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모든 것들에 정해진 시간은 없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은 없다.
비혼 주의를 지향하는 나는 몇 번이고 내게 설명하고 또 익히게 한다.
재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엄마가 나 몰래 등록금을 낸 학교에 나는 못 이기듯 등교했지만
스무 살.
남들이 다 하는 입학을 나도 해야 했으므로
나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나갔다.
뭐. 일단 남들 하는 거니까 해봐야지.
*
그래서 나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을 별생각 없이 남들이 하니까 후루룩 해버리지 말자고.
결혼은, 출산은 선택이라고.
그리고 오래 사귄 나의 애인은 그런 나의 선택을 빛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는 나는
비혼이지,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런 얄팍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나의 비혼 결심은
결국 쉽게 찢어져버렸다.
애인이 우리 사이를 "중단"하자고 했으므로.
아주 쉽게.
나는 비혼 상태가 아니라,
그냥 뒤처진 사람이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
애인은
대기업에 다니는,
차가 있는,
전셋집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귀퉁이를 기꺼이 내게 내어줬다.
통근차량이 있는 애인은 나에게 선뜻 자신의 차를 내어주었다.
나의 새 직장은 그의 집에서 30분 거리로,
대중교통이든 자차 운전이든 우리 집보다는 가까웠다.
나는 그의 집에서 먹고 자며,
그의 차를 타며,
그가 재산을 기꺼이 공유할 수 있게 되는 이 관계가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비혼 주의자였던 내가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시점이었다.
이별.
동시에 내 애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
아빠와의 불화에서 내가 당당하게 집을 나온 것은
애인에게 전셋집이 있기 때문이었다.
집을 나가버린 나를 보고 아빠는 더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언제든 나갈 수 있는, 차선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신랑감을 데리고 있는 나에 대해서 엄마 아빠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솔직히 고한다.
헤어지고 나서 했던 걱정 중 하나는 엄마 아빠가 받을 충격이었다.
부모님께는 집에 가기 전, 문자로 알렸다.
[헤어졌어. 집에 가서 자세히 얘기할게.]
나는 생각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서른둘의 나이에 애인과 헤어지고 결혼할 길이 없어진 곤란한 아이가 됐을 것이라고.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냐.'
(아빠가 했던 연애 조언들을 들으며 우리의 사이는 그것보다 깊다며 자신했는데 아빠의 우려도 다 맞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나는 서둘러 헤어진 후의 인생 계획을 대충 세워서 갔다.
괜찮아.
앞으로는 이렇게 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나 왔어. 문자 봤지? 나 헤어졌어.
피티를 할 시간이었다.
차인 이유는 이러하고( 최대한 나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처럼)
결혼은 당분간 생각이 없고
엄마 아빠만 괜찮다면 당분간 집에서 지내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말을 잃었다.
아빠는 우는 나를 보고 눈시울을 붉혔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엄마는 내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짐을 빼오라고 했다.
*
애인과 헤어지고 가장 힘든 부분은 무엇보다
더 이상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기분이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신체적 접촉에 매우 인색한 편이었고, 나는 그걸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젊었던 부모님은 굉장히 버거워했다.
그래서 애인의 존재는 가뭄에 단비 같았다.
언제든 접촉해도 되는,
오히려 나의 신체적 접촉을 매우 기꺼워하는,
내 인생에서는 처음 가져본 반응이고 존재였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난 이제 어떻게 하지?
*
헤어지고 온 나를 가족들은 안쓰러워했다.
내가 먼저 말하기 전 까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든 내가 말하면 조용히 들어줬다.
잠깐 들어와 있어도 되냐는 말에 나의 방은 새로 꾸며지고 있다.
-이제 나 결혼도 글렀고 엄마 아빠랑 살아야지.
마음속으로 준비해 간 피티는 엉망이었다.
하나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반응은 좋았다.
-좋지. 아빠는 네가 결혼 안 하고 같이 살면 좋아
첫 번째 가출.
독립이 끝나간다.
나는 조만간 그러니까 내가 다 괜찮아지면 전 애인의 집에서 짐을 뺄 것이고.
동생이 암막커튼을 달고
아빠가 새 침대를 넣어준 내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이제 전셋집이 있는,
차가 있는,
대기업에 다니는 애인이 없다.
그래도 나에게는
세상 전부라고 생각했던,
가족보다 소중히 했던 사람에게 차이고 나서도
아무런 계획이 없는 날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의외로 이게,
꽤나 힘이 된다.
*
물론 조만간 또 싸울지도 모르겠다.
이 집에서 나만 없으면 평화로울 것을 깨닫는 때가 조만간 또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나도 전세를 얻어서 나가면 된다.
차도 할부로 사면된다. 정 안되면 리스라도.
대기업은 아니지만, 엄연히 내 일도 있다.
며칠 사이에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이 모든 것들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