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테 Jul 02. 2024

우리 집에 왜 왔니?

그는 퍽 친절하게 가족면담을 했다.

젊은 교수님과의 면담 약속을 결정하고 바로 딸, 아들에게 약속시간에 병원으로 올 것을 부탁했다.

이때까지도 나는 환자가족 전체 면담이 어떤 큰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단순히 중병에 걸린 아빠를 둔 자녀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젊은 교수님의 휴머니즘으로 밖에는 해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입원 중 내가 보아왔던 그는 환자의 병리적 증세 외에도 심리적인 측면에 귀를 기울인 마음 따뜻한 의사였기 때문이다. 마침 이틀 전에 아들이 학교 동아리에서 출전한 전국 국궁대회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메달을 따왔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젊은 교수님이 이것을 아들에게 직접 축하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아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사 주고 격려해 주시는 것이라고 착각다. 생각해 보라. 대학병원의 바쁜 의사가 쉬기도 모자란 주말 시간에 환자 가족을 만나 사적인 축하를 해주겠냔 말이다. 내 착각의 극치였다.


다음 날 저녁 시동생이 형을 보러 온다기에 아들과 딸을 데리고 와 줄 것을 부탁했더니 두 아이 저녁밥을 일찍 사 먹여 데리고 왔다.

남편을 혼자 병실에 두고 우리 모두는 젊은 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은 대학병원 1층 베이커리 매장에서 여러 종류의 간식거리와 음료를 직접 사들고 오셨다. 그리고 모니터 앞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모니터에는 남편이 최근에 검사한 여러 장의 자료가 떠 있었다. 남편의 현재 상태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 치료과정과 앞으로 생길 여러 증상에 대해서도 설명했지만 분위기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딸, 아들도 설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거나 침울해하지 않았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젊은 교수님의 면담은 성공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는 아들, 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너무 담담한 표정과 대답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나였다.

당시에는 묻지 못했으나 몇 달이 흐른 후 나중에 물어보니 이미 그때 아빠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나는 당시보다 아들의 나중 말이 더 마음 아팠다. 그런 말을 듣고도 태연한 척했던 것은 힘들어할 엄마를 위한 마음이었다고. 기대도 희망도 더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그날은 시동생이 병원에 있겠다고 집으로 가서 쉬라고 배려해 주어서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왔다.

우리 셋 어느 누구도 면담 내용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남매는 다정하게 할 일을 했다. 


그동안 두 번 정도 시동생을 통해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보라고 했다. 집과 멀지 않은 거리에 두 곳의 호스피스 병원이 있었다. 두 곳 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한 곳은 집과 더 멀고 또 빈자리가 없다고 했다. 한 곳은 오래지 않아 자리가 바로바로 나는 곳이었다. 우리는 이미 의료급여 수급자였기에 병원비에 대한 부담이 크지는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시설이 깨끗하고 좋은 곳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동생이 알아봤던 때마다 대기자 명단에 예약을 하겠노라 선뜻 말을 할 수 없었다. 남편 여생이 언제까지가 될지 알 수 없으니 죽어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오랜 시간 그를 더 괴롭히고 싶지가 않았다. 딸 아들을 더 자주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무섭고 두렵기도 했다. 어떤 위급한 상황이 갑자기 들이닥칠지 그때 내가 홀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까마득했다. 결국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보류상태가 되었다.


집으로 왔지만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할 일이 없었다. 이미 둘 다 자기 일을 스스로 하고 있었고 부엌살림조차도 손댈 게 없었다. 밥을 거의 해 먹지 않았으니. 또 야무진 딸의 손끝이 집에 온 엄마를 조금이라도 편히 쉬게 하고 싶었는지 말끔하게 집 정리를 해놓았다. 아빠의 말기암은 아이들을 빨리 철이 들게 하나보다. 

장마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모르고 밤새 가늘었다 굵어졌다 내 잠 속으로 스며들어 눅눅한 수면을 만들었다. 뒤척이며 핸드폰으로 호스피스병원 이용후기를 올린 블로그를 검색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듯하더니 새벽 4시가 넘어서자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비는 지독했다. 입원 기간에도, 외래 진료가 있는 날에도 비가 항상 동행했다. 그의 병증이 비 때문에 더 심해지는 착각에 빠질 만큼 살아온 어느 해 여름보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주체할 수 없이.




월요일이 되어 아침 회진에서 퇴원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미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주말에 집으로 짐을 옮겨가서 퇴원짐은 단출했다.

수속절차를 밟았다. 케모포트 시술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이럴 거였으면 시술을 하지 않고 좀 더 버틸 것을. 남편만 더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케모포트도 제거했다. 주의사항을 들었다.

병이 호전되어서 퇴원하는 게 아니라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다른 병에 노출될까 봐 후퇴하는 퇴원. 입원기간 중 발열까지 있었고 병은 더 깊어졌다. 그래도 집에 가면 아이들을 매일 볼 수 있으니 그거면 됐지.


처방약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침상을 빨리 비워주어야 대기하는 환자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짐을 빼서 병동 유리문 앞 휴게실 의자에 두고 남편도 앉아서 기다리게 했다. 병동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데 마침 가족면담했던 젊은 교수님과 마주쳤다. 퇴원소식을 듣고 일부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퇴원 절차에 도와줄 일은 없는지 물었다. 환자에 대한 대단한 애정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런 의사도 있구나. 그분의 저런 태도는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인 것일까.


그는 대뜸 어디로 퇴원하냐고 물었다.

어디라니, 집으로 퇴원하지 나는 의아했지만 내색 없이 집으로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3일 전에 퇴원한 할머니 환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식당을 운영해서 오랜 기간 그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었는데 그분의 담당 주치의가 될 줄 몰랐다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어떤 처방도 내릴 수 없는 상태여서 퇴원한다고. 어디로 가시냐고 물으니 그 할머니환자께서

"그래도 내 집 구들장에 등 좀 며칠 붙여보고 호스피스로 가더라도 가야지요." 했다고 한다.

그 말에 집이 주는 존재의미를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집으로 간다는 얘기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다.


 "그래도 우리에겐 영원한 본향 천국이 있잖아요. 이 땅에서 삶이 끝이 아니고 소망이 있으니까요."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젊은 의사의 말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말은 틀리지도 잔인하지도 않았다.  눈물을 간신히 참았는데 부끄럽게도 또 흘러내렸다.

호스피스병원, 본향 천국 이런 말들이 우리 가족이 곧 걷게  길  위의 이정표 같았다.


 그는 남편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병동 휴게실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그 젊은 교수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축복을 빌어주는 것과 기껏해야 링크로 보내주는 설문에 정성을 다해 감사인사를 전하는 것 . 그 이후로 그 귀한 의사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남편은 집으로 간다.  병원에서도 돌고 돌아 집으로 간다. 우리 네 식구가 오롯이 있을 수 있는 집으로 가서 오래 머물고 싶지만 끈질긴 암세포가 남편을 이기고 승승장구한다. 그걸로 모자라 생뚱맞은 다른 병원체까지 몸속으로 불러들인다. 우리 집으로 불러들인다.

거센 장마 빗줄기가 창틀에 고였다가 베란다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창문을 닫았다. 빗줄기 소리도 약해지고 더 이상 빗물이 흘러들지 않는다.

남편의 몸에 있는 창문을 닫으면 암덩이도 잦아들까? 우리 집을 슬픔으로 적시는  다른 병원체도 흘러들지 않을까. 보송보송하게는 안되더라도 더 이상 눅눅해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반길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집에 자꾸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똬리를 틀고 나가려 하지 않는다. 절대 빈 손으로는 안 나갈 것 같은 기세다. 이것들은 누가 보낸 것일까.


뜬금없이 어릴 때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 누구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남편 꽃을 찾으러...




매거진의 이전글 병원에서 감염된 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