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달의 증거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by 강채리

도연에게.



세상에. 국제 펜팔이라니!


내가 중학생 때 영어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국제펜팔을 시도했거든?

국제펜팔과 영어 선생님이 무슨 상관이냐면, 내가 외국에 있는 얼굴도 뭣도 모르는 아무개한테 영어로 편지를 써. 근데 그 편지의 목적은 사실 펜팔도 영어실력 상승도 아니야.

영어 선생님한테 그 편지를 가져가는 거야. 그 편지는 샘플을 보고 베껴서 아주 완벽하게 작성 돼있지. 그렇지만 내가 직접 쓴 것인 양 들고 교무실로 찾아가서 "선생님, 제가 펜팔을 시작했는데요~ 틀린 문장 없나 한 번 봐주세요~"라고 하는 거야.

영어 선생님이 날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할까.. 하는 기대로 가득차서 말이지.

나는 중학생 때 공부를 드릅게 안했어. 친구들이랑 노는게 제일 재밌었고 콜라텍에 빠져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잘했던 과목이 영어였단 말야. 그래서 아마 영어 선생님한테 더 예쁨받고 싶었나봐.

아, 그나저나 그 펜팔은 결국 실패했어. 왜냐면 선생님의 반응이 퍽 시시했거든. 어쩌면 내가 샘플 편지 베낀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도 김새 버려서 편지는 부치지도 않았어.

그래서 이 펜팔이 나에겐 첫 국제 펜팔인 셈이야. 우리의 물리적 거리는 '국제'가 맞긴 한데, 한국어로 펜팔을 하는 게 어쩐지 '국제'라는 단어의 위상을 훼손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교환일기 형식의 책을 읽고선 실제로 교환일기를 쓰기 시작한 독자들이 있다는 걸 알면 저자 본인들은 무지 뿌듯하겠지?누군가의 삶에 자신이 영향을 미친다는 건 근사한 감각일 거야.

난 사실 아직 책을 다 읽지도 못했는데(마지막 몇 장 정도가 남은 상태야), 책을 읽어가는 내내 너랑 교환일기를 시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뭐야.

얼마나 안달이 났냐면, 지금 파나마는 새벽1시야. 뭐, 그다지 늦은 시간도 아닌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아들이 생후5개월이라는 점을 알아줘라. 생후 5개월짜리는 새벽에 자다깨서 우유도 한번 먹고(곧 일어날 시간이다...) 그러곤 다시 잠들어봤자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졸라 아침형' 베이비야. 동이 채 다 트기도 전에 거실창을 열어 집안을 환기하고 알커피를 타는 사람이 되었다구 내가.


우린 서로 너무 다른데 희한하게 너와의 대화는 즐겁지 않은 적이 없어. 이제 너와 나는 시차만큼이나 처해진 상황이 달라졌는데 우린 어떤 대화를 주고 받게될까. 너무 설렌다.


그럼 이만 첫 편지를 끝내볼게.


P.s. 시간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