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쉬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쉬운 것이 결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상 마음을 먹고 나니 모든 것들이 쉽게 진행이 되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을 했다.
10년이 가까워지는 시간 동안
서로를 만날 때의 모습이 가장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친구가 많은 나에게는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자신의 정보를 나눠주는 사람 역시 많았다.
그러나 나는 늘 그렇듯 힘들었다.
엄마를 나에게 떠맡기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바라보며
대체 어쩌려고 저러고들 있을까 한숨이 나왔다.
내가 있는 한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없으면 알아서들 잘 챙기는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있으면 당연하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 결혼이 진행되면서
가족들은 나를 어려워하기 시작했다.
남의 집 며느리.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었다.
아직 결혼 전이었는데도 내가 집에 있는 것을 미안해 했다.
당연히 우리의 신혼집인 지방으로 내려가 있어야하는데.
그리고 내가 없는 시간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웃겼다.
정말로 가부장제에서 도망쳐서
가부장제로 도망을 간다.
내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고
힘들다고 읍소를 하는 것 보다
남의 아내가 되는 것이
우리 가정의 남자들에게는 더 영향이 있었다.
이전에 소개한대로 나는 아픈 아빠를 대신해
아빠가 벌려놓은 사업을 수습했다.
하루에 12시간씩 밥을 거르며 일하면서.
그런데 일 년 전.
엄마를 돌보는데 지친 아빠가 갑자기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던 모든 것들을 잃었고
경력이 단절 됐다.
내가 시작하지 않았을 뿐이지
모든 것을 만들어 놓은 내 사업에서
내 젊음과
내 생명을 쏟아넣은 사업에서
쫒겨났다.
일상을 하나도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남동생은
실질적으로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로 점점 입김이 세졌다.
그리고 나는
실질적으로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존재가 지워져갔다.
그 때 연락을 받았다.
나를 버렸던,
다시는 믿지 못할 남자에게서.
여전히 고고한 남자였다.
비혼주의를 원하는 내게
협상카드로 결혼을 들고 나온 그는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고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도 내게 '행복'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행복을 약속하지도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아빠가 아팠을 때 처럼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짐들을 떠맡고 있었다.
도망치자.
도망칠 수 있다.
나는 다시는 믿지 못할 이 남자 말고
이 나라의 호적법을 믿어 보기로 했다.
결혼은 미친짓이라는 노래가 있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미쳐있다.
나의 의무에, 책임에,
그러나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그 댓가 없는 강제적 희생에
하루를 더해 미쳐가고 있다.
미친 김에 하나만 더 미쳐보자.
서른셋에 송어는 미쳐버린 나머지
내 부모 둘 건사하기도 힘들면서
남의 부모 둘을 더 떠맡기로 했다.
나의 사주는 서른셋까지만 힘들 것이라고 했다.
서른 넷의 송어는,
그 때 부터의 송어는,
조금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꽉 막힌 가부장이라던 남자의 부모는
가부장답게
이제 걱정하지말라고
힘든 것 있으면 자신에게 기대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항상 내가 부양할, 모셔야할 존재였다.
하지만 남자의 아버지는 나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나의 아버지의 삶을 책임지듯이.
결혼은 쉬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쉬운 것이 결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상 마음을 먹고 나니 모든 것들이 쉽게 진행이 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버텨왔던 모든 것이
그냥 버텨왔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너무
쉽고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