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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Aug 04. 2024

그 아침의 외침

노란 나비 한 마리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한차례 고열 폭풍의 상흔으로 통증이 늘어 진통제를 하루 두  맞았다. 다행인 것은 암성통증이 못 견디게 극심한 상황은 아니었다. 통증이 환자를 닮은 건지 잔잔하고 순한 통증이었다. 수완 좋은 시부를 닮지 않아 사업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할 순한 사람이 세파에 내몰려 이제는 삶의 끝머리에 누워있다. 누워서 화장실을 갈 때 외에는 병상을 내려오지 않았다. 원탁 테이블에서 먹던 식사도 병상에 앉아 먹었다.


복수가 점차 많이 차올라 복수를 빼야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굳이 병원에 내원하는 번거로움 없이 복수를 병동 내에서 뺄 수 있도록 복수 배액관 시술을 하라고 종용했다. 이 문제로 다음 외래 때 교수님께 문의를 드렸더니 감염의 위험이 크고 감염이 되면 막혀서 또 다른 곳에 배액관을 시술해야 하고 이게 반복이 된다고 추천하지 않으셨다. 복수를 빼러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 나중에는 2~3일로 간격이 좁혀졌다.


9월 중순 주말이 다가오자 호스피스 병원장님께서 주말에 아들 딸을 불러서 병실에서 온 가족이 함께 보낼 시간을 마련하자고 제안을 해오셨다. 따로 전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다. 코로나 상황이어서 불가능한 일이지만 특별하게 자리를 마련한다고 하셨다. 주말에 환자가족을 부르는 일은 결코 좋은 내용의 이야기는 아니다. 남편만 병실에 두고 30분 정도의 시간을 가졌다. 병원장님 경험상 추측컨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후회 없이 못다 한 효도를 할 것과 일반적인 임종 전 증상과 장례 절차를 말씀하셨다. 


마침 맞은편 병상도 비었고 온 가족이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배달음식을 주문하고  TV를 함께 시청했다. 일부러 입시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누었다. 아빠가 많이 아프지만 아들 입시에 관심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수시 접수에 관한 모든 준비는 아들이 혼자 하는 것으로  했다. 웃고 떠들고 여느 집 주말 밤처럼 보냈다. 우리 네 식구가 함께 한 마지막 밤이었다.





아들 원서 쓰기가 마무리되고 2차 준비를 해야 했다.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하면 2차로 면접과 체력측정, 신체검사를 함께 치러야 했다. 학교 입시 요강에 따라 2박 3일 합숙하며 2차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2차 준비에는 체력관리가 중요한데 날마다 아침을 거르고 점심 급식, 저녁 분식. 이렇다 보니 집중적으로 한 달 정도는 영양이 충분한 음식섭취를 하고 체력단련을 해야 했다. 2인실은 보호자 없이 오랜 시간 외출할 수 없어서 보호자 없이도 가능한 6인실로 옮겼다. 사흘에 한 번씩 집에 가서 아들을 챙겨주고 자는 아들을 두고 새벽에 병동으로 오곤 했다.  밤근무 간호사님은 요 며칠 내가 없는 동안 남편이 몹시 불안해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밤에 집에 가서 자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임종 후 병동에서 장례식장까지 운구 때 입을 옷과 양말을 챙겨 오라 했다. 수의 외에 이 땅에서 입을 마지막 옷이다. 간호사실에 보관해 두었다.


병실을 옮긴 날만 해도 말도 잘하고 웃기도 했던 사람이 2주 동안 급격히 상태가 나빠져 갔다.

몸은 말라갔지만 체중이 복수와 부종으로 줄어들지 않아 혼자 휠체어를 밀고 병원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9월 중순을 넘어서고 가을 들어 가장 기온이 낮은 날이다. 외래진료가 있어 이른 시간에 나섰다. 두꺼운 외투가 없어 무릎담요를 챙겼다. 그날은 시동생이 아침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해서 시동생 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간신히 휠체어에 의지해 혈액과 소변 검사를 마치고 진료 대기실에 앉았다. 1시간 대기하기 너무 힘들어해서 휠체어에서 내려와 무릎담요를 덮고 의자에 누워있게 했다. 이 병원에 남편보다 더 아픈 사람은 없는 것 았다.


 갑자기 목이 타는지 음료자판기의 콜라가 마시고 싶다고 했다. 대기 환자도 많고 코로나 상황이라 마스크를 내리고 뭘 마시는 게 조심스러워 진료를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 사주겠다고 했다.



 

순서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황달이 점차 배에서 목 부위까지 노랗게 피부가 변해갔고 복수로 인해 숨이 차고 통증이 좀 더 잦아졌다고 하니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처방해 주시겠다고 했다. 대기실로 나와 처방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후 간호사가 다시 이름을 부르더니 보호자만 들어오라고 했다. 환자 없이 따로 할 얘기를 전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더 이상 안 와도 되겠어요.

혹시 복수 때문에 힘들거나

응급상황이 생기면 그때는

응급실로 바로 시면 돼요.

오늘은 왔으니까 알부민 맞고 가세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일어서서 나올 수 없었다.  교수님이 티슈를 건네주셨다. 대기실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얘기를 또 어떻게 전해야 할지... 간신히 눈물을 닦고 진료실을 나왔다. 마스크를 쓴  다행이었다. 그 말을 전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묻지를 않았다.

병동약국에 가서 알부민과 마약성 진통패치를 갖고 주사실로 갔다. 간호사 선생님에게 부탁하니 패치를 가슴위쪽에 붙여주셨다.

남편이 이 가을을 지나고 흰 눈이 내리는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알부민 수액을 맞는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얘기를 했다. 어쩐지 미뤄선 안될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나중에 다 만날 거야.

순서만 다르고 시간만 다를 뿐

우리 식구는 모두 한 군데서 만나야지. 우리 셋은 천국에 가는데

당신만 천국에 못 오면 안 되잖아.

혹시 나중에 눈앞에 천사와 검은 옷 입은 사자가 함께 서 있으면 그땐

꼭 천사 손을 잡고 천사를 따라가야 해.

천사는 예수님이 보내주시거든.

천사를 따라가면

예수님이 있는 곳에 갈 수 있어.

그러면 거기서 행복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우리 식구 모두 함께 만나는 거야.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묵묵히 다가 아들이 보고 싶은지 학교가 끝나면 병동으로 오면 좋겠다 했다. 혼밥 하는 아들에게 저녁밥을 사주고 싶어 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싶었나  보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돌아오니  콜라를  찾았다. 몸에 좋지도 않은 음료를 왜 찾나 싶었지만 약속을 했으니 편의점에 다녀왔다. 국수를 좋아해서 편의점 옆 국숫집에서 잔치국수를 포장해 왔다. 그러나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다. 속이 울렁거리는지  콜라 캔의 절반을 여러 번에 걸쳐 마시고 선잠을 자다 깨다 했다.

아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후 딸에게 연락을 하니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어서 내일 아침에 집에 올 수 있다고 했다. 병동 측에 아들이 오후에 병동 출입이 가능한지 물으니 안된다고 했다. 지역에 코로나 환자가 급증해서 면회객을 차단한다고 했다. 임종 앞둔 환자의 가족만 방문할 수 있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병동 주차장으로 휠체어를 타고 나가서 만날 수밖에.

아들을 만나자, 잠깐 자리를 비켜 달라고 했다. 아들과 단 둘이 뭔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아들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돌아가는 아들에게 미안했다.




초저녁부터 구토 증세가 있었다. 종일 먹은 것은 물과 콜라뿐이니 구토라 해도 콜라밖에 나올 게 없었다. 속이 상한 나는 그러게 왜 콜라를 마셨냐고 한마디 했다. 잠깐 선잠을 자고 다시 토사물을 뱉고 밤새 반복하였다. 마신 콜라 양에 비해 뱉어내는 토사물이 더 많은 것 같아 맘이 심난했다.

나도 잠을 잘 수 없어 보호자 침상에 누웠다 앉았다 했다. 선잠에서 깰 때면 그런 나를 보고

"왜 안 자고 그러고 있어. 어서 자."

 환자가 되려 나를 걱정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눈앞에 헛것이 보이는지 자꾸 둘이 시끄럽게 싸운다고 어서 뭐라도 줘서 돌려보내라고 헛소리를 했다. 섬망인가 싶어 그냥 알겠다고 대꾸해 주었다.


아침 교대한 간호사님이 바이탈 체크하러 다녀갔다. 혈압, 맥박, 체온 산소포화도 모두 정상치였다.

덥수룩한 수염을 깎아주고 싶었다. 침상에 앉아서 마른 면도를 했다. 손톱도 정리하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 발도 말끔히 닦았다. 복수 뺀 자리 거즈도 간호사선생님께 부탁했더니 깨끗하게 교체해 주었다. 그 며칠 새 가장 말끔한 얼굴이 되었다. 통사정을 했지만 아침 식사도 약도 나중에 먹겠다고 미뤘다. 밤새 자다 깨다 해서 졸린지 아침 회진도 간신히 받았다. 


회진이 끝나자 병동내 환자 누군가가 생일을 맞아 그 자녀 되는 분이 축하 간식을 준비했다고 나눴다.

여기 환자는 모두 죽음이 멀지 않은 분들인데 그 와중에 축하하는 선물이라니. 애초에 생일이나 축하 같은 것은 죽어가는 자들의 몫이 아닌 것 같은 생소함. 낯설었다. 저들에게도 죽음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찬란한 날이 있었겠지.





그날따라 마음이 어쩐지 불안해서 긴 ㄷ자 복도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서성였다. 그러다 병상의 남편 들여다보고 다시 서성이고 반복했다. 에어팟을 끼고 찬양곡 한 개를  반복해 들으며 두려움을 물리치려 몸부림쳤다.


Don't Be afraid

반복해 듣던 그 노래


복도가 꺾어지는 모서리 옆 벽면에는 색지로 만든 1미터 높이 나무 모양의 커다란 부착물이 다. 나무의 가지 위에는 노란 나비모양의 메모지가 꽃처럼 수십  붙어 있었다. 각각의 메모지에는 사람 이름과 두 개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름  주인이 태어난 해로 짐작되는 날짜와  세상 소풍을 마무리한 날짜인 듯했다. 소풍 마무리 날짜는 올해 1월부터 열흘 전 날짜까지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났다.

병실로 급히 달려온 간호사들이 남편 몸에 분주하게  Vital signs monitor를 부착하는 동안 나는 반복해서 울부짖었다.

"지금이야. 천사 손을 잡아.

 예수님이 천사를 보내셨어.

천사 손을 꼭 잡고 따라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

그래야 우리 모두 나중에 만날 수 있어. 사느라 고생했어요.

먼저 가서 편히 쉬어요.



마지막 집을 향해 떠났다.

벽면 나무에 노란 나비 한 마리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매거진이 아픈 이야기라 회차가 거듭될수록 발행이 망설여졌어요. 함께 아픈 게 죄송했거든요.

그래서 스토리를 줄이고 마지막 회차와 에필로그를 동시에 발행합니다.

저는 종교가 있어서 제 관점에서 쓴 에필로그이기에 공감이 안될 수 있음을 양해 구합니다. 가볍게 읽어주시면 고맙습니다.


댓글창은 에필로그에 열려있습니다만

라잇킷으로도 충분합니다.


매거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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