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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Jul 30. 2024

고열폭풍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의논이라 쓰고 단독결정이라고 읽는다

호스피스 병원 입원 날짜를 의논했다. 환자 본인이 호스피스 병원 입원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타지에서 떠도느라 자식이 가슴에 사무쳤을 텐데 눈앞에 자식을 두고 실컷 보고 싶은 마음을 어찌 모르겠나.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에 있었다. 인간적인 면으로 본다면 가기 싫다는 남편을 억지로 등 떠미는 인정사정없는 결정 같으나 그때 입원을 결정한 것은 절묘한 타이밍이었음을 지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나는 연휴로 있는 광복절을 보내고 딸 타지에 있는 학교로 돌아가는 날짜를 원했다. 남편은 표적치료제 복용 3개월 지나 정밀검사를 받은 후 입원하기를 원했다. 내가 생각한 날짜보다 사흘 뒤였다. 호스피스 병원 입원해서 적응시간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서 주말을 앞두고 입원하기로 했다.


아들은 막바지 생기부를 마무리하고 자소서 작성에 몰입하던 때였다. 2학기 개학을 하면 얼마지 않아 수시 원서 접수가 시작된다. 미리 진학하고 싶은 학교를 결정하고 요강에 맞게 준비를 해야 했다. 부모라고 해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고 아들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 기간에 남편의 병이 급격히 악화되거나 간성뇌증이 와서 다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가는 것을 더 이상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지금 상태로 입원하는 게 옳은 것인가. 혼자 걸을 수 있고 밥도 혼자 먹을 수 있고 통증으로 식구들을 괴롭게 하는 고통스러운 모습도 보이지 않는 상태인데 너무 이른 것은 아닌가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더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결단이 섰다. 간병 중 가장 어려운 점이 최적의 때에 최선의 결정을 하는 일이었다. 그 결정을 의논 대상자 없이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광복절 연휴를 온 가족이 함께 보냈다. 저염식 하는 남편 식단과 따로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식사를 준비해서 며칠을 야무지게 챙겨 먹였다. 타지로 떠날 딸아이의 반찬을 챙기고 호스피스 병원 짐도 챙겼다. 집에서 차로 10여 분 남짓하면 갈 거리지만 단독 간병을 해야 하기에 집에 오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겼다.


주말마다 집에 오기로 하고 딸이 먼저 타지로 떠났다. 아빠가 아파도 한 번 짜증내거나 우울해하지 않은 딸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아들과는 달랐다. 아들은 아빠의 병색이 깊어지면서 웃음이 점점 사라지고 대화도 줄었다. 상황이 고3이니까 그렇기도 했지만 간성뇌증이 와서 섬망증세가 있는 아빠 모습을 여과 없이 보는 게 충격이고 힘겨운 듯했다. 아들도 아침 일찍 인사를 하고 등교했다.


차마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는 남편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다. 객지를 돌고 돌아 말기암병을 얻고서야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제 집에서 겨우 석 달을 머물고 다시 집을 떠나야 했다. 석 달 동안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입원했고 응급실을 몇 번을 다녔는지. 그동안의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입원하고 컨디션이 좀 나아지면 상황 봐서 집으로 잠깐씩 올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은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의논이라 했지만 본인에게 어떤 결정권이 있었을까. 안 가겠다고 버티면 내가 힘들었을 텐데 말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병동 건물은 리모델링을 해서 실내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발열체크를 하고 배정된 병실로 올라갔다.

우리가 머물 곳은 보호자가 상주해야 하는 2인실이었다. 병실은 6차선 도로를 마주한 넓은 창문이 있었고 넓고 쾌적했다. 맞은편엔 말기위암환자가 있었다. 짐을 정리하자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면담 서류작성을 요청했다. 면담은 1시간 가까이 진행했는데 정성을 다하는 게 느껴졌다.

면담내용에는 임종의 과정에 대한 설명도, 받을 수 있는 의료처치에 대한 내용도 있었는데 걸림돌은 여전히 표적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치의 교수님이 발급해 주신 호스피스병원입원 의뢰서는 있었지만 원칙으로는 더 이상 생명연장을 위한 치료를 하지 않아야 입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투약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이후 거론되었지만 나중에 중단하는 일이 발생했다.


식사는 적은 양이지만 거르지 않고 먹었다. 수액을 계속 맞아서 그런지 갈수록 복수가 차는 게 눈에 띄었다. 혈관 찾기가 쉽지 않다고 병동 측에서는 케모포트 시술을 종용했다.

표적치료제 투약 3개월이 되어 예약된 대로 지역병원에 검사하러 외출했다. 아침 일찍 나섰지만 검사를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시동생이 병원주차장에 와 있다기에 시동생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마트에 들르자고 했다. 구매할 게 있었나 보다. 나는 막 출하된 샤인머스켓 포도 한 상자와 발효유산균 제품을 샀는데 남편은 과자종류를 여러 개 샀다. 환자가 무슨 과자냐고 물으니 쓸 데가 있다고 했다. 마트를 돌아다니는 동안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러는 사이 시동생이 김밥 전문점에서 김밥과 만두를 사 왔다. 


결혼 전 시부께서 무리하게 운영하시던 사업이 IMF로 직격타를 맞았었다. 결혼 후 더 어려워진 상황에 회생 불가한 사업을 수습하 동분서주했다. 남편은 시부께서 소천하신 후 건물과 땅, 운영하던 사업체를 상속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금리에 이것들을 하나 둘 줄줄이 은행에 넘겨주게 되다보니 가정을 전혀 돌보지 못했다. 두 아이 병원출입도 혼자서, 입학 졸업식도 혼자, 집안 행사도 혼자 싱글맘이 된 듯 혼자 양육했다. 남편과  함께 한 마트쇼핑은 마지막 쇼핑을 포함해도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했다. 그날이 마지막 쇼핑이었다.


식어가는 병원 식사를 물리고 오랜만에 셋이 김밥과 만두를 함께 먹고 샤인머스켓먹었다. 표정으로만 봐서는 회복기 환자 같았다.  다음날은 예약된 대로 결국 두 번째 케모포트 시술을 했다.




입원한 지 일주일쯤 지난 두 번째 주말을 앞두고 남편에게 미열이 있었다. 발열은 치명적인 징조라고 했는데 열이 점차 올라 고열로 순식간에 치달았다. 주말이 되자 40도 가까이 고열이 오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시동생이 이틀 휴가를 내고 교대로 간병을 했다. 날밤을 꼬박 새웠다. 고열 3일이 지나자 시동생도 나도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얼음팩으로 온몸을 감싸고 해열제를 맞고 먹어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도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힘들게 데려가지 말라고 기도했다. 마음속에 늘 그렇게 기도해 왔다. 의식 없이 오래 누워있지 않게, 고열과 혈토 하는 힘든 상황이 없게 해달라고 평안히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라고 기도해 왔다. 이미 지역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동안 아이들과 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놓았고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 호스피스 병동에도 이 사실을 알렸었다. 시동생에게 퇴근 후 와달라고 부탁했다. 급작스런 상황에 대비 장례를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의논을 해야 했다.

말이 의논이지,  단독결정을 해야 했고 결정권자는 나였다.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고열이 나는 동안 결과를 확인하러 지역병원에 내원해야 하는 날이 겹쳤다. 발열 때문에 남편은 내원할 수 없어서 외래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했다. 교수님은 표적치료제를 중단하라고 했다. 이미 고열이 시작되면서 약을 먹을 수 없어 중단한 상태였다. 혼자서 결과를 들으러 다녀왔다. 3개월 복용했으나 수치상으로 전혀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치료 효과가 없으면 보험적용이 안되어 고가의 금액으로 약을 처방받아야 했는데 더 이상 표적치료제 처방 의미가 없다고 했다. 처방받았던 약도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남아있는 상태다. 진통제를 포함한 나머지 약만 처방받았다.

매일 온몸을 떠는 오한이 있고 속이 불처럼 타는지 얼음물을 찾았다. 이러다 언제 그 순간이 올지 몰라서 그 와중에도 몸을 최대한 정갈하게 닦아주었다. 발열 5일째가 되자 열이 내렸다.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표적치료제를 더 이상 먹지 말라는 말도 치료 효과가 없다는 말도 전해야 했다. 3개월이 헛 일이 되었다고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텐데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혼자서 밥도 먹고 화장실도 다니고 걷기도 잘하던 사람을 호스피스 병원으로 입원시킨 것이 당시에는 못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는데 고열이 나면서 깨달았다. 그때 왜 빨리 결단의 마음이 들었는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머무르다 고열이 났으면 바로 응급실에 가야 했는데 코로나 상황이어서 발열환자는 격리되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진행됐어야 했다. 설사 응급실을 거쳐 입원치료를 받는다 해도 복잡한 검사만 진행될 것이고 다시 병원 내 감염의 위험 부담이 있고 치료의 방법은 없는 상황에 환자만 더 시달리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있어서 그걸 피할 수 있었고 수액과 주사로 고열 상황을 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 코로나가 아니라 암성발열이었다.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기도대로 고열과 혈토로 죽어가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덧)

이 매거진 글 발행을 해야 하는데 망설였습니다.

읽으시는 구독자님들 힘든 글이라서  계속 미뤘습니다.

그래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 글 포함 2~3편이면 매거진이 마무리됩니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마음이 많이 단단해졌습니다. 봉인이 이제 다 되어가고 뚜껑만 단단히 닫으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라이테가 참 밝고 씩씩하잖아요??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시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댓글창은 열어두었으나....

라잇킷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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