고 다른 균에 더 감염되기 전에 2~3일 후 퇴원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

드디어 퇴원의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그러나 뭔가 찜찜했다. 상황이 호전되어서 퇴원하는 게 아니었다. 온갖 검사에 시달리고 병원 내 균에 감염되고 상태는 나빠져 가는 끝에 퇴원이다.




주치의 교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또 한 분의 젊은 교수님이 보호자 면담을 요청했다.

그분은 크리스천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입원당시 환자 정보 기록란의 종교를 확인하고 면담을 요청한 듯했다.

크리스천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에겐 영생하는 천국 소망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교수님 본인의 아버지 이야기를 잠깐 들려주셨다. 수련의 과정에 있던  아버지께서 위중하셨는데 시간을 없어 자주 본가에 없었고 임종 3일 전에야 재직한 병원으로 모셨다가 임종을 지켰다는 이야기.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런 뜬금없는 이야기를 왜 내게 하시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뒤이어 현재 내 남편의 상태를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토요일) 저녁에 아들과 딸을 병원으로 좀 오게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아들과 딸에게 먹고 싶은 간식을 사주고 싶다고, 그리고 들려줄 얘기도 있다고 했다. 퇴원을 목전에 두고 환자가족 전체 면담을 하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의사로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임무를 하기 위해 환자가족 모두를 만나려고 요청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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