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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Jul 13. 2024

낙화처럼

호스피스병원 입원을 결정했다

며칠이면 치료받고 퇴원할 줄 알았던 입원기간이 4주 가까이 되어 퇴원했다. 병원에서는 갖가지 검사를 다 하고 장염을 추가로 얻어 치료받았고 결핵의심 진단까지 더해졌다가 간신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올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었다.

힘을 내서 치료에 전념해 보자는 다짐은 사라졌고 이제 뭔가를 준비해야 될 때가 다가오는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유한하기에 모든 사람이 다 이 세상 소풍을 마무리한다지만 그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환자에게나 간병하는 가족에게나 큰 공포임이 분명하다.

그 공포를 이겨내고 평정심을 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소심하고 예민한 내게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고 간병에 관한 모든 결정자가 나 혼자였기에 그 책임 또한 큰 짐이었다.


짐을 지는데 힘을 보태겠다는 분이 있었다. 바로 의정부병원 때 우리에게 점심식사를 접대했던 남편 고향친구 부부.

친구분 아내가 전도사로 사역하고 계셨다. 그분은 지역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날부터인가 매일 새벽예배가 끝나는 대로 내게 전화를 걸어 기도 해주셨다. 기도를 받고 나면 두려움이 잠시나마 덜어졌다. 그러나 눈앞의 채혈과 채변, 각종 검사와 얼음주머니, 매일 몸은 말라가는데 체중은 늘어나는 상황 앞에서 내 마음은 또 무너졌다.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눈물로 하나님을 불렀고 집과 타지에 있는 아들, 딸을 생각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을 생각했다. 나는 가장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일상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달라진 것은 이제 혈압 측정도 안 하고 단백뇨 시약 간이검사도 안 하게 되었다. 그런 가벼운 조마조마함이 사라졌다. 대신 더 큰 압박이 엄습했다.

입원 생활에서 투여받은 각종 치료제와 약으로 그의 몸은 더 지쳐있었다. 움직임도 둔해지고 딸과 가볍게 했던 주변 산책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은 없었고 가끔 과자류와 아이스크림을 요구했다. 이때부터 사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청포도 사탕, 스카치캔디, 자두사탕, 알사탕.

당분이 몸에서 당기는 것인지 속이 울렁거려 그런 것인지 하루에 사탕  봉지를 먹으려 하는 날도 있어서 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하루에 사탕 열 봉지라도 먹겠다면 다 줄 걸 하는 후회가 나중에 남았다.

식사량이 급격히 줄었다. 과자처럼 바삭거리는 마른 누룽지를 먹었다. 등통증이 비 오는 날 맑은 날 상관없이 지속되었다. 파스를 종류대로 사다 붙였지만 진통효과가 없는 걸 보니 암성 통증이 시작되는 것일까? 다음 외래 때 상담해야 할 증세였다.

간성뇌증 걱정에서 놓여날 수 없으니 단백질 섭취도 제한하였고 갈수록 여위어 가는 게 보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두꺼운 겨울 토퍼를 깔고 누웠음에도 오래 누워있고 모로 누워 창 밖 쪽을 향하다 보니 골반뼈가 있는 쪽에 살갗이 벗겨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다가 피부가 괴사 될까 봐 겁이 더럭 났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환자에게 잔소리로 쏟아내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상처를 살폈다. 아픈 사람이라 그런지 쉽게 호전이 없었다. 다행히 더 이상 심하지는 않았고 일주일쯤 지나니 상처가 꾸덕해졌다. 중병으로 아픈 몸이 그나마 피부 상처는 낫겠다고 버티는 것 같아 고마웠고 측은했다. 욕창으로 번질까 봐 걱정했었다. 한시름 놓았다. 중병은 그대로인데 찰과상 상처가 호전된다고 한시름 놓다니 웃픈 상황이었다.

추워 추워를 입에 달고 살던 남편도 창문 닫으라는 소리가 없어졌다. 그만큼 더웠다. 에어컨을 사용하지 못하고 온 가족이 선풍기로 더위를 쫓았다. 그런데도 남편은 땀 한 방울 없이 누워 지냈다.  덮는 극세사 이불을 차렵이불로 바꿔주었을 뿐.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때부터 수요일마다 목사님께서 수요예배 후에 심방을 오셨다. 예배 마친 후의 신령한 맑은 기운일 때 심방예배를 드리러 오시는 목사님 마음이 느껴져 감사했다. 오실 때마다 손에 간식거리를 빠짐없이 챙겨주셨다. 죽과 과일을, 갈비탕과 음료를, 즉석 생선탕거리와 반찬을. 목사님 사랑이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신 권사님 한 분이 출근 전에 집으로 들러서 또 심방예배를 함께 드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가깝지 않은 거리를 달려 그리 하셨다.

남편은 처음에는 별 거부감 없이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렸는데 갈수록 영적 싸움이 시작되는 게 느껴졌다. 호의적이던 남편 태도가 점차 변하면서 예배를 거부하고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예배드리는 이유가 병의 호전이 아닌 남편의 영혼구원에 있기에 중단할 수 없었다. 박대에도 권사님은 중단하지 않으셨다.




퇴원한 지 열흘 정도 지나 다시 한번 간성뇌증(Portal Systemic Encephalopathy)이 왔다. 이미 두 번의 경험이 있기에 재빨리 응급실에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시동생에게 전화했지만 근무 중이라서 올 수 없다고 했다. 거부하는 남편을 설득해서 병원에 데려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시 119에 전화를 했다. 익숙한 절차대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병에 패배한 남편의 몰골은 실제보다 스무 살은 훨씬 넘어 보였나 보다. 응급실 인턴은 기본 정보를 작성하면서 나를 남편의 딸로 생각하고 질문을 했다. "환자분 따님이시죠?"

이젠 응급실에서 어느 절차를 거칠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번에도 각종 검사 후에 관장으로 독소를 빼냈다. 혼자 감당하려니 진땀이 났다. 바쁜 응급실에 나를 도와줄 인력은 없었다. 중환자들이 속한 응급실 C구역에서 화장실로 다시 C구역으로, 오물 처리공간으로 분주히 다닌 덕분에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락툴로즈 시럽 스틱은 더 많이 처방받았고 더 많이 먹으라고 했다. 하루에 5개까지 먹을 수 있다고 했다. 하루에 한 개 먹다가 두 개를 먹다가 세 개로 늘렸는데 이제는 다섯 개가 1일 허용 최대치라고 했다. 5개를 먹고 그 분량을 흡수할 력은 있는 것일까. 그런 말을 들어도 마음이 덤덤해졌다. 많이 강해진 걸까, 상황에 순응하는 마음일까. 오는 길에 죽을 사는 여유도 생겼다.




권사님의 예배심방과 남편 친구부인 전도사님의 매일 기도와 친정언니의 전화는 지속되었다. 날씨는 더워지고 건강한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휴가지로 떠났다.

친정 식구들도 강원도 정선에 사는 6촌 언니 펜션으로 피서를 떠난다고 연락이 왔다. 부모님 두 분은 남편 발병과 투병 사실을 모르고 계시니 함께 가자고 전화가 왔다. 어쩔 수 없이 거짓으로 둘러댔다. 지금 이직한 새 직장에서 인증준비가 한창이라 도저히 휴가를 갈 수 없는 상황이고 휴가를 낼 수 있더라도 수련회를 가야 한다고. 지금껏 내 여름휴가는 교회 학생들과 수련회를 떠나는 것으로 소진했기에 어머니는 아쉬워하면서도 쉽게 내 말을 믿으셨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어머니가 아시게 되면 까무러치실 일이고 나는 어머니의 보호자 역할까지 해야 한다. 내게는 국가기밀보다 더 중요한 비밀이다.


남편의 기력은 점차 떨어지는 게 확연했다.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남편이 머물기에는 집이 편할 텐데 앞으로 응급상황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고 시작된 암성 통증은 어떻게 잠재워야 할지, 대입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아들을 고려한다면 이래저래 불가피한 상황이다. 남편은 아직 표적치료 알약을 처방받고 있는 상태인데 호스피스를 갈 입장은 아니고. 시기를 결정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최적기는 언제인지, 누구와 의논을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시동생조차 언제 가야 할지 결정에 한 마디도 덧붙이지 못했다. 모두 그런 상황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길이 집을 나서는 마지막 발걸음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느 누구도 섣불리 그 시기를 결정할 수 없었다.


예약일이 되어 외래진료를 받고 표적치료제를 처방받았지만 교수님은 이미 치료에 대한 기대를 걷어버린 느낌이었다. 진료 전 혈액검사로 수치를 확인하고 표적치료제를 처방받지만 치료제 효과가 있어야 보험이 적용되는데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복용 3개월이 아직 안되었으니 그때까지 복용해 보고 정밀검사를 진행해서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알부민을 처방해 줬다. 그거라도 맞고 가라는 최후의 처방 같았다.

남편이 먼저 링거를 맞을 주사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수납 후 처방전을 들고 병원 내 약국에 가서 받아온다. 알부민을 맞는 시간은 1시간 정도 걸린다. 환자의 기력에 따라 투여되는 속도를 조절한다. 진료  1시간 전 피검사. 대기했다가 진료. 진료 후 알부민 정맥주사. 병원에서 집이 가까워도 한 번 외래진료가 있는 날엔 3~4시간이 걸린다. 병원 다녀오고 나면 녹초가 되어 점심식사를 먹지 못했다.


알부민 투여받는 시간 동안 아이들 이야기, 지난 이야기, 그리고 영혼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듣기 싫어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그것이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길로 인도하는 길라잡이.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있어. 그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살아온 삶으로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남편은 내가 하는 이야기에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광복절 즈음에 권사님은 3일 금식을 하고 남편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했다. 직장에 다니시는 분이 3일 금식이 쉽지 않기에 그래서 공휴일과 토요일을 이용해서 3일 금식일정을 잡았다고 했다.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남편은 생명연장이 하나님 뜻이 아닌데 병고침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신다고 하니. 목사님께서 기도응답받은 내용을 말씀드릴 수도 없고 하여 목사님께 조언을 구했다. 목사님은 기도제목이 어떻든 3일 금식을 하시는 분에게 합당한 복이 있으니 그냥 두라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3일 금식을 계획하셨던 권사님께서 심방을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기도 중에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사람이 앞서지 말라고.

3일 금식을 계획하셨기에 진행은 하시되 남편 영혼구원과 당신 자녀 개업으로 기도제목을 변경하시고 진행하시기로 했다. 그것으로 한 달 동안 지속된 매일 심방예배가 마무리되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고3 아들의 진학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 담임 선생님과의 진로 면담은 남편 입원기간 중 전화로 한 번 한 게 다였다. 고3 때 아들의 성적이 떨어졌다고 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아빠가 투병하기 시작했으니 영향이 있었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이 어떤 학교를 진학한다 해도 걱정이 없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계획을 믿고 있었기에 아들이 갈 길은 예비하심의 형통한 길임을 확신했다. 여기에 세세히 기록할 순 없지만 할아버지와 아빠가 잃은 것들을 아들을 통해 다 찾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기도로 응답받은 바가 있었다. 그동안 쏟은 눈물 기도와 사업실패로 어려운 형편에도 예수님 사랑의 마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인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이미 받으셨음을 아들의 삶을 통해 증거 해 주시고 계셨다.



남편의 호스피스병원 입원 날짜를 결정했다. 남편을 설득해야 했다. 호스피스 병원에 대한 사전지식이 별로 없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남편에게 그곳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아빠가 가장 취약한 점이 무엇인가. 바로 자식 일이다. 나는 안타깝게도 그 마음을 도구로 써야 했다. 그게 가장 부작용이 없이 매끄러울 것 같았다. 남편이 거부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이제 **이가 곧 대학 수시원서도 써야 하고 여러 가지 신경 쓸 일도 많고 예민할 때인데 아빠가 집에서 투병하면서 자꾸 간성 뇌증으로 아들에게 안보였으면 싶은 모습을 보이고 응급실도 다니고 하니까... 거기는 식단도 잘 맞춰 나오고 병원과도 가깝고 집에서도 10여분 거리니 집에서 왔다 갔다 다니기도 좋고.. 거기서 좀 쉬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집에 다시 올 수도 있고..."

이 말을 눈물 없이 전해야 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이 길이 당신이 집을 떠나는 마지막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나 혼자서는 이제 간병하기가 무서워졌다. 언제 갈림길의 순간이 우리에게 올 지 몰랐기에.




지독히도 길었던 장마가 끝났다. 매일 새벽부터 밤중까지 매미소리가 들려왔다.  빗물에 떠내려가지 않은 매미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지금 울지 않으면 모든 게 헛일이라는듯 기를 쓰고 매미는 울었다.  존재감을 발성으로 알리지 않으면 곧 죽음을 맞이할 매미로서는 당연한 일이지. 어두운 땅속에서 유충으로 7년을 나무 수액만 먹고 지내다가 광명한 세상에 성충으로 와서 겨우 한 달을 살고 가잖나. 그러니 7년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다면 24시간 울어대도 어쩔 수 없지. 이런 매미에게 누가 감히 시끄럽다고 말할 수 있겠나.  소임을 다 한 후에는 낙화처럼 나무 아래 떨어질 매미.


어두운 땅속 같은 객지를 떠돌다가 병든 몸이 되니 그제야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 광명한 고향의 찬란한 날들은 여전한데 갈수록 사그라지는 울음이 되어 더는 버티기 어려운 남편. 그에게도 낙화처럼 떨어질 날이 멀지 않은 듯했다.


아파트 화단의 수령 많은 나무 아래로 가 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매미가 보였다. 평소엔 관심조차도 없던 매미를 응원했다. 땅속에 있던 세월을 기억하라고 인고의 세월을 보상받으려면 크게 힘 있게 울라고. 내가 대신 울어줄  없으니 세상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라고. 그렇게 참을 나무 아래 서 있었다.




매거진이 마무리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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